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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Dec 24. 2021

온전히 나를 닮은 건축, 집

[건축에SAY] 대한민국에서 집이라는 건축 (LH 한국토지주택공사 연재)


집은 온전히 나를 닮아있다.

 

한양 가든 테라스 / Illustration © 김홍철


밖에서 온갖 가식을 떨다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어서 빨리 온전한 나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현관 근처에 있는 옷장과 빨래 바구니 그리고 쓰레기통에다가 허물을 모두 벗어 던져 버린다. 그 순간 난 도시 남자가 아닌 순결의 원시 인간으로 순식간에 퇴행해 몇 발치 앞에 있는 거실이라는 동굴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거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푹신한 소파에 등을 던져버리고 입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기괴한 신음과 함께 온몸을 비틀다가 쥐 죽은 듯 미동도 없이 이내 잠이 들곤 한다. 


퇴근 후에 나는 모든 걸 차단한다. 빛이 아닌 어둠을 가리려고 블라인드를 치고, 정신 사나운 세상을 알려주는 TV는 꺼버리고 단절을 즐긴다. 비로소 정적이 내 머리에 채워지면 귀에서 들리는 약간의 이명과 내가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부스럭거림에서 난 위안을 얻는다. 그러다가 힘들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장식에 불과한 집안 살림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가구 색과 모양 그리고 구성이 아주 조화로워 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좋다. 거기다가 그저 손을 뻗기만 하면 내가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공간에서 나는 기꺼이 왕이 된다. 집은 마치 아이언 맨의 수트와 같다. 내가 잘살아갈 수 있게 아주 편리한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내 집은 그냥 나이다.


넓은 집도 좋지만, 많이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나는 좁은 집도 기꺼이 사랑한다. 나라는 인간이 모두 역력하게 드러나는 내 집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나만의 성지이다. 내 두 팔을 뻗고, 내 두 발이 닿는 그곳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내 공간은 내 바람이 그대로 만들어져 나를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집은 온전히 나를 닮아있다.



*LH 한국토지주택공사에 기고한 글입니다. 


때로는 기계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한다.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살아가기 위한 기계'라고 말했다. 그는 건축을 벽체로 짓는 전통 방식에서 기둥으로 짓는 현대 방식으로 바꾼 건축가이다. 이를 돔이노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건축은 르 코르뷔지에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졌다고 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그는 필로티 기둥으로 건물을 공중으로 들어올렸고, 평면과 입면 그리고 창문의 형태도 모두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옥상에 정원을 만들어 건축물에서 산책할 수 있게 했다. 이를 ‘건축의 5형식’이라고 한다. 

좌: 르 코르뷔지에 wikipedia / 우: 빌라 사보아 wikimedia


그는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 인간의 그것처럼 사람의 행동반경을 기준으로 모듈러 시스템을 만들었다. 듣기만 해도 차가운 단위 안에 사람을 가둔 것처럼 느껴진다. 기계니, 모듈러니 하는 것은 감정이 모조리 배제된 채 그저 편리가 목적인 도구라고 여겨져 내가 알고 있는 따뜻한 집과 결이 아주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모듈러 시스템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최대한 안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든 인간 행동 범위를 통계학으로 만들어낸 고도의 섬세한 장치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 / Illustration © 김홍철, 건축의 탄생에서


천장이 높으면 창의성이 좋아지고, 공간이 너무 좁거나 넓으면, 불안감이 커지듯이 적당한 공간과 일정한 간격에 따라 내 기분이 좌우되는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감성의 많은 부분이 치수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말동안 거실에서 하루 종일 드러누워도 좋을 정도의 소파와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게 만들어진 테이블 등 모든 가구는 아주 적절한 치수로 만들어져 사람의 마음을 위로한다.



 살기 위한 기계, 대한민국에 들어오다.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살아가기 위한 기계'라고 말했다. 그는 건축을 벽체로 짓는 전통 방식에서 기둥으로 짓는 현대 방식으로 바꾼 건축가이다. 이를 돔이노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건축은 르 코르뷔지에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졌다고 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그는 필로티 기둥으로 건물을 공중으로 들어올렸고, 평면과 입면 그리고 창문의 형태도 모두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옥상에 정원을 만들어 건축물에서 산책할 수 있게 했다. 이를 ‘건축의 5형식’이라고 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 fondationlecorbusier.fr


르 코르뷔지에는 집단 주거 건축에서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를 깊게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개인 주택에서 집단 주택의 단계로 들어서는 순간 내 영역은 침범당하리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있어 아파트처럼 획일적으로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건물은 개성과 예술성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장식을 일체 배제한 대형 집단 주택은 바로크니, 로코코니 하는 화려한 장식 건축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들의 미학적 가치관을 통째로 흔들어 버리는 건축이었다. 결국 개인주의 성향으로 개성이 강한 프랑스에서 집단 주거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그렇게 인식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진 집단 주택은 르 코르뷔지에가 죽고 나서 멀리 돌아 대한민국에 들어왔다.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대한민국 최초 단지형 아파트, 마포아파트 / 서울시


대한민국에서 전례가 없었던 아파트라는 고층 건물이 처음 들어왔을 때 공실률은 절반 이상이나 되었다. 프랑스처럼 아파트는 빈민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전혀 보지 못했던 건축물에 적응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곧 사람들에게 아파트라는 신문물은 합리적인 곳이라는 인식으로 다가왔고 금방 적응했다. 오래전부터 마실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돌면 모든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서로의 안부를 잘 물었던 한국인의 낮고 넓게 수평적으로 연결되었던 사회는 수직적인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관계는 더 입체적으로 변했다. 한국인의 습성은 아파트를 진화해 나갔다.   

롯데 타워에서 본 서울 모습 / © 김홍철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 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에 아파트라는 것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18세기 말부터 선교사를 통해 서양 건축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현대 건축을 직접 마주하기 전에 일본이 먼저 서양의 것을 일본의 것과 섞어 자기들 편한 식대로 이 땅에 심었다. 사람들은 이 건축을 문화주택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흔히 양옥이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적산가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서양 것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세련되고 좋아 보였던 시기에 문화주택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선망의 집이었던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의 문화주택 folkency.nfm.go.kr


물론 우리 조선 건축에도 독자적인 변화가 있었다. 오래전 계층 사회에서 권위적이었던 사대부의 한옥은 권력의 크기만큼 거대했다. 그만큼 공간마다 기능도 다양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성리학은 쇠퇴하고, 실사구시의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같이 들어온 건 외부의 침략이었다. 그렇게 일본은 무역을 빌미로 한성부에 슬그머니 발을 붙였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에서 일본은 청계천 아랫동네인 남촌에 거주했고, 조선인은 청계천의 윗동네인 북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도시화와 산업화로 점차 늘어만 가는 일본인은 거주할 곳이 모자라 조선인이 사는 북촌을 넘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마저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선인은 일본인의 북촌 진출을 막아야 했다.


 이기려면 머릿수가 중요했다. 사람이 부족하면 밀리는 형국이라 지방에 있는 조선인을 한성부로 불러 모아야 했다. 그래서 조선의 대형 디벨로퍼 정세권을 주축으로 개설한 건양사는 조선인을 위한 시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몰락한 왕족과 양반들의 땅과 집을 매입해 서민이 살 수 있는 공간을 잘게 쪼개서 누구나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그들은 서민들에게 집을 빌려주는 임대사업을 벌였고, 낮은 이자로 대출도 해주는 말 그대로 현재 주택공사가 하는 일을 했었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살 수 있는 한옥 주거단지를 조성했다. 그곳이 지금 삼청동과 가회동에 자리한 북촌 한옥마을이다. 만일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 북촌 한옥마을의 모습은 매우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1968년 창신동 한옥집단 지구  (홍성희 제공)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에서


그렇게 한옥은 현대식으로 변화했다. 생활하기가 불편했던 재래식 시설을 현대식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한옥으로 수도시설을 끌어들여 물을 사용하는 시설은 모두 부엌 근처에 두고, 부엌은 모두 입식으로 바꾸었다. 거기다가 대청마루에 문을 달아서 거실을 만들고, 기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있는 벽체를 기와 끝 선까지 확장해 더욱 넓은 주거 공간을 확보했다. 이 형태가 현재 우리가 사는 아파트 평면의 전신이 되었다. 


좌: 창덕궁 연경당 평면, 중: 1900년대 초 개량된 계동 한옥 평면, 우: 아파트 평면 / Illustration © 김홍철



개량 한옥의 평면은 다시 아파트로 들어와 대문은 신발을 벗고 들어올 수 있는 현관이 되었고, 마당과 대청마루는 거실이 되었다. 또한 거실을 가운데 두고 방을 빙 둘렀고, 외부와 맞닿은 곳에 발코니를 만들어 김치와 장을 담은 장독대를 두었다. 거기다가 누군가 이사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떡을 돌렸고, 동네를 꾸려나갈 반상회를 주기적으로 열어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동안 관계를 품고 진화한 아파트는 더 이상 르 코르뷔지에의 아파트가 아닌 대한민국의 아파트가 되었다.  



'집은 안식처지요.
86년도죠. 전에 와봤는데 참 좋더라 싶어서 한 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TV에서 어떤 여자분의 나긋한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방영되고 있는 건축물에서 묵직하게 자리잡은 공기 사이로 새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사원과 같은 그런 고즈넉함이 있었다. 건물 곳곳에는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고, 평상과 장독대가 집 안 곳곳에 있었다. 한국인의 정서가 가득 묻어있었다. 이 건축물은 1984년에 건축가 고 김석철 선생님이 지은 ‘한양 가든 테라스’였다. 애석하게도 이제 재건축이 될 운명이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눈에 담으려고 나는 부랴부랴 대구로 내려갔다. 가든 테라스는 건축가의 도전과 건축주의 결심으로 탄생한 지금의 획일화된 단지형 아파트와는 많이 다른 아파트였다. 넓은 테라스 가 있어 가족과 주민이 함께 어울리는 작은 사회가 있는 곳이었다.

한양 가든 테라스 외부 전경 / © 김홍철


그런데 사실 이 건축물이 지어지기 전에 비슷한 형태의 건축물이 있었다. 1960년대에 서울에서 세운상가나 낙원상가와 같은 주상복합 아파트가 먼저 지어졌었다. 1980년대 가든 테라스가 지어졌을 때는 그보다 시간이 좀더 흘렀을 즈음이긴 했다. 당시 주상복합 아파트는 필로티로 건물을 바닥에서 들어 올려 1층에 상가를 만들었고, 기다란 수평 창을 만들어 시야를 개방했다. 그리고 사람은 건물 위로 보행할 수 있게 했고, 옥상 정원을 만든 그야말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의 5형식을 그대로 본뜬 건축물이었다. 서울에 지어진 주상복합 아파트는 종각 맞은편에 세운상가를 필두로 서울의 척추를 만들겠다는 불도저 서울 시장 김현옥과 1세대 현대 건축가 김수근이 함께 만들어낸 건축 형태였다. 한양 가든 테라스는 기존의 주상복합에서 사용된 보행 도로를 정원 테라스로 만들어 주민에게 돌려준 형태였다.



세운상가 / ⓒPixta


세운 상가 초기 입면 계획 / Illustration © 김홍철
한양 가든 테라스 입면 / Illustration © 김홍철


한양 가든 테라스에 도착했더니 주변은 고층 빌딩 공사가 한창이었다. TV에서 보았던 활기찬 아파트의 모습은 없었다. 깨진 유리창과 건축자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길 곳곳에는 재건축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고, 반복적으로 연신 뚝딱거리며 울려대는 망치 소리가 들렸다. 뭔가 서글펐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구 중심가를 가로질러 우뚝 서 있었던 아파트는 이제 작고 초라했다. 이젠 과거의 위풍당당했던 자태를 뒤로하고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니 내심 아쉬웠다. 


좌: 한양 가든 테라스 필로티 공간, 우: 2층 계단실 / © 김홍철


"원래 이렇게 살았었어.
집이 너무 획일화되다 보니 오히려 차별화된 것뿐이야."


건물을 둘러보려고 필로티 안으로 들어가니 관리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을 관리하시는 할아버지께 건물을 둘러봐도 되냐고 여쭸더니 여긴 이제 아무도 살지 않으니 맘껏 돌아보라고 하시면서 흔쾌히 현관문을 열어주셨다. 이미 엘리베이터는 멈춘 상태라 한 층씩 걸어 올라갔다. 3층에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았을 테라스가 보였고, 나무는 그대로 자라고 있었다. 텅텅 비어있는 아파트는 40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왔던 흔적만 남아있었다.


좌: 3층 복도 테라스, 우: 3층 주거 테라스 / © 김홍철


아파트가 지어질 때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40년을 살았다고 말씀하시던 할아버지는 여기가 뭐 그렇게 볼 게 있냐고 하시고는 “원래 우리는 예전부터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았었기 때문에 이런 아파트가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지. 시간이 지나서 아파트가 점차 성냥갑처럼 획일화되다 보니 이 아파트가 오히려 차별화된 게 아닐까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당연하게 살아왔었다. 그러나 가족 규모가 점점 작아지면서 공간은 점점 협소해지고 단순해졌다. 그리고 오히려 비싸졌다. 우리는 이제 상품화된 공간을 계속 옮겨 다니면서 집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시대가 왔다.

오히려 오랜 과거의 인간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유목하던 노마드 세상이 이렇게 재현이 될 줄이야.




"건축가가 유명하면 뭐해. 집이 예쁘면 뭐해. 무조건 잘 지어야 해.
그래도 난 이 집이 참 좋아."


할아버지가 말을 이어 나가셨다. "사실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을 때 나도 인터뷰가 들어왔었어요. 그런데 안 됐어. 사실 내가 이 건물에 40년 평생을 살다 보니 좋지만은 않았어요. 층간 소음에 사람들이랑 싸우고, 천장에 물이 새서 이거 수리하는 데만 돈 무지하게 깨졌죠. 이 이야기를 하면 방송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차마 인터뷰를 못 하겠더라고."라고 말씀하시고는 "건축가가 유명하면 뭐 해. 집이 예쁘면 뭐 해. 무조건 잘 지어야 해요."라고 역정을 내시다가도 "그래도 이 집이 참 좋아요."라고 말씀을 맺으셨다. 마치 내 자식이 가끔씩 미운 짓을 해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 마음이 아니었을까.


좌: 한양 가든 테라스 뒤 주차장, 우: 관리 사무실 / © 김홍철


거기다가 자신이 결혼 후에 새롭게 장만한 집이어서 그런지 더욱 애정을 가지고 계신 듯 했다. 재건축으로 관리사무소에 앉아 집을 이제 떠나 보내야하는 할아버지는 마치 집 떠나는 자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문 앞에 서서 배웅하는 것 같아 보였다. 집이 무너질 때 잘 가라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말이다. 


집은 그렇게 지어져야 한다. 집은 내가 되어야 하고, 내가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 있어야 한다. 훌륭한 위인을 오랫동안 회자하는 것처럼 집도 그래야 한다. 멋있는 집은 보기에 좋고, 잘 만들어진 집은 살기에 좋지만, 좋은 집은 사람이 오래 머물고 기억한다. 오랜 시간을 집에서 먹고 자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워나가면서 만들어낸 많은 흔적이 그대로 공간이 되어 나를 편안하게 했듯이 대한민국 집은 우리가 만들어갈 흔적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 오래 기억하고 머무를 수 있게 온전히 우리를 닮은 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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