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의 여행법

궁색하고 우아하게 여행하기

by 김홍철

지난 십여 년간 매일 긴장 속에서 살았었다. 항상 달려야만 했다. 다가오는 마감과 발표 준비에 긴장한 탓인지 언제나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매일이 전쟁이었다. 제안서를 만들어내고 제출하기를 반복해야 하는 무거움을 짊어지고 빠르게 내달려야만 했다. 창의적인 일이라고 선택했던 직업은 어느 순간 기계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일을 능숙하게 하면 할수록 삶이 유연해질 것만 같았는데, 삶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더욱더 전선으로 내몰렸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보다 내 삶이 망가지고 있다는 스트레스가 더 크게 다가온 탓이었을까.


결국 계단 위에서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만두기에는 너무 가속도가 붙어버린 탓에 길 위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 절망하고 있었는데, 마침 타고 가던 차가 퍼져버렸던 것이다.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엄청난 공포감 뒤에 함께 따라온 건 아이러니하게 쾌감이었다. 이 모든 걸 그만둬야 할 아주 적당한 명분이 생겨버렸응급실로 실려가면서도 끝이 안보이는 길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소가 번졌다. 지금은 아주 천천히 달리고 있다. 난 점점 그렇게 게을러졌다.


이제는 생각을 멈추고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가만히 바라본다. 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내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느려도 뒤처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제 나에게 있어 시간은
잘 쪼개 써야 하는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누려야 할 '즐거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게으른 삶은 보기와 다르게 녹록지 않다. 게으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전투적이어야 한다. 몸을 움직인 정도와 결과물이 완성된 정도의 비율을 따졌을 때, 생산적이지 않거나 보잘것없다고 느껴지면 효율성이 떨어졌다고 간주한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무엇보다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내 머릿속은 언제나 분주하다. 이것은 여행에도 적용된다.


여행을 어렵게 결심하고나면, 그때부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시간과 거리를 모두 계산한다. 여행지에서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올 귀찮은 돌발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랄까. 거기에 같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할 일과 다 붙여버린다. 여행을 다시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말이다. 그렇게 계획은 완성된다. 굉장히 부산하게 움직이는 건 결국, 아주 긴 게으름을 부리기 위한 연료를 얻기 위해서다.


이제부터 나는 그 짧고 전투적이었던 나의 여행을, 오랫동안 다녀온 것처럼, 방구석에 앉아서 글로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궁색하지만, 아주 여유 있고 우아하게 하나씩 되짚어 볼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게으른 자의 여행법'이다.



#게으른자의합리화 #은밀하고도우아한게으름을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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