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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Apr 19. 2021

쓰는 자와 모으는 자의 버킷리스트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것처럼 우리 집엔 모으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따로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돈 모을 궁리를 하는 사람과 돈 쓸 궁리를 하는 사람으로(이것은 쓰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다)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남편이고 후자는 당연히 나다.


남편은 신혼 때부터 좀처럼 쇼핑을 하는 법이 없고 물어도 필요한 게 없다는 남자다. 나도 명품에는 관심 없고 꾸미고 가꾸는데 서툴러서 특별히 큰돈 쓸 일은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결혼 후 지난 10년간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대출을 갚고 내 집 마련을 하고 집을 넓히면서 내가 얼마나 알뜰하게 살았던가! 문턱이 닳도록 오는 택배가 좀 찔리긴 해도 육아용품과 살림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아주 당연한 소비였다. 그럼 그렇고 말고. 하지만 절약하고 아껴온 현실과 별개로 리의 가치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2020년을 하루 앞둔 2019년의 마지막 날, 우린 맥주와 와인을 앞에 두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릴 때 2020년이 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줄 알았어. 적어도 자동차는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상상 속에만 있던 먼 미래에 당도한 것이 신기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린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게 되었다. 남편은 버킷리스트에 처음부터 심드렁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내가 먼저 신나게 리스트를 작성해나갔다.


나는 가장 먼저 이탈리아로 여행하기를 꼽았다. 신혼여행을 산토리니로 갔을 때 들를까 말까 고민하다 제외한 곳이었는데 그 이후로 갈 기회가 없어 늘 아쉬웠다. 특정한 지역으로 여행도 좋지만 남편과 아예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기 항목도 넣었다. 거기에 매년 책 60권 읽기, 모녀 여행하기, 차차 가라앉기 전에 몰디브 여행도 빼놓을 수 없지. 거기에 늘 바라던 책 쓰기와 운전에 능숙해지기, 주말농장 가져보기 등 10년 안에 해 볼 나의 버킷리스트를 적어가고 있을 때 남편이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나는 다주택자 되기!



어? 그게 당신의 버킷리스트라고? 가뭄 든 논바닥처럼 석한 남편의 버킷리스트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낭만 없게 다주택자 되기가 뭐람? 나는 그런 게 버킷리스트의 범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예상한 그의 버킷리스트는 '아들하고 자전거 여행하기' 정도였달까. 하지만 지금껏 보아온 그의 독서 리스트를 돌아본다면 그의 버킷리스트는 분명 다주택자 되기가 맞았다. 이어 땅 사기와 사장되기까지 버킷리스트에 추가한 남편은 의기양양하게 나의 버킷리스트를 향해 '아주 돈 쓰는 거밖에 없구만!'하고 일침을 날린 뒤 깔깔 웃었다. 서로의 버킷리스트 가볍게 비웃던 그때 우린 너무나 다른 서로의 가치관을 목격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집에서 꽤 사이좋게 잘 살고 있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 어느지구에 청약을 넣었다고 이야기를 해온다. '응 잘했네!'하고 대답하지만 짓지도 않은 아파트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디자인에 꽂혀서 캔 모양 실루엣을 가진 유리컵들을 보며 남편이 조금의 영혼도 담지 않은 채 응, 예쁘네~ 했던 것과 같은 이치랄까. 심지어 청바지나 새로 산 티셔츠 같은 것들을 남편은 샀는지도 모르고 지나간다. 내가 남편의 주식투자에 동의하고 첫 투자금을 그의 계좌로 보낸 뒤 관심을 두지 않고 다 잃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여전히 각자의 영역에서 가치관에 따라 열심히 산다.


애초에 내 인생에서 돈이 중요했다면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살았다면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뒤 먹고 사고 노는 일에 좀 더 열심히였을거라 생각한다. 남편과 다른 성향의 남자를 만났더라면 전세금 빼서 세계여행 가는 그런 거 한번 해봤을지도 모른다. 내게 과연 그런 용기 있을지는 좀 고민해봐야겠지만.


남편은 혼자 살았거나 남편과 같은 뜻을 가진 여자를 만났다면 진작에 빌딩을 지니고 살았을 것이다. 실루엣이 특이한 유리컵 대신 어느 가게의 상호가 찍힌 컵과  아들의 이름이 박힌 수건을 쓰고 화장지 칸수를 세며 통장잔고를 늘려 건물을 올렸겠지.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신기하게도 취미가 많고 여행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좋은 차를 타고 문을 열어주는 남자보다 매번 같은 옷을 입고 나오고 점심 먹을 돈을 아껴서 날 만나러 오는 스물살의 남편이 좋았다. 감성이라곤 없지만 건조하고 퍽퍽한 그의 농담이 정말 재미있었다. 매번 진심인  남자의 묵직한 말들이 좋았다.





퍼즐이 들어맞듯 너무도 다른 우리가 결혼한 덕분에 적당한 밸런스로 가정을 가꾼다. 지난해는 버킷리스트에 있던 주말농장 하기를 지웠다. 단순히 땅 여섯 평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었을 뿐인데 양배추와 토마토, 상추와 감자, 고추 같은 것들을 매번 두 손 무겁게 들고 오며 우린 전에는 모르던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책에서는 배울 수 없던,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들을 느끼며 명랑하고 건강한 봄, 여름, 가을을 보냈다. 나라 밖으로 여행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계절이 바뀔 때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나중이 되어 지금을 기억할 사진들을 남기고 낯선 숙소에서 하루 이틀을 보내며 일상의 소중함을 느꼈다. 어느 날엔 눈을 뜨면 바다가 보이는 침대에서 아침을 맞으며 내일 더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다짐도 이어갔다.




임신 막달까지 직에 다녔던 나도 결혼 기간 내내 역할에 충실했지만 남편이 이직이나 휴직도 없이 꾸준하게 자리를 지키고 재테크까지 열심히 해 온 덕에 일억오천짜리 전셋집에 대출이 반이었던 우리가 계절마다 여행을 가고 주말농장을 하고 더 장기적인 플랜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돈이 전부가 아니지만 생활 전반에, 일생을 통틀어, 크고 작은 선택 앞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쓸 궁리를 틈틈이 하고 있는 나도 가계가 기울면 남편과 뜻을 모아 새는 돈을 막고 소비를 줄인다. 전세살이도 아닌데 2년에 한 번씩 이사하자는 남편의 뜻에 따르고 내 기준에서 지나친 대출금과 이자를 끌어안고 그에 맞춰 생활비를 줄여나간다. 모을 궁리로 매일을 보내는 남편도 가끔 떠나는 여행, 아이들의 경험, 가족을 위하는 일 앞에 인색 적이 없었다.




여전히 내 장바구니에는 포르투갈 식기와 디퓨져 치고는 비싼 브랜드의 상품이 담겨있고 아주 고급스러운 소파가 위시리스트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생활이 여유로운 틈을 타 그것들을 차례로 사들이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지금보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책을 내는 일에 뛰어들 것이다. 그것이 내게 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오늘 남편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오! 주식 올랐네'하고 말했다. 언젠가는 청약에 한번 당첨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 다주택자가 되고, 사장이 되는 그날을 남편도 나도 기다리고 있다. 돈 쓸 궁리와 돈 모을 궁리가 적절하게 뒤섞인 우리의 버킷리스트. 그것들이 한 번씩 사이좋게 이뤄지기를, 그런 날을 꿈 꾸며 우리는 오늘도 감사하게 하루를 맞는다. 편의 버킷리스트가 이뤄지는 풍요로운 삶, 나의 버킷리스트를 다 지우는 낭만적인 인생 그 어디쯤에 우리의 먼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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