좋아하는 영화 <더 셰프>의 배경인 마이애미에 왔다. 8시간의 긴 이동 끝에 꿈에 그리던 마이애미 비치다. 숙소가 있는 다운타운에서 다리를 건넌다. 마이애미는 휴양도시지만, 대도시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마천루들이 즐비한 모습은 여의도를 연상시킨다. 해변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걷는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하늘 위 커튼이 걷치듯 조금씩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우와… 우와~~~~!!!"
저 멀리 수평선 너머까지 짙은 파란색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끝없이 펼쳐진 곱고 하얀 모래사장, 10월 말이지만 바닷속 온도는 그리 차갑지 않아 해수욕하기 좋다. 아이와 남편이 서둘러 물에 뛰어든다. 적당한 파도는 정우가 서핑 보드에 몸을 싣기에 최적이다. 마이애미 비치가 세계 최고의 해변 중 하나로 인정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정우가 잔뜩 신났다. 몸 전체에 골고루 붙은 근육과 부쩍 자란 키가 혼자 서핑보드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산 서핑보드가 어느새 작게 느껴진다.
“아빠! 여기는 내가 지금까지 와 본 해수욕장 중에 최고야. 너무 재밌어!!”
‘만 5살도 안된 녀석이 벌써 서핑보드에서 균형을 잡는데, 나중에 서퍼가 되겠다고 하면 어쩌지?’ 걱정도 되지만, 지금은 바다를 친근하게 즐길 줄 아는 아이가 대견하다. 파도에 몸이 휩쓸려 몸이 완전히 바다 안으로 빠져도, 기침 몇 번 하며 소금물을 뱉어내고 다시 서핑 보드에 올라탄다. 파도가 낮으면 아쉬워하고, 제대로 웨이브를 타면 와아~~소리를 지르며 즐긴다. 문제는 서너 시간을 한 시도 쉬지 않고 논다는 거다.
같은 시간, 나는 수건을 뒤집어쓴 채 모래사장 위에 누워 잠들었다. 따뜻한 햇살이 장시간 이동으로 쌓인 피로를 날려준다. 적당한 온도와 바람, 파도소리까지 휴식을 취하기에 완벽하다.
“이정아, 지금까지 가본 해변 중에 여기가 최고 같아.”
“나도 동감이야. 만약 미국에서 반드시 살아야 하는데, 한 곳만 정하라면 나는 무조건 마이애미!!”
마이애미 해변을 정원처럼 쓸 수 있다면, 천국에 산다는 표현도 과장이 아니다.
영화 <더 셰프>를 통해 유명해진 쿠바 샌드위치
마이애미 비치에 차키가 빠진 날.
이틀간 마이애미 비치에서 온종일 머물렀다. 오늘은 해변에서 수영하지 말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로 했다.
4박 5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세계적인 휴양 도시를 경험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등대가 있는 멋진 국립공원은 탁 트인 해안산책로가 펼쳐져 있어 걷기 좋지만, 10월 한낮의 마이애미 햇살은 너무 뜨겁다.
별수 없이 국립공원 내 작은 해변으로 발길을 옮긴다. 바다를 보자마자 정우는 입수 준비를 한다. 혹시 몰라서 차에 실어둔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오늘은 바다수영을 안 하기로 했지만, 결국 해수욕이 시작됐다.
이쯤 되면 마이애미의 가볼 만한 곳은 거의 포기해야겠다. 잠깐 놀다 가자는 말이 와닿지 않는 건, 열정적으로 노는 정우를 말리기 힘들다.
국립공원 내 작은 비치로 사람이 많지않고 조용하며 깨끗하다.
오늘 아침에도 남편과 정우가 수영장에서 1시간 동안 수영을 했다. 아들과 함께 수영장에 가면, 남편이 원하는 만큼 수영을 하지 못해 아쉽단다. 남편은 정우가 구명조끼 입는 틈에 혼자 수영하겠다며 재빨리 바다로 뛰어든다. 3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앗!!!!" 소리 지르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수영복 주머니를 뒤진다. 남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큰일 났다!!
주차장에서 해변으로 짐을 옮기는 도중, 차 열쇠를 수영복 주머니에 잠깐 넣어두었단다.
“이정아, 차 키 못 봤어?”
깜짝 놀란 나는 모든 짐들을 샅샅이 뒤진다.
없다.
없다.
없다!!!
“내가 아까 수영복 주머니에 넣어둔 것 같아.”
(수영복 주머니 속 차 키는 마이애미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더 무서운 현실이 다가온다.
“그런데, 나 핸드폰도 차에 놔두었는데.” 라는 남편의 말을 듣고 나니 화도 나고, 이 상황이 황당하고...
남편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모든 짐과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짐꾸러미 안에 차키를 둔 기억이 없으니 아무리 찾아봐도 나올 리가 없다. 지나온 길을 다시 더듬어 올라간다.
“오빠. 혹시 차키를 차 안에 둔 거 아닐까?"
“아니야, 내려서 문 감갔는지 분명히 확인했어.”
하아.. 안타까운 탄성과 함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더구나 남편의 핸드폰만 로밍 중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었다. 다른 곳도 아닌 마이애미의 어느 국립공원 속 이름 모를 작은 해변에서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두려움이 몰려오지만, 냉정을 찾아야만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영하던 남자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차 키를 찾아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수영장도 아니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차 키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오빠!!! 얼른 물안경 끼고 아까 수영하던 곳 근처 바닥에 떨어졌는지 찾아봐!!!”
철썩철썩 파도치며 흘러가는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진 물체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이내 포기한다. 어느새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고, 빠른 조치를 하는 게 더 시급하다.
아까 부탁했던 남자 일행이 쉬고 있는 텐트로 가서 자초지총을 설명하고, 핸드폰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봤다.
'리처드'라는 중남미 트리니타드 토바고 출신의 남자다. 그가 렌터카 회사 Hertz에 연락을 취한다. 상담사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남편에게 핸드폰을 넘긴다. 상담센터 여직원에게 견인 차량 요청과 잃어버린 차 키 비용 지불 등을 마무리한다.
Hert의 사건 접수번호와 당시 접수 내용.
견인차량이 왔으나, 그 기사는 견인 주차장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를 공항까지 태워줄 수 없다고 한다.
이곳은 마이애미 국립공원 모처의 해변이다. 당연히 택시나 지나는 차량이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견인 기사가 우리 차 문을 뜯고 있다.
다시 리처드에게 가서 도움을 청한다. 그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허츠에 문의 후, 택시를 불러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리처드에게 벌써 두 번의 도움을 받았다.
택시를 기다리는데 택시기사가 우리를 찾지 못했다. 국립공원 모처의 해변이기에, 설령 핸드폰이 있어도 관광객인 우리가 정확한 주소와 위치를 설명하기 힘든 곳이다. 로컬인 리처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결국 리처드의 차를 얻어 타고 택시기사가 있는 곳까지 갔다.
그들은 당황해하는 우리에게 쉴 자리를 내어주며, 맥주까지 권했다. 너무 화내지말라며 나를 위로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남편을 너무 혼내지말라며 위로해주던 착한 리처드와 사촌.
리처드와 헤어지기 전 인스타그램 계정을 교환했기에, 렌터카 회사에서 필요한 Case Number까지 DM으로 받았다. 그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운전 중에 차를 세워 우리를 도와준다. 그에게 총 4번의 도움을 받았다. 이쯤 되면 하늘이 우리에게 리처드를 보낸 거 아닐까?
마이애미 공항에서 새로운 렌터카를 다시 받았다. 렌터카 스마트 키 분실비용, 견인 비용 등 약 400달러가 추가로 발생했다. 당시 환율은 1달러 1,450원이니 잠깐의 실수로 약 58만원이 사라졌다. 울고 싶지만, 자책하는 남편을 위로할 수 밖에...
택시에 실려 마이애미 공항으로 가는 길, 마이애미의 멋진 마천루가 괜시리 슬퍼보인다.
그렇게 마이애미 공항 허츠에서 새 차를 인도받고, 늦은 저녁을 먹는다. 오늘 하루 고생했으니 맛있는 음식 먹으며 잊기로 한다. 호스트 Dan이 추천해 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려는 데, 정우가 갑자기 옆구리가 아프다며 인상이 일그러진다. 먹성 좋은 녀석이 맛있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배를 움켜쥔 채 울상 짓고 있다. 그 순간 모든 상념이 사라진다. 정우를 꼭 안았다. 그렇게 활달하던 아이가 순간 정지된 것 마냥 가만히 있는다. 뭉클해졌다. 부랴부랴 레스토랑을 나와 안아주며 배를 쓸어준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손은 약손~을 해주며, 약을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녀석이 뽀옹~ 방귀를 뀐다.
“엄마, 아까보다 훨씬 덜 아픈 거 같아.” 다시 한번 방귀를 발사한다.
“아빠, 이제 안 아픈 거 같아.” 배에 가스가 차 옆구리가 아팠던 모양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리처드와는 그 뒤에도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다른 차를 받았는지 꼭 연락해 달라고 한다. 참 좋은 사람이다. 우리는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여행지로 삼을지 고민했다. 여행 주의경보 국가라서 결국 포기했지만..
인생과 여행은 이런 것이다. 좋은 사람과 인연이 된다는 것만큼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