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의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다
진 태원 시절, 무릉 출신의 한 어부가 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복숭아꽃향기가 났다. 어부는 배에서 내려 향기를 따라갔더니 복숭아나무숲속 끝에 동굴이 있었다. 동굴 끝에서 빛이 새어 나와 어부는 호기심에 걸어 들어가 보니 이곳에 없을 것만 같던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어부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진나라 시절에 난을 피해 이곳에 숨어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어부는 그들에게 며칠 동안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받으면서 바깥세상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을 바깥사람들에게는 이곳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집으로 돌아온 어부는 다시 이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부는 마을을 그리워만 하다가 얼마 가지 않아 결국 병으로 죽고 말았다.
-도연명의 도화원기
가끔 남산 길을 지나가다 도로 아래에 교회 하나를 두고 군락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이는 저기는 어떤 곳일까 항상 궁금했다. 매번 그냥 지나치다가 그날따라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지 나는 교회를 향해 핸들을 돌렸다. 그곳은 여느 마을과 다르지 않게 오래된 동네려니 생각했다. 그러다가 과일 가게 사이에 작은 골목으로 무언가 여러 색으로 빛이 나는 상점이 보여 들어갔더니 바깥과 전혀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과거의 삶이 가득한 곳에 현재의 삶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보석을 숨겨둔 오래된 상자 같았다. 해방촌이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 기고한 글입니다.
TV에서나 이름만 들어봤던 해방촌에 나도 모르게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려 숨어있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만 같았다. 이곳은 해방촌의 중심인 신흥 시장이었다. 신흥 시장은 크지 않았지만 매력적이었다. 조금 걷다가 제자리를 찾을 만큼 작았던 골목이었지만,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없는 모습의 음식점들이 모여 있었다. 만일 내가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난 분명히 도화원기의 어부처럼 낯선 마을의 매력에 홀려 술과 음식을 한참 대접받은 뒤에 기억이 끊겨 다시는 이곳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방촌은 도화원기에 나오는 마을 사람들처럼 전쟁을 피해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삶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지
1962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한 일간지에는 전쟁을 피해 북에서 내려와 해방촌에 정착한 사람들의 말이 기록되었다. 종전 이후 38선이 그어져 다시는 고향을 찾지 못하는 해방촌 사람들의 말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5.10 선거 전에는 그래도 왔다 갔다 하기에 그리 힘들지 않았소. 서울에서 학교 다니겠다고 무진 애를 쓰며 굶기를 밥 먹듯 하다가 집에 가서 밥이나 실컷 먹어보고 싶어 모두 동댕이치고 삼팔 선을 넘어 고향으로 달려갔다가 한 달도 못되어 숨이 막혀 다시 (남쪽으로) 넘어왔소." "내 고향은 함경도인데, 한 번은 전곡 한탄강 철교에서 소련 경비병에게 내가 애지중지 아끼던 바이올린으로 그들의 민요인 [스텐카 라진]을 들려주고 간신히 넘어올 수 있었어요." "아무튼 나는 이곳에서 8.15 이전과 금을 긋고 살아가는 버릇을 익혔죠."
이렇게 고향을 그리며 악착같이 살아온 그들의 해방촌은 변화하고 있다.
해방촌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광복을 맞던 날, 하얀 도화지가 되어버린 이 땅 위에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두 이념은 섞이지 못하고 38선으로 남북이 갈렸다. 이때 해외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는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에 귀국했고, 남쪽과 북쪽에 각자 고향을 둔 사람들은 공부와 일을 하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산업화된 서울로 너 나 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북에서는 공산 정권에 불만을 품었던 지식인들과 토지개혁으로 재산을 강제로 몰수당한 유지들이 휴짓조각이 된 집문서를 들고 모두 남쪽으로 내려왔고,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안북도 선천에서 공산정권의 종교 탄압을 참지 못했던 기독교인들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와 일본군 기지가 있던 용산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곳에 미군 기지가 들어오면서, 그들은 잡초가 무성하고 나무가 우거진 남산 아래 일제가 전사자를 참배하려고 지었던 경성 호국 신사 터 주변에 다시 둥지를 트고 고향으로 올라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선천 군민회를 조직해 미군이 먹고 버린 레이션 박스를 이어 붙여 판잣집 마을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스스로를 삼팔따라지라고 불렀다. 왕년에 자신이 북에 있을 때 정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은 몇 년 간 매우 혼란스럽기는 했어도 1948년 5월 10일에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8월 15일에 정부를 수립하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평화로웠던 새벽에 공습경보가 울렸다. 대한민국 땅에서 두 이념이 크게 부딪히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 곳을 찾아야만 했다.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전쟁 이전에는 남북 어디든 오갈 수 있었지만, 전쟁으로 나라의 허리가 잘린 뒤로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섬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해방촌으로 모두 모여들었다.
해방촌에서 내가 최고 부자다. 그런 내가 굶는다.
해방촌 어느 누구보고 세금을 내라 해보라.
이곳에는 이봉철 동장 기적비가 있다. 지역에서 명망이 있거나 희생을 한 인물 공적비는 봤어도 마을 동장을 기리는 비석은 처음 보았다. 비석의 주인공인 털보 동장 이봉철 씨는 해방촌 초기에 6년 10개월을 동장으로 지낸 인물이다. 그는 평안남도 평양부 신영현 출신으로 만주에서 거주하다가 광복이 된 후에 이곳으로 정착해 지역 기반 시설을 구축해가며 해방촌을 꾸려나갔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하루 먹고살기에도 힘들었던 해방촌에 세금을 징수하러 온 사람을 되돌려 보내기도 하면서 살길이 막막했던 이곳 사람들을 보듬고 돌보았다. 세무서장과 연석회의가 열렸던 자리에서 그는 "해방촌에서 내가 최고 부자다. 그런 내가 굶는다. 해방촌 어느 누구보고 세금을 내라 해보라."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비석을 세웠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런지 아직 이 동네 정서에는 굉장히 끈끈한 정이 있다.
어찌 됐든 살아가야 했다
종전이 되고 나서 해방촌에서는 먹고 살 문제가 가장 컸기에 마을 전체가 담배 말이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나라의 담배 생산을 돕는 활동이 아닌 일명 암담배라고 해서 가짜 담배를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곳이 제2의 전매청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정부에서 담배 말이를 불법 사업이라고 제재를 가하자 해방촌의 주력사업은 편물업으로 바뀌었다. 마을의 절반 이상이 스웨터, 털장갑 그리고 청바지 할 것 없이 봉제품을 만들다 보니 국내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동네가 되었다. 그만큼 그들은 절실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오죽했으면 이곳 출신 사람들은 모두 악착같은 일벌레인 데다가, 돈 쓸 줄 모르는 구두쇠라고 불렸을까.
돈을 벌어 다른 지역으로 나간 사람도 있고, 나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이곳에 머문 사람도 있다. 시간이 흘러 1990년대에 미군 기지의 영향으로 이주노동자는 이태원으로 모여들었고, 경리단 길이 만들어지면서 많은 외국인이 해방촌으로 들어와 지금의 독특한 분위기가 생겨났다. 서울의 상징인 남산 타워 아래 작은 골목 사이사이 모세 혈관처럼 끈끈이 엮여 있던 가족과 같은 공동체로 어렵게 버텨왔던 그들은 이방인의 자세로 이방인의 마음을 알아채고 받아들였다. 해방촌을 시작으로 이태원 그리고 우사단길까지 새로운 주거 형태와 문화를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는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다리로 가죽공과 보석상의 터전이었다. 삶의 방식이 다리에 그대로 드러나 반듯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냄새나고 보잘것없었던 건축물이 지금은 피렌체의 명물이 되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해방촌 건축물 역시 베키오 다리처럼 울퉁불퉁한 형태로 낮게 지어져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방촌이 비록 전쟁의 비극이 만들어낸 마을이긴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삶을 담은 도시 재생으로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해방촌이 정말 서울의 무릉도원이 되길 바라는 맘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