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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Feb 17. 2020

그랑 루브르로 보는 파격의 조건

텃세를 이겨낸 건축, 루브르의 피라미드

루브르박물관 / 건축의탄생에서

1983년,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회당 당수였던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1916~1996)이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거대한 문화프로젝트(Grand Projects Cultures)의 일환으로 프랑스 예술의 보고인 루브르 박물관을 재정비하겠다는 내용을 담아 대대적으로 예술사업에 투자하겠다는 공식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테랑은 중국계 미국 건축가 이오밍 페이(Ieoh Ming Pei, 1917~2019)를 주 설계자로 임명함과 동시에, 유리 피라미드 투시도를 공개했다.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는 루브르 박물관이 감싸고 있는 나폴레옹 광장 중앙에 떡하니 서 있었다. 반응은 심각했다. 프랑스 언론은

"장난스럽고, 불쾌하다. 이집트의 죽음을 대표하는 건축을 프랑스 파리 심장부에 들인 미테랑은 매우 어리석은 대통령"


이라는 내용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루브르궁에 피라미드를 들이겠다는 파격의 대가는 그야말로 비난 일색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상상할 수나 있을까?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 안뜰에 서 있었던 아픔이 있지 않았던가.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여태껏 본 적조차 없었던 형태의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왔을 때도 얼마나 시끄러웠었나. 거기서 조선 시대 유물까지 발견이 되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프랑스도 다르지 않았다. 루브르는 12세기에 야만족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센 강변에 성벽을 세워 만든 요새였다. 지하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후 왕이 거주하는 궁으로 쓰였다가 방치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왕족의 집으로 사용되었던 루브르궁은 1674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여러 아티스트들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시간이 흘러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루브르궁은 1793년에 정식 박물관이 되었다. 이렇게 역사깊은 박물관 중앙에 프랑스 자국민이 아닌,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가 와서 이집트 무덤인 피라미드를 짓겠다고 하니, 그에 대한 반발은 얼마나 커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12세기 루브르 성의 모습 (출처 : wikipedia) _ 루브르 성은 몇 세기 지나 모두 철거하고 현재 루브르 궁의 형태로 만들어짐



루이 14세는 1665년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니니에게 루브르궁 열주 설계를 맡겼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좋았던 천하의 베르니니도 텃세가 심한 프랑스의 높은 담을 넘기란 쉽지 않았다. 화려하기만 하고, 바로크 양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베르니니의 설계는 그대로 거절당하고 만다. 그랬던 역사가 있었기에, 프랑스는 또다시 페이와 같은 해외 건축가를 루브르궁에 불러들인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급진적인 미테랑 대통령은 루이 14세와 달랐다.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았다. 거기다가 나중에 나폴레옹 광장을 공사하던 중 왕족이 사용했던 그릇 등 엄청난 양의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는 등 많은 사건이 터졌지만, 급진적인 미테랑은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파격을 선택했다.


 

왼쪽부터 루이 14세, 베르니니, 베르니니가 조각한 플루토와 프로세르피나 (출처 : wikipedia)


이 모든 계획은 건축가 이오 밍 페이에서부터 시작됐다. 과거에 뉴욕 부동산개발의 큰 손인 뒤켄도르프가 운영하는 Webb & Knap 사에서 일을 해왔던 터라 건축가 이전에 전략가인 면모를 보였던 페이는 미테랑 대통령이 예술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설계공모가 나지 않았는데도, 혼자 루브르 박물관 증축계획안을 준비한다. 그리고는 완성된 루브르 증축 설계안을 들고 몰래 미테랑 대통령에게 면담 요청을 한다. 미테랑 대통령이 페이를 선뜻 만나줄 리 없었겠지만, 페이는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건축가였기에 미테랑은 그를 쉽게 무시하지 못했다. 미테랑은 페이에게 짧게 브리핑 할 수 있는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페이는 먼저 미테랑 대통령 앞에서 루브르 박물관 앞마당 중앙에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를 보여준다. 투시도를 본 미테랑 대통령은 굉장히 의아했지만, 그 이유에 대해 페이는 설명한다.


이오밍페이와 미테랑 대통령 (출처 : wikimedia)


"루브르는 기본적으로 동선이 잘못되었습니다. 건축물 세 동 중, 한 동을 재무성이 사용하고 있어 동선이 막혀있습니다. 그래서 관람 동선이 굉장히 길어져 매우 불편하죠. 그걸 해결하려면, 재무성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건축물의 모든 곳을 박물관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루브르 건축물이 감싸고 있는  나폴레옹 광장 아래 터미널과 같은 거대한 중앙 홀을 만들면, 동선의 혼잡을 줄일 수 있습니다."


페이의 말대로 루브르 박물관은 북쪽 건물에 재무성이 입주해 있었고, 나폴레옹 광장을 그들의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페이는 재무성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박물관으로 사용해야만 자유롭고 편리한 동선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박물관을 재정비하는 건 미테랑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도 아주 적절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미테랑 자신의 반대파인 재무성의 콧대를 꺾어버릴 아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어서 페이는 프랑스 기후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프랑스는 해양성, 대륙성, 지중해성의 모든 기후가 나타나는 데다가 일조량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하 중앙 홀은 자연광을 최대한 받아들이는 구조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재료는 유리가 제격이죠. 그리고 이곳에는 상징성이 있어야 합니다. 전 거기다가 피라미드를 올리겠습니다. 그 이유는 값비싼 보물이 묻혀있는 곳이 피라미드이기 때문이죠. 또한 피라미드는 영원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이 그렇듯이 말이죠."


브리핑에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던 미테랑은 페이의 제안에 설득 당한다. 미테랑은 유례없이 루브르 증축계획 건축설계 공모단계는 생략하고, 페이에게 설계를 일괄로 맡기기로 한다. 단, 박물관보다 높이 그려놓았던 피라미드를 낮게 설계한다면 계획을 추진하겠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페이는 자신이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사실을 4개월 동안 회사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했다. 대충 계획을 정리해본다면,


첫 번째, 길고 불편한 L형의 동선을 'ㄷ'형의 동선으로 만들어 루브르 건축을 모두 활용하도록 했다.

루브르 박물관 동선의 변화 (건축의 탄생에서)

두 번째, 나폴레옹 광장아래 또 다른 거대한 광장을 만들어 모든 공간을 연결했다. 중앙 홀은 루브르 박물관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동쪽의 쉴리(Sully) 관, 북쪽의 리슐리에(Richelieu) 관, 남쪽의 드농(Denon) 관으로 연결해 관람객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허브로 기능을 하게 했다.


세 번째, 또한 지하는 쇼핑몰 등 각종 편의시설을 둬서 풍부한 경험이 있는 곳으로 만드는 동시에 관람객의 순환이 원활한 곳으로 만들었다.

나폴레옹 광장 단면도 (건축의 탄생에서)

네 번째, 어두운 지하에 상부를 열고, 유리를 덮어 빛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피라미드가 되었다. 페이는 피라미드 형태 대신 큐브와 반구 형태로도 시도했었다. 하지만, 주변 건물과 가장 어울리는 건 안정성있는 삼각뿔 피라미드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루브르의 아름다운 파사드를 시각적으로 막고 싶지 않아서 피라미드는 유리로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극도로 투명한 유리가 필요했다. 페이는 유리 업체에 산화철 성분을 제거해 녹색을 띠지 않는 유리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한 후, 2년이 지나 아주 투명한 유리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유리를 고정할 프레임 역시 주변 색과 어울려야만 했기에, 루브르 박물관의 지붕 색을 분석해 이질감이 나지 않도록 색을 맞춰나갔다. 피라미드는 대형 1개, 소형 3개로 이루어진다. (이후 1993년, 카루젤 광장에 역 피라미드가 추가되어 총 5개의 피라미드가 된다.)


다섯 번째, 광장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피라미드에 주 출입구를 만들면, 박물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혼란스러운 관람객 동선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다.


그렇게 페이의 루브르 박물관 증축계획은 완성됐다.


때를 기다렸던 미테랑 대통령은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이에 여론의 반발은 더욱 심각했다. 여론은 미테랑이 일방적으로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는 데다가, 중국계 미국인이 프랑스 건축을 한다며 정통성을 문제로 거세게 불만을 표출한다. 이 문제는 프랑스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엄청난 양의 세계적인 유물을 가지고 있는 박물관이었기에, 프랑스 언론을 비롯한 전 세계의 언론이 미테랑의 결정에 비난을 가했다. 재무성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1870년에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한 이유로 정권교체를 하면서, 재무성이 100년을 넘게 루브르 박물관에 입주해 있었는데, 박물관 증축을 해야 한다며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는 통보를 받은 재무성 측은 여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미테랑을 크게 비난하며,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지연시켰다.

건축의 탄생에서


미테랑이 대통령 임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재무성 장관 발라뒤르는 미테랑이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다는 이유로 예산을 모두 동결해 버린다. 결국 루브르 박물관 계획이 중단된다. 그러나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이 재선에 성공하고, 파리 시장이었던 시라크도 박물관 증축계획에 합세하자, 재무성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로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는 다시 불이 붙어 마침내 1989년 루브르 박물관은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전한 재무성 건물 / 출처 : wikimedia

루브르 박물관을 개관하고 나서도 피라미드의 독특한 형태와 정통성 문제로 보수적인 프랑스 내부에서 인식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독특한 건축물이 보여주는 홍보 효과는 대단했다. 개관 후에 연 350만 명이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했고, 30년이 지난 2018년에 연 1,200만 명이 방문한 명실상부 세계 1위 박물관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파격은 격식을 깨뜨린다는 의미로 일정한 것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만들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파격은 안정감있게 유지해왔던 사회질서 안에서 의구심과 함께 일종의 공포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낯설지 않다.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서서히 다가온다. 파격을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익숙한 것이 서로 만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뿐인데 말이다. 누군가는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가 만들어 낸 것을

"바꾼 것은 없다. 단지 찾고 조합한 것일 뿐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파격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시간과 노력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조합에서 만들어진다. 루브르의 피라미드처럼 말이다. 페이는 오래된 루브르 건축과 더 오래된 피라미드를 한데 묶어 만든 것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만들어내기 전에 얼마나 큰 노력과 열정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스포츠에서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내는 건 그저 동물적인 감각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파격은 그동안 공들여 노력한 시간의 산물이다. 마치 활과 같다. 오랫동안 쌓아올린 '시간'으로 이루어진 작용은 잔뜩 당겨진 활시위와 같고, 한 순간 모든 걸 뒤엎어버릴 것만 같은 '파격'은 활에서 손을 놓았을 때 튕겨 나가는 폭발적인 반작용과 같다.


페이의 피라미드를 비난했던 프랑스에서도 오래 전부터 피라미드 형태로 건축하는 시도가 종종 있었다. 1700년대 불레(étienne-louis boullée, 1728-1799)나 루드( Claude-Nicolas Ledoux, 1736~1806)와 같은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 시공이 불가능했기에 결국 설계에서 그쳤지만,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라미드에 대한 건축가들의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실제로 피라미드가 나폴레옹 광장에 설 때까지 많은 데이터가 누적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전통양식에 새로운 양식을 접목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잘못했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형태가 되어버릴 위험이 크다. 건축은 한 번 지어지고 나면, 꽤 오랫동안 이 땅 위에 서 있어야 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로 무너뜨릴 수도 없는 일이라 무엇을 결정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OMA의 수장인 렘 콜하스는
 "건축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못생긴 건물을 지으면, 100년을 넘게 봐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을까?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누군가는 가끔 "저거 나도 만들 수 있겠네."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보고 그랬고,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그랬고, 이오밍 페이의 피라미드를 보고 그랬다. 피카소 그림이 처음부터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뒤샹은 처음부터 걸작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신고전주의 프랑스 건축가 불레의 피라미드 (출처 : flickr)


페이 역시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를 갑자기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페이는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 이전에 건축을 했었다. 워싱턴 국립 미술관 동관이다. 이는 루브르 박물관과 기능이 흡사하다. 미술관 지하로 각 공간을 연결하는 것과 상부 삼각뿔 유리창으로 지하 내부에 빛을 들이는 것은 루브르의 그것과 같다. 신고전주의 건축물인 국립 미술관 본관 옆에 현대건물로 지은 것도 루브르 박물관과 다르지 않다. 미테랑 대통령도 워싱턴 국립 미술관 동관을 직접 보고 나서 페이에게 계획을 맡겼다고 한다.

국립 워싱턴 미술관 동관 그림과 배치도와 입면 (건축의 탄생에서)


그리고 루브르 프로젝트 이후에도 그의 피라미드 사랑은 IBM본사로 이어졌고, 일본의 미호 미술관에도 유리피라미드의 흔적이 남아있다. 페이는 오랜 시간 쌓아온 깊은 내공으로 아무도 모르게 모든 걸 준비하고 기다렸다. 그렇게 단 한 번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파격은 수많은 노력과 오랜 기다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두껍게 쌓인 무게가 걸작을 만들어낸다.  

IBM 본사와 미호미술관 (출처 : wikimedia)


미국에 가고 싶어 어린 시절 찰스 디킨스의 소설과 할리우드 영화로 영어를 독학했던 18세 중국 소년의 오랜 열망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얼마 전 언론에서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이오 밍 페이가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102세의 나이로 페이는 세상에 커다란 파격을 남기고, 별이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드로잉 (건축의 탄생에서)



*한국건설기술관리협회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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