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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Dec 26. 2020

다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버스를 기다리지 않는 삶


26-2번 버스가 여전히 서울 가로지르는지 궁금하다. 열여덟, 고등학생이던 나는 매일같이 그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동네에서 학교로 가는 유일한 버스인 탓에 등교는 늘 전쟁을 방불케 했다. 기사 아저씨는 앞문과 뒷문을 동시에 열어 학생들을 꽉 채워 달리곤 했는데 어떤 날은 이름도 모르는 아이 가방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버스에 라야했다.

벽돌 같은 백팩 공격에 시달리고, 다리가 풀리기라도 하면 안면 없는 남자의 무릎에 앉게 된다는 지하철 2호선 지옥에 앞서 일찍이 내겐 이륙이의 지옥이 있었다


그나마 지옥에 탑승을 못한 날은 상황이 더 나빴다. 지금처럼 어플로 도착시간을 볼 수 있다거나 배차간격이 칼같이 지켜지던 시절이 아니라서 버스 한 대를 놓치면 지각의 위기에 처했다. 마음은 급한데 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아무리 목을 빼고 기다려봐도 26-2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함으로 발을 동동 굴렀던 그때의 분노와 갑갑함 두려움이 뒤섞 감정을 느끼며 정류장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도 26-2를 기다리던 암담한 순간 종종 찾아왔다. 사회초년생이던 그때, 나는 모든 것에 서툴렀다. 한 방송국의 막내작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게는 민함, 센스, 친화력, 책임감 등 많은 능력이 한꺼번에 요구되었는데 나의 마음도 잘 몰던 내가 상대를 헤아리는 일 잘 할리 없었고, 큰 판을 읽기는커녕 앞에 떨어진 일에 급급해 쉽게 당황했으며 결정적으로 소심했다. 그저 책임감 하나로 내 앞에 일들을 숙제처럼 해치우며 버텼다.


당장 다음 주에 방송을 해야 하는데 아이템이 잡히지 않을 때에도, 3일 만에 겨우 집에 들어가서 눈 좀 붙이려는데 '너는 이 상황에 집이냐'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쉽게 쪼그라들었고 바로 열여덟로 돌아가 26-2를 기다리는 암담한 마음이 되었다.



언제 오냐는 메시지를 보내고 내가 들어가기 전까지 작은 불 하나라도 켜 두던 가족들도 몇 달이 지나자 이 상황에 익숙해졌다. 어느 날 새벽 집에 들어갔는데 집안의 모든 불이 꺼져있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내내 붙어 다니던 친구들, 인생의 끝까지 함께 일 것 같던 대학 동기들도 다 각자의 현실이 버거워 피차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기 힘든 처지였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힘들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자기 전에 눈을 감으면서 '내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불 꺼진 집으로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내가 왜 일하고 있는지 잘 몰랐고, 자느라 전화를 받지 않는 남자 친구를 생각하며 연애는 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오빠 나 좀 데리러 오면 안 돼?


그날도 새벽까지 일을 했다. 일이 버거웠다기보다 그 일을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괴로웠던 시간들이 더 많았다. 그때 26-2를 놓치며 겉으로는 버스를 욕했지만 속으론 일찍 나서지 못한 스스로를 질책했던 것처럼.

어느 날 새벽 견디다 못해 남자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는 새벽 두 시 십오 분. 그는 경비아저씨만 있는 고요한 로비에 앉아 나를 기다리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택시비가 2만 6천 원이나 나왔어


남자 친구는 당시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둔 준생이었다. 본가는 지방이라 학교 앞에서 친구와 둘이 살고 있었는데 비싼 등록금과 월세까지 집에서 받아쓰기 미안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할증 붙은 택시비 2만 6천 원은 정말 큰돈이었을 것이다. 천오백 원짜리 학식을 먹던 그의 얼마나 많은 점심이었을까.



택시는 겨우 15분을 달리고 집 앞에 섰다. 그는 우리 집 앞 찜질방에서 자고 새벽에 첫차를 타고 다 말했다.

절박해서 부르긴 했지만 막상 혼자 집에 들어가려니 미안해 나에게 그는 '뭣이라고. 드가라.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늘 괜찮았다. 힘들고 답답한 상황을 이야기해도 '그런 거지'라고 넘겼다.

혼자서 버거운 일을 떠안아 괴로울 때조차 '사람들이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중으로 걱정하느라 내 삶은 점점 더 엉망이 되고 있는데 그에겐 모든 게 쉬워 보였다.



다음날 아침, 찜질방에서 나오는 그를 기다려 아침을 함께 먹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왜 이 사람이었나를 생각하면 그가 아무도 없는 새벽,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택시 안에서 손을 잡아주던 말없는 옆모습이 그려졌다.







그와 함께 택시를 타고 그 시절을 쏜살같이 지나왔다. 혼자 남겨져 26-2를 기다리는 기분이 들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건 '내가 나이를 이만큼 먹어서가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봤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은 언제나 벌어지고 만다.



그는 6개월 된 아기가 침대에서 떨어져 울었을 때도. 집 계약을 한 뒤 대출금이 다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내가 피를 흘리며 응급실로 가고 있는 택시 안에서도 손을 잡고 괜찮다고 말해줬다. "당연히 괜찮지 그럼." 남편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고 그래서 모든 게 괜찮았다.



언제나 매너 있고 다정했던 아빠와 다르게 그는 연애시절부터 혼자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니는 왜 안 오는데?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고, "어! 내 지하철 왔다. 안녕!" 하며 지하철역에 여자 친구를 혼자 두고 가는 천진함으로 나의 빡침버튼을 눌놓고는 "우리 동네에선 각자 집에 가는디."라는 말을 남기며 당당했다. 통화 중에도 번번이 잠들고 마는 남자였지만 나는 내 삶 전체를 관통하며 '괜찮다. 다 그런 거지'라고 말해줄 한 사람이 가장 절실했기에 끝내 그와 헤어질 수 없었다.



결혼식을 올린 당일 뒤늦게 스트레스가 몰려와 몸살 증세가 느껴졌는데 그 사실을 비행기 타기 전에 미리 얘기했음에도 와! 이 남자 이륙하기 전에, 그러니까 비행기 바퀴가 공중에 뜨기전에 잠이 들었다. 허리가 꼿꼿한 그 자세로 내리 다섯 시간을 자는 걸 보며 기가 찼다. 우리는 10시간의 비행을 했는데 내릴 때 상쾌한 표정으로 "와 두 시간 만에 도착한 거 같아!"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때 나는 결혼식 올린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선택을 의심했던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둘 다 쉬는 토요일 산부인과로 정기검진을 받으러 가면 비슷한 부부들로 앉을자리가 없었다. 10분이면 끝날 진료를 위해 한 시간 이상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에 코를 박고 말없이 게임을 하는 남편과 다르게 몇몇의 남자들은 집에서 챙겨 온 도시락에 포크를 꽃아 아내의 입속에 과일을 주고 있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느라 나도 공복 상태였는데. 그때도 나는 내 선택을 의심했던가(!)

작년엔 회식 후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 도통 돌아오지 않아 전화를 했더니 그가 "헉 나 신도림 차고지에 들어와 있어"라고 대답했다. "뭐? 거기 들어갈 때까지 잤다고? 그러게 내가 술 먹으면 택시 타랬지!!!!!"


결혼생활을 하며 상대 때문에 어이가 없고 기가 찰 때가 이뿐일까. '그래도 뭐, 어쩌겠어, 다 그런 거지.' 

고백하건대 남편은 나의 안정제이며 항우울제, 나의 세로토닌이자 도파민이다. 편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가 공대생이 아니라 글 좀 쓰는 남자였다면 결혼생활에 임하는 어이없는 내 행태를 두고 아마 전집 출판도 가능했을 것이다.


'말로는 어쩔 수 없지, 다 그런거지'를 달고 살면서 그의 손과 그의 몸이 얼마나 성실하고 부지런한지 나는 안다. 그는 26-2가 떠나면 아, 어쩔 수 없지. 그까짓 지각! 그래 놓고 다음날 한 시간 일찍 집을 나설 남자다. 버스를 타지 않기 위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단계를 밟아 이사를 준비할 남자다. 그가 삶을 대하는 가볍고 진지한 태도가 예민하고 소심한 나를 관대하고 낙천적인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래서 나는 오늘도 고백하고 만다. "오빠, 이제 다른 여자랑 살 기회는 없어. 이 생에도 다음 생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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