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아이의 소원이던 '디즈니월드'를 다녀온 뒤, 워싱턴 D.C.로 향한다.
어느새 미국 여정이 9부 능선을 넘어섰다.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해 대륙을 횡단하며 동부 보스턴까지 간다. 오늘도 7시간 넘는 장거리 이동이 기다리고 있다. 쉬엄쉬엄 가도 긴 이동은 버겁다. 게다가 "엄마! 우리 이제 뭐 해? 심심해!” 끊임없는 아이의 성화에, 정신적 피로까지 더한다. 오랫동안 차 안에 갇혀있는 건 5살 꼬마에게 너무 가혹하다. 정우가 좋아하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슬기로운 의사생활> ost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괴로웠을 거다.
마이애미와 올랜도는 미국 여정의 큰 줄기를 차지하지만, 마이애미는 해변, 올랜도는 디즈니월드가 전부다. 고작 그거 즐기려고 수천 km를 달렸던가? 때론 허망하지만, 이런 게 여행 아닐까 싶다. 긴 노력 후 열매를 즐기는 시간은 짧지만 그럼에도 달콤한 열매를 위해 먼 거리를 달려간다. 무엇보다 마이애미는 꼭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도시다. 여생의 일부를 보내고 싶은 도시를 찾은 것만으로도 가치 있던 여정이다.
땅덩이 넓은 미국의 날씨 또한 변화무쌍하다. 워싱턴까지 가는 길에 2개 주를 지나친다. 플로리다는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버지니아에 도착하니 어느덧 가을이다. 89일간 미국횡단하며 사계절 옷을 모두 꺼내 입었다.
드디어 워싱턴 DC에 진입했다. 완연한 가을하늘과 색색의 단풍옷을 갈아입은 나무들이 반겨준다.
11월 워싱턴의 풍경,
사진이나 미디어로 접하던 명소에 있어보는 건 엄청난 호사다. 뉴스에서나 보던 펜타곤을 지나, 국회의사당과 링컨 기념관도 지난다. 쭉 뻗은 도로 옆으로 흐르는 포토맥강과 조정선수들의 격렬한 움직임을 감상하며 드라이브를 즐긴다. 건장한 청년들이 노젓는 모습은 소금쟁이가 물살을 가르듯 장관을 연출한다. 해가 저물며 옅은 노을이 사방을 물들인다. 산책로에는 가벼운 차림으로 조깅하는 사람, 반려견과 산책하는 이들이 한가롭게 오후를 만끽한다. 워싱턴의 가을 오후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자연스럽다. 형형색색 단풍과 낙엽이 스산함과 함께 외로움을 몰려오게 한다. 이토록 강렬한 첫인사가 있던가?
숙소 호스트가 추천한 <Timber Pizza>에서 피자 세 판을 해치웠다. 환상적인 맛은 워싱턴의 출발을 완벽하게 했다. Bar 테이블에 앉아 사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상대방을 유쾌하게 만드는 밝은 미소의 사내다. 세계여행 중인 우리에게 워싱턴에 온 걸 환영한다며 멋진 모자 2개와 에코백을 선물해 주었다. 사람과 어울려 사는 기쁨과 즐거움을 다시금 느낀다. 정우는 모자쓰고 커다란 에코백을 앞치마로 두른 뒤, 피자 레스토랑 직원 행세를 한다. 밤거리를 걷는 건 여전히 긴장되지만, 고등학교 근처 주택가의 단풍과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쌓인 피로를 씻어준다. 풍요롭고 행복한 워싱턴의 첫날밤이다.
현재까지도 아이랑 세계여행 best 3 pizza에 손꼽히는 <Timber pizza>
해맑은 미소가 아름다운 사장님과 함께,
피자 레스토랑 직원으로 변신한 정우.
백악관, 링컨기념관, 세계 패권국의 중심.
드디어 백악관 앞에 섰다. 예상보다 경계가 삼엄하지 않고, 오히려 평온함마저 감돈다. 하지만, 저 안에서 일어나는 의사결정이 전 세계에 끼치는 파급력은 어마어마하다. 모든 것은 흥망성쇠가 있고, 영원은 없기에 언제 1등 자리를 내어줄지 모른다. 실제로 미국 부채는 4경이나 쌓여있고, 대형 은행들의 뱅크런이 이어지며, 미국 위기론이 거론된다. 그래서 더 치열하지 않을까? 플라시보 효과겠지만, 온몸을 감싸는 에너지를 느끼며 묘한 감동마저 스친다. 내가 백악관 앞에 서있다니,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백악관 앞, 어느 노신사가 찍어주신 가족사진.
링컨 기념관의 동상은 여느 동상보다 크다. 대단한 크기만큼 링컨의 표정 역시 근엄하다. 근심에 찬 듯하면서도 무언가를 쫓는 듯 미간이 깊다. 풍채가 장엄할 것 같지만, 사실 그대로 묘사한 동상의 팔다리는 꽤 가늘다. 앉아 있는 자세와 표정이 신체적 나약함을 덮어버릴 만큼 근엄하다. 모름지기 리더라면 마음은 따뜻하지만, 보이는 모습만큼은 강해야 한다. 그래야 모두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다.
링컨 동상 뒤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톰 행크스의 이름을 부르며 여자친구 제니가 달려와 포옹하던 초대형 분수 정원이다. 양 옆으로 광활한 공원이 펼쳐진다. 녹음 가득한 평지를 걷는 즐거움은 나이가 들수록 커진다. 우리 부부에게 공원 산책은 즐거움이자 행복이다. 정우가 몇 번이고 길 한가운데에 주저앉는다. 아름다운 공원에서 쉼 없이 걸으며 어느새 만보를 훌쩍 넘겼다. 걷기 좋아하는 어린이가 몇이나 있으랴, 비행기 좋아하는 정우를 위해 '우주항공박물관'에 간다. 미국 항공 역사와 주요 사건을 정리해 둔 스크린을 보는데, 엄마의 시간을 기다릴 수 없는 녀석이 다른 곳으로 가자며 막무가내로 몸을 밀어붙인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니 정우가 하는 말.
“지금은 정우를 위해서 온 거니까, 정우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엄마 아빠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시간이 아니야.”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녀석은 이미 입장할 때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다며 결심한 듯 하다. 점점 주관이 뚜렷해지고 고집도 세지는 59개월 어린이다.
엄마, 비행기 만든 대머리 할아버지들이네? (라이트 형제의 이름을 기억해주겠니?)
어제 환상적인 피자를 경험했기에 호스트의 맛집 추천에 무한 신뢰가 생겼다. 그가 추천한 일본라멘집에 간다. '라멘'이라는 말만 들어도 도파민이 흐른다. 뉴올리언스 이후 주차 포비아가 생긴 우리는 주차자리를 찾지 못해 포기하려다, 집 앞에 주차하고 걷기로 한다. 벌써 2만 보 넘게 걸었음에도, 그만큼 먹는 것에 진심이다. 미리 예약하고 방문하라는 호스트의 조언이 있었지만, 무슨 라멘집이 사전예약이야? 가서 기다리면 되지 했는데, 이미 오늘 예약이 모두 끝났으며, 기다려도 앉을자리가 없단다. 오 마이갓. 다시 들어가 워싱턴 여정의 마지막 날인데, 비어있는 bar에라도 앉으면 안 되겠냐 부탁해본다. 남편의 작은 눈이 절박함을 표현하기에 제 격이었는지, 앉게 해 주었다. 인생 라멘을 만났다. 일본의 웬만한 맛집보다 더 훌륭했다는 말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