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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Mar 28. 2020

대한민국과 르 코르뷔지에의 아파트

유니테 다비타시옹

유니테 다비타시옹 (Unite d'Habitation, 프랑스 마르세유, 1947~1952) / 건축의 탄생에서


대한민국에서 어디를 가든 높이 쌓아 올린 아파트를 흔히 볼 수 있다. 넓은 마당이 있는 낮은 집에서 여유 있게 살던 민족이 어쩌다가 밀도 높은 아파트에 살게 되었을까?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전쟁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대한민국은광복 이후, 곧 한국전쟁으로 이어졌고, 모든 게 폐허가 되어 이 땅 위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라가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이제 좀 잘되나보다 생각했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자 북받쳤던 설움이 한꺼번에 단결된 민족성으로 폭발하게 되는데, 그 결과가 바로 경제개발계획이었다. 대한민국은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된 건물을 복구할 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국가는 인구증가 정책을 시행했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그에 맞는 주거공간과 시설을 지어야 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 없이 무조건 국가경제개발이 우선이었다. 불도저 시장이니 왕초니 하는 별명을 가진 인물도 등장할 만큼 경제개발에 총력을 다 했다. 국가 최우선의 목적은 오로지 경제성장이었기에 여기저기서 독재니 민주화니 불협화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했다. 이 좁은 땅 위에서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자는 절실한 마음을 가진 대한민국 집단의 신념이 투영된 아파트는 1962년, 한강 변 근처 허허벌판에 그렇게 처음 세워졌다. 우리는 아파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62년에 지은 마포아파트 / 출처 : 조선일보



주거목적으로 만들어진 아파트는 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건축적으로 보았을 때, 뉴욕에 있는 마천루 빌딩처럼높이 올린 건물은 상징성이있는 데다가 위엄이있어 보인다. 집합건물이라도 주거가 아닌 오피스 빌딩은 수익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체계적인 관리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에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집합건물은사람이 먹고, 자고, 배출해야 하기에 자칫 잘못하면, 위생이 나빠질뿐더러사람끼리자주 부딪쳐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래서 유럽에서 집합주택은 주변이 슬럼화 되어 계획은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같은 건축물이라도 위치나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좁은땅에많은 집을지어야만 했던 대한민국은 집합주택 프로젝트를 가지고 들어와 성공했다. 사실 성공했다기보다는 견뎌냈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니까 말이다.



18세기에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화려한 옷 대신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잘라내고, 얼굴마저 없는 밋밋한 것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우리는 모더니즘이라고 불렀다.사람이 쓸 수 있는 모든 제품은대량 생산되어 쏟아져 나왔다. 더욱 많은 물건을 팔아야 했기에, 한 번 만드는 데 몇 년씩 걸리는 장인기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산업화가 만들어낸 모더니즘은 영국에서 유럽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각 나라 간의 경쟁이 심각하게 과열되자 결국,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끝은 참혹했다.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건물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사람들이 살 곳과 일할 곳이 모두 사라졌다. 모두 빠르게 복구해야만 했다. 이것마저 경쟁이었다. 누가 빨리 복구하느냐에 따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마치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건축은 변화가 필요했다. 빨리 지어져야 했고, 단순해야 했다.그리고 튼튼해야만 했다.그래서 건축은 모더니즘을 선택했다.18세기에 등장한 모더니즘은 제품에만 국한되었다가, 19세기에 점차 건축으로 스며들더니, 20세기 초 세계대전을 치르고 나서 건축으로 급속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많은 건축가가 모더니즘 건축을 연구했었다. 사용기간이 길 수 밖에 없는 보수적인 건축은 변화에 둔해서, 모더니즘은 건축계로 아주 더디게 들어왔다. 그러나, 모든 게 무너져 버린 시국의 이야기는 달랐다. 세계대전이 전 세계를 휩쓸고 가자 건축에서도 모더니즘은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했다. 필립 존슨, 바우하우스의 수장 발터 그로피우스, 모더니즘의 대가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모더니즘을 옹호하는 건축가들은 모두 입을 모아 전 세계의 건축양식을 통일해야 한다는 국제주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건물이 부족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건축가가 있었으니, 이는 동그란 안경을 쓴 스위스 태생 건축가였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였다. 그는 '집은 기계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며, 현대건축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 여파는 대단했다. 그가 만든 건축이론은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을 가름하는 커다란 기준이 되었다.



그가 제시한 건축이론은 이렇다.


첫째,돔-이노(dom-inno) 이론이다. 돔-이노는 도무스(집, dommus)와 이노베이션(혁신, innovation)의 단어를 결합한 말이다. 오래전 과거부터 벽돌을 쌓아올리는 기존의 전통 방식은 벽돌로 만든 벽체가 건물의 무게를 견뎌야 했기에,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 무너질 때까지 벽체를 건드려 공간을 변경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돔-이노 이론은 그렇지 않았다. 벽체에서 받던 건물의 무게를 기둥으로 대체하면서,오로지 슬라브와 기둥으로일정한 형태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창을 자유로운 형태로 만들 수 있었고, 평면도 역시 그랬다. 그러니 건축에 돔-이노 이론을 적용하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짓기도 쉬웠다. 돔-이노이론이 세상에 나오자, 건축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졌다.


르 코르뷔지에의 돔-이노 이론 / 건축의 탄생에서


둘째, 그는 현대 건축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제시했는데, 이를 정리해'건축의 5 형식'이라고 부르며, 현대건축이 나아갈 큰 방향을 제시했다. 이 다섯 가지 형식은 건축을 기둥으로 들어 올린 필로티와 옥상정원, 기둥 바깥쪽으로 만든 긴 수평 창, 자유로운 파사드 그리고, 자유로운 평면이다.


셋째, 그는 인간이 공간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황금비율의 척도로 모듈러(modular) 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건축을 인간이 창조한 우주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터법이나 인치법을 기준으로 한 공간 설계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 행동반경이 중심이 되어야 했다. 이 이론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가구의 폭과 높이, 공간의 길이 등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 이론 / 건축의 탄생에서


이 모든 이론을 완벽하게 적용한 건축이 바로 프랑스 푸아시에 있는 언덕 위의 하얀 집, 빌라 사보아(Villa Savoye)이다.


빌라 사보아 (Villa Savoye, 프랑스 푸아시, 1928~1931) / 건축의 탄생에서



그는 건축잡지인 에스프리 누보에 자신의 건축'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를 발간하여, 현대 건축의 총체적 라인을 설정했다. 이 책은 현재까지도 건축학도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건축을 향하여와 에스프리 누보의 표지



코르뷔지에는 건축이론을 발표하고 나서 더욱 야심을 키워나갔다. 이제는 자신의 이론으로 일반적인 주택 건축이 아니라 커다란 도시를 건설하고 싶어 했다. 그는커다란 비행선이나 유람선처럼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대형 복합건물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평생 숙원사업이었다.대형 복합건물은 부족한 주거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르 코르뷔지에는 1920년대의 혼잡하고 비위생적인 프랑스 파리의 더러운 땅에서 발 디디며 살지 말고, 높은 빌딩 위에 도시를 건설해 쾌적하게 살자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를 부아쟁 계획(Une Vile Contemporaine)이라고 했다. 그가 발표한 계획의 내용은 파리 중심부의 건축물을 모두 철거하고,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수직도시를 건설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녹지공간과 비행장, 그리고 정류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계획이 우리가 흔히 아는 아파트 계획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아파트 한 동의 디자인을 보면 우리나라 강남에 위치한 타워형 아파트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이후 르 코르뷔지에는 파리 구세군 회관(1929), 스위스 학생회관(1930), 소련 첸트로 소유즈(1933) 등을 건설하면서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집합주택을 실험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가 알제리 통치 100주년이 되던 해에 르 코르뷔지에는 '플랜 오뷔(Plan Obus)'라는 신도시 계획을 제안한다. 내용은 알제리의 수도인 알제 해안가를 따라 길게 건물을 이어 붙인 집합주택 지붕을 고속도로로 만들자는 거대한 도시계획이었다. 여기서 약 18만 명의 사람이 거주할 수 있게 했다.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르 코르뷔지에는 결국 프랑스 마르세유에 플랜 오뷔의 집합주택 건물 한 동을 가져와 그의 열망을 실현했다.


플랜 오뷔 조감도와 스케치


바로 그의 대표작이자, 주상복합 아파트의 효시인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이다. 이를 한국어로 다시 풀자면, 집합 주거지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우리나라 복층 주상복합 아파트를 생각하면 된다. 이 건물은 게임 테트리스처럼 ㄱ형과 ㄴ형의 공간을 아래위 층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나서 만들어진 공간에 '길(street)'을 만들었고, 그곳을 통해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로 계획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론인 건축의 5원칙을 적용해 옥상에 정원과 수영장이 있는 카페테리아를 만들었고, 1층을 필로티로 지면에서 띄웠다. 그리고, 모듈러 이론으로 정해진 치수대로 공간을 인간이 살기에 아주 적당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정원, 어린이 교육센터, 피트니스 센터, 수영장과 함께 붙어있는 카페테리아, 어린이집, 교육 클럽 등 편의시설을 가득 채워 넣어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다양한 편의시설을 채워 넣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 건축과정 / 건축의 탄생에서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다. 현재는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이라 부유층이 살고 있지만, 다 지어지고 나서아파트를 빈민층이 사는 곳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저변에 깔려있는데다가 건물의 형태마저 당시 가치관과 너무 달랐던 탓에 사람들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기괴한 건물이라고 빈정댔었다. 결국, 이 건물은빈민계층이 몰려들어 점점 슬럼화 되는 현상을 겪었다. 마르세유 이외에도 프랑스 다섯 군데와 독일 베를린 한 군데를 추가로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지었지만, 이 계획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르 코르뷔지에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도 수직도시의 열망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계속해서스톡홀름,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네바 등 거대한 도시계획을 시도했다.




 

유니테다비타시옹 옥상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와 수영장 (Unite d'Habitation, 프랑스 마르세유, 1947~1952) / 건축의 탄생에서


그가 나이가 많이 들어 세상을 떠날 즈음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닮은 집합주택을 받아들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서울 마포아파트를 시작으로, 현재 구석구석 아파트가 서지 않은 곳이 없다.아파트의 기능과 형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날로 다양해지고, 달라졌다. 시설이 좋아지고, 관리가 우수해지자 아파트는 품격을 운운하며, 주거공간을 브랜딩했다. 아파트를 닭장이라고 치부하며, 인간이 살기에 너무 부적합한 비인간적인 건물이라고 비아냥댔던 사람들도 아파트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빈민계층이 살던 곳으로 전락한 원대한 집합주택 프로젝트가 동방에 있는 다른 나라에서 크게 성공한 걸 르 코르뷔지에가 살아서 알게 된다면, 내심 흡족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건축가 루이스 칸의 아들 내대니얼 칸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My Architect’에서 건축가 필립 존슨이 르 코르뷔지에를 잠깐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필립 존슨은 그를 잔인한 사람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하는데, 인간적인 모습이 부족했던 르 코르뷔지에를 썩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그만큼 그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사람과 공간을 모두 측정해서 황금비율로 만든 모듈러 안에 사람을 가두었다. 그는 집은 기계가 되어야 했고, 수학적인 치수가 사람을 편하게 만들 거라 확신했다. 공간은 사람이 살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를 건축에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집합주택은 매번 실패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파트가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들어왔다. 결과적으로 또 실패해야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손에서 토착화되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갈 현관을 만들고, 장독대를 둘 베란다를 만들었다. 이사 오면 떡을 돌리기도 하고, 반상회를 주기적으로 열어 사람들과 소통을 한다. 이렇게 관계를 품고 긴 시간동안 진화한 아파트는 이제 더이상 르 코르뷔지에의 아파트가 아닌 대한민국의 아파트가 되었다.


치수는 형태의 기본이 되지만, 관계는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르 코르뷔지에가 말하는 휴먼스케일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관계를 봐야 더 좋은 건축이 나오지 않을까.


*한국건설기술관리협회에 기고한 글입니다.


프랑스 마르세유에 있는 유니테 다비타시옹 (출처: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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