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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Feb 04. 2022

도로 위에 지어진 낙원, 낙원상가

건축드로잉과 함께 하는 낙원상가의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낙원상가 / Illustration © 김홍철


내가 스무 살이 조금 넘었을 때 낙원악기상가에서 구입한 기타를 메고 길을 나서면 그렇게 걸음걸이가 당당할 수 없었다. 기타를 산 지 얼마 되지 않아도 ‘힙’한 뮤지션이 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기타를 들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미 주변에서 언더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이 되어 있었다. 난 겨우 코드 네 개만 알고 있었다. 기타 연주에서 가장 기본인 C 코드와 G 코드만 알면, 세기를 아우르는 희대의 명곡 '나비야'를 칠 수 있었고, 하나 더 나아가 손가락 세 개로 현 네 개를 눌러야 하는 난도 최상의 F 코드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야말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해도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호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타를 가방에서 꺼내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소문과는 다르게 절대적으로 미미한 실력을 갖춘 내가 기타를 꺼내 들면 파국으로 치닫는 일만 남을 거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난 결국 F코드의 거대한 장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기타를 아예 놓고 말았다. 기타는 이제 소복이 쌓인 먼지를 이불 삼아 몇 년째 같은 자리에서 같은 포즈로 잘 자고 있다. 아직도 내가 기타를 잘 치는 사람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단 한 번도 연주를 듣지 않고 서도 말이다. 코드 세 개만으로도 멋진 펑크를 연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그린데이의 보컬 빌리는 거짓말쟁이였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 기고한 글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오래전 기억을 가지고 나는 다시 이곳을 찾았다. 지금의 낙원악기상가는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1층 필로티의 공간은 작은 소리에도 마구 울리는 것 외에는 시간도 공기도 멈춰 고요했다. 유유히 흐르는 건 자동차 밖에 없었다. 마치 소설 1Q84에서 주인공 아오마메가 도로 가의 비상 계단으로 들어가 다른 세계로 빠져드는 것 마냥 이곳은 다른 세상에 들어가기 전에 지나가야 하는 관문처럼 느껴졌다. 거기다가 국밥집 골목에서 수육을 삶아 건물 아래로 흘러들어오는 수증기는 오묘한 분위기에 한 몫 더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은 나를 다시 20대 시절로 되돌려 놓았다.



낙원상가 1층 필로티 공간 / Illustration © 김홍철






“내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기타를 어깨에 둘러메고 이곳에 오면 모든 게 완벽했었던 그때의 나는 고소한 기름과 고등어 굽는 냄새를 따라 들어가기만 하면 잔뜩 취한 채로 나왔었던 낙원상가 근처 뒷골목이 나중에서야 피맛골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골목길 이름이 피 맛을 볼 때까지 취하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섬뜩한 매력에 흠뻑 빠져 친구와 술 약속을 잡기만 하면 언제나 뭐에 홀린 듯 그곳으로 갔다. 그러다가 지독한 방향치인 내가 술에 취해 복잡한 골목이 많은 이곳에서 길을 잃을 때면 언제나 나는 먼저 낙원상가를 찾았다. 필로티로 들어와 사거리 가운데에 서 있으면 분명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동쪽은 익선동의 오래된 한옥마을이 있었고, 북쪽과 남쪽은 넓은 대로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1층 사거리 한복판에 서서 무조건 서쪽으로만 가면 되었다. 그곳은 맛있는 술이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렇게 여기에서 내 길을 찾고는 했다. 내 젊은 시절에 악기로 유인해 자칫 지루할 수 있었던 내 삶의 방향을 알려주었던 도로 위의 낙원상가는 종종 길을 잃어버리던 나를 취할 수 있는 곳으로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내게 있어 낙원상가는 여러 의미로 내 삶의 이정표였다.


낙원상가아파트 구조 / Illustration © 김홍철


좌: 낙원상가 종로 방향 파사드, 우: 낙원상가 익선동 방향 파사드 / © 김홍철
좌: 낙원상가 안국동 방향 파사드, 우: 낙원상가 인사동 방향 파사드 / © 김홍철



“그런데, 왜 건축물이 도로 위에 지어졌을까?“


자유로운 영혼들의 음악 성지가 된 낙원상가아파트가 지어지기 전에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공습으로 화재가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땅을 비워둔 소개 공지였다가 해방이 되고 나서 판자촌과 일명 '종삼'으로 불리는 사창가로 채워졌었다. 이곳에 재래식이었던 낙원시장이 들어섰지만, 이내 곧 정권이 바뀌고 김현옥 서울시장이 당선되자 그는 곧바로 맘모스 수도 건설을 위한 [수도 건설 5개년 계획]으로 서울시 근대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일명 '나비 작전'을 펼쳐 사창가 일대를 먼저 정비하고, 시비와 민간 자본 합작으로 4층 규모의 현대식 낙원상가아파트를 짓기로 계획했다. 시장으로 기능을 했던 이 건축물은 주 고객층이 주부였기에 허리우드 극장의 전신인 주부극장도 포함되었다.


철거되는 낙원시장 /©한국정책방송원, 공유마당



낙원상가아파트 건축은 건축가와 서울시의 멋진 콜라보로 서울을 빛낼 수 있는 멋진 건축을 만들어보자는 야심 찬 계획은 분명 아니었다. 서울시는 한국전쟁 이후 점점 늘어가는 교통량에 맞게 삼일대로를 만들어 종로와 안국동을 연결해야 했다. 하지만, 대지를 소유한 사람에게 나눠줄 보상금이 모자랐기 때문에 도로 위로 높은 건물을 지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상대지를 나누어주고, 민간 건설사에 낙원상가아파트 소유권을 분배해 그 비용을 충당했다. 이런 이유로 도로 위에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도로는 국가 소유가 되었고, 낙원상가아파트는 민간 소유가 되었다. 1967년 10월 26일에 낙원상가아파트는 착공되었고, 1968년 7월 15일 지하에서 시장을 먼저 개점해 운영을 시작하다가 1970년 12월 12일에 정식으로 개관을 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낙원상가(우측: 파고다 아케이드) /©『착실한 전진: 1974-1978(2)』(2017), 18쪽



“낙원상가는 원래 악기상가가 아니었다”


이곳은 원래 한옥 밀집 지역으로 양반들이 자주 가던 기생집이 많았던 곳이었기도 했고, 1900년도 초에 황실 군악대가 탑골공원에서 종종 연주회를 가졌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이곳은 음악이 연주되는 장소로 유명해졌다. 지역성은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낙원상가가 지어지면서 주변에는 디스코텍과 나이트클럽 그리고 카바레 등의 유흥점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일하는 악사와 밴드가 연주할 악기를 판매하는 상가도 주변에 하나둘씩 생겨났다. 서울시에서 경관정비사업으로 탑골공원 옆으로 늘어서 있던 파고다 아케이드를 허물자 그곳에서 영업을 하던 악기상들이 모두 낙원상가로 들어갔다. 이후로 악사들은 악기를 구매하고,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매일같이 낙원상가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낙원상가아파트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낙원악기상가가 되었다.





“어우러져 사는 공유의 건축, 낙원상가“


오래전에는 불법 건축물로 철거 위기를 겪었고, 최근에는 도시 정비, 도시 재생이라는 명목으로 매번 철거 위기를 겪은 낙원상가아파트는 대충 지어진 줄로만 알았더니 보기와는 다르게 건축 안전 점검에서 너무나 튼튼하게 지어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던 건지 2013년 서울시는 끈질기게 버텨온 낙원상가를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건축물로 인정해 미래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서울시 한복판에 남북으로 뻗은 대로 위를 가로질러 독특한 형태로 지어진 낙원상가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 건축물은 도로로 나누어진 지역을 하나로 묶어 주변 상인들과 삶을 ’공유‘하고 다시 ’분배‘하는 공생의 건축물로 굳게 자리하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의도적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이곳의 삶을 그대로 투영해 지어졌고,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진화되어 왔기에 난 오히려 이 건축물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낙원상가 옆 국밥 골목 / Illustration © 김홍철


그래서 난 낙원상가를 참 좋아한다. 건축이 끝이 날 무렵 이름 모를 미장공이 아파트 중정 벽에 팡파르를 부는 천사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낙원의 모습을 새겨 넣었던 것처럼 지금 이곳은 그의 바람대로 언제나 음악소리가 들리고, 아파트 주민과 주변 상인들 모두가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곳이 되었다.


오래전 기타를 산 매장에는 이제 머리를 흔들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멋있게 넘어가던 로커 형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조무래기처럼 보이기 싫어 조금 가격이 있는 기타를 받아 들고서는 너바나의 '스멜스 라익 틴 스피릿'의 전주를 쳐대며 소리가 참 좋다고 소심하게 허세를 부리던 내 어린 시절의 조각이 여전히 묻어있었다. 다른 기타를 보여 달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현금 뭉치를 꺼내 한 푼 깎지도 못했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열심히 돈을 모아 드디어 내 기타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품을 정도로 행복했으니 말이다. 악기를 받아 들고 무척이나 행복했었던 이곳은 스무 살의 나에게 있어서 분명 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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