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 이야기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떠나겠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 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작곡가 고(故) 이영훈이 쓰고, 가수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이다. 헤어진 연인과 함께 거닐었던 덕수궁 돌담길을 찾아가 애틋했던 추억을 기억하는 노래이다. 광화문 연가는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라디오에서 처음 흘러나왔다. 그 시절 나는 부산에 사는 초등학생이었다. 동네 바깥으로 혼자 나가지도 못 할만큼 쫄보였다. 집 밖 세상이 그렇게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노래에서 그려지는 장소가 어디인지 궁금했다.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되었고, 그곳에 대한 별다른 추억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덕수궁 돌담길은 계절이 바뀔 때 종종 찾아 가는 장소가 되었다. 마치 내가 기억하는 공간처럼 말이다.
날이 추워지면, 낙엽, 트렌치코트, 사랑, 이별, 덕수궁 돌담길로 이미지가 차례대로 연상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모두 애틋했던 날을 떠올리며 덕수궁 돌담길로 향한다. 마치 개미지옥처럼 빠져든다. 연인들의 추억이 가득한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은 어쩌다가 사랑의 성지가 되었을까?
조선후기에 현재는 허물어지고 없지만, 덕수궁(당시 경운궁이라고 불림) 북서쪽에 영성문이라고 상례의식을 치르던 뒷문이 하나 있었다. 덕수궁 뒷길에서 영성문으로 가는 길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곳을 영성문 고갯길이라고 불렀다. 고갯길은 높은 돌담과 울창하게 뻗어있는 나뭇가지가 길을 둘러싸고 있어서 연인들에게 있어 그곳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최고의 핫 플레이스였다. 그때부터 덕수궁 돌담길은 사랑의 거리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연인이 자주 가는 최고의 데이트 코스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그에 반해 돌담길을 함께 걷는 연인은 헤어진다고 하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덕수궁 아래 대법원과 가정법원이 있었던 탓이었다. 사랑했던 부부도 그곳을 들어갔다가 나오면 남남이 되어버리니, 사랑의 거리라고 불리던 돌담길은 설렘이 가득하지만, 이별의 저주도 함께 서려 있는 곳이 되었다.
덕수궁 아래 있던 대법원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되었다. 이곳은 원래 퇴계 이황, 사계 김장생의 집터가 있었고, 원래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명문 공립학교였던 육영공원과 독일영사관 그리고 독립신문사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후 그 자리에 1895년에 대한제국 최고법원인 고등재판소가 들어섰고, 1899년에 다시 평리원(平理院)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1928년 11월, 일본은 그 자리에 있던 평리원을 허물고 경성재판소를 지었다. 경성재판소는 화강석과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 절충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 건축은 당시 우리나라 법원건축의 기준이 되었다. 이후 해방이 되고나서 3층이었던 건물에 1층을 더 올려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었다. 1995년이 되서야 대법원은 서초동으로 옮겨졌다. 남아있던 대법원 건물은 잠시 서울시 별관으로 사용되다가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지어졌는데, 경성재판소 특유의 파사드(facade, 건물 전면)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새롭게 지어 과거에 권위로 가득했던 공간을 시민에게 돌려주었다. 원래는 건축 전체를 그대로 복원하려고 했으나,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건축 전체를 모두 없앨 수는 없어서, 전면부만 남기고 건축물의 몸통만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정동길은 덕수궁 서쪽 돌담길에서 경향신문사(구 MBC 사옥 : 설계 김수근)가 있는 정동사거리(당시 서대문 혹은 돈의문)까지 뻗은 길이다. 정동은 원래 양반 귀족의 주거지역이었다. 1876년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뒤따라 서양 열강들이 밀고 들어왔다. 1885년이 되자 미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이 정동에 가장 먼저 들어섰는데, 미국은 선교사를 데리고 와 개신교로 이 지역을 선점했다. 거기서 생겨난 교회가 광화문연가에 나오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인 정동교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교회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했다. 건물이 지어지기 전에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선교사 언더우드가 처음으로 예배를 본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에 붉은 벽돌로 되어있는 교회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정동교회 건축이 우리나라 교회 건축의 표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덕수궁 주변은 대한제국 근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 건축적으로 모두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광화문 네거리는 현재 세종대로 사거리를 말한다. 광화문 네거리에는 국제극장이 있었다. 1957년에 문을 연 국제극장은 영화감독 신상옥이 춘향전으로 대박을 터뜨렸던 극장으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극장 앞 광장에 분수대를 설치하는가 하면, 일반적인 극장형 좌석 배치가 아닌 스타디움 좌석 배치가 되었다는 점을 보아 가설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자신감이 넘치는 건축이었다. 주변에는 덕수제과와 피맛골 그리고 빈대떡 거리가 있어 광화문 네거리 그 일대는 연인들에게는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을 포함해 아주 적합한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국제극장은 영화‘사막의 라이온’을 끝으로1985년에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는 동화 면세점으로 유명한 광화문빌딩이 세워졌다.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건축과 공간은 세월에 밀려 없어지거나 모양이 많이 달라졌다. 나는 어린시절 부산대학교 앞에서 뛰어놀며 자랐다. 그 곳의 80년대는 과일과게와 생선가게 그리고 정육점이 있던 아파트상가가 주변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그 옆으로 고갈비와 삼겹살을 팔았던 식당이 있었고, 어느 가게라고 할 것없이 요구르트병으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수족관을 장식한 매운탕 거리도 있었다. 이곳에 학생들은 낮에 열성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가 밤만 되면 상가에 있는 식당으로 기어들어와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며 민중가요를 함께 목청껏 불러댔다. 그러다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종종 싸움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유난히 시끄럽고 밝았던 그 때의 골목길이 지금은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변했다. 약국과 주택가가 있던 길 건너편에는 스타벅스와 수많은 프랜차이즈가 들어와 상권을 장악해 내가 알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다다미 구조의 양옥은 3000세대가 넘는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갔을 때 그냥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고향을 잃어버린 것만 같이 허망했다.
공간이든 사람이든 모든 건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언젠가는 모두 떠나고 변한다. 시간이 흘러 다시 오늘을 기억할 때, 지금 내가 어린 시절을 뒤돌아 보듯이 기억하겠지. 그 때는 광화문 연가 노랫말 첫 구절처럼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떠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공간은 오래 남아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처럼 말이다.
*충북변호사협회지에 기고
*메인사진 출처 : flickr/jinho 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