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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철 Jul 27. 2020

가우디 건축으로 보는 신화이야기

가우디와 구엘의 신화사랑


가우디의 구엘별장 챕터 / 건축의 탄생

가우디는 스페인 서쪽 카탈루냐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폐병과 류머티즘을 가지고 있는 병약한 아이였다. 가우디는 오래 걷기가 힘들어 당나귀를 타고 학교에 등교했고, 그러지 못할 경우엔 그의 형이 가우디를 업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래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언제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꽃과 나무와 새 그리고 곤충이라는 좋은 자연 친구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솥뚜껑을 만드는 무쇠 장인이었기에 쇠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법을 아버지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랐다. 그렇게 무리 없이 잘 자라오던 가우디는 22살이 되던 해에 건축학교를 다니기 위해 자신의 형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이사를 했다. 가우디는 타지에서 공부하려면 돈이 필요했기에 아버지에게 배운 기술로 여러 작업장에서 일하며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자신이 지은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가우디는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혼자 지내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는 그만의 예술적 성향이 확고했다. 그러다보니 자신만의 고집이 있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학교에 다니면서 설계를 하면서 교수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문제를 일으키기다가 결국 졸업하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천재성을 알아본 한 교수가 가우디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고, 결국 가우디는 간신히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워낙 가우디가 독특한 고집을 가지고 자신만의 건축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교수가 졸업식에서 가우디에게 졸업장을 내어주면서 이친구가 천재인지 바보인지 모르겠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가우디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에우세비 구엘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벽돌사업으로 성공한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대부호였다. 구엘은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화려한 코메야 장갑상점 진열대가 눈에 들어와 수소문 끝에 가우디를 찾아냈다. 이렇게 가우디와 구엘이 만난 이후로 둘은 서로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필수불가결한 관계 그 이상이 되었다. 구엘은 가우디가 만든 건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가우디는 지원을 받아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의 모습과 같다. 메디치가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와 같은 당대 매우 훌륭했던 예술가들을 모아 자신의 권력을 위해 그들과 협력했던 것처럼 구엘 역시 가우디를 선택해 카탈루냐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키려고 했다. 

안토니 가우디와 에우세비 구엘 / 출처 : wikipedia





구엘 자신의 건축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가장 멋있게 만들어야만 했다. 구엘은 카탈루냐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자신은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난 신화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신화를 자신의 건축에 입혀지길 원했다.


헤라클레스로부터 황금열매를 지켜라 : 구엘별장 (Los Pavelloness de la Finca Guell, 1884~1887)


구엘별장은 구엘이 가우디에게 처음 맡긴 별장 프로젝트이다. 구엘은 가우디의 실력을 검증해보고 싶었었는지 먼저 바르셀로나 도심지가 아닌 외곽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가우디에게 건물 개보수 목적으로 의뢰했다. 건축 범위는 문지기의 집과 마굿간이 붙어있는 담벼락 그리고, 정원과 별장이었다. 구엘은 신화에 나오는 영웅담을 좋아했다. 영웅에 빗대어 자신의 위상을 건축에 표현하길 원했다. 그래서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의 건물을 보고 움츠러들 수 있을 만한 위용을 갖추길 원했다. 그래서 가우디에게 제안한 신화는 헤라클레스로부터 황금열매를 지키는 헤스페리데스 언덕의 세 님프와 머리 100개가 달린 용 라돈을 구엘별장에 표현하길 부탁했다.


황금열매를 돌보는 헤스페리데스의 세 님프 / 출처 : wikipedia


이 이야기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중 하나이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언제나 잘못된 일의 모든 원흉은 난봉꾼 제우스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힘센 왕자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자신의 아내인 헤라가 아닌 다른 여자와 외도를 해서 낳은 혼외 자식이었다. 제우스가 헤라클레스를 신의 왕으로 세울 계획을 들은 헤라는 자신이 품고 있던 에우리스테우스를 헤라클레스보다 2개월 일찍 태어나게 해서 헤라클레스가 왕이 되는 걸 겨우 막았다. 하지만, 헤라는 힘이면 힘, 지혜면 지혜 모든 것이 자기 아들보다 출중했던 헤라클레스에게 엄청난 질투심을 느꼈다. 그래서 헤라는 헤라클레스가 자는 동안 그에게 광기를 불어넣어 그의 자식을 직접 활로 쏴 죽이게 했다. 헤라클레스는 자식을 죽인 죄책감에 헤라의 아들 에우리스테우스의 노예가 되어 열두 가지 과업을 이행해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제우스가 가장 아끼는 헤스페리데스 언덕의 황금열매를 훔쳐 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이미 들은 제우스는 세 님프와 머리 100개가 달린 용 라돈에게 반드시 헤라클레스로부터 황금열매를 지키라고 지시했다. 제우스의 방해로 황금열매를 구하기 어려웠던 헤라클레스는 세 님프의 아버지가 아틀라스라는 걸 이용해 그의 지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딸들이 지키고 있는 황금열매를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결국 아틀라스의 간곡한 부탁에 세 님프는 황금열매를 자신의 아버지인 헤라클레스에게 황금열매를 빼앗긴다. 황금열매를 지키지 못한 벌로, 세 님프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각각 포플러 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가 되어버렸고, 라돈은 하늘로 올라가 뱀자리가 되었다.


헤라클레스가 아틀라스의 지구를 들어주는 장면 / 출처 : getarchive.net



가우디는 구엘 별장에 이 이야기를 그대로 담아 아가리를 벌린 라돈의 형상으로 철제대문을 만들었고, 담벼락에 서 있는 굴뚝을 황금열매나무 형상으로 만들었다. 구엘별장의 담벼락을 살펴보면 네모형태의 반복된 문양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무데하르 양식으로 이슬람 양식과 기독교 양식이 섞인 스페인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양식이다. 이런 양식이 생겨난 데는 기독교 문화를 가진 스페인이 오랫동안 이슬람국가의 지배를 받아왔던 배경이 있다. 가우디의 작품 카사 비센스와 엘 카프리초에서도 무데하르 양식을 볼 수 있다.

구엘별장의 파빌리온 / 건축의 탄생에서
가우디의 엘 카프리초와 카사 비센스 / 건축의 탄생에서



그렇게 완성된 구엘별장은 구엘이 보았을 때 너무나 완벽했다. 구엘은 그 때 가우디와 평생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구엘의 영원한 권력을 상징한 불사의 건축 : 구엘궁전 

1888년 스페인에서 첫 만국 박람회가 열릴 계획이었다. 만국 박람회에는 각 지역의 귀빈들은 물론이고, 국왕까지 초대하는 대규모 행사였기에 구엘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가우디에게 구엘 자신을 이 지역의 최고 명망가임을 과시할 수 있는 자신만의 집을 건축해달라고 요청한다. 돈 걱정은 전혀 하지 말라는 조건과 함께 말이다. 구엘별장은 무시무시한 용을 문 앞에 걸어놔 지나가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벌벌 떨게 만들었다면, 구엘궁전은 영원의 상징인 불사조를 대문 앞에 걸어 구엘의 막강한 권력을 과시할 계획이었다. 가우디는 일단 건축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건축실험을 구엘궁전에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만든 건축실험이 나중에 걸작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많이 적용될 정도였으니 엄청난 실험을 한 게 틀림이 없다. 구엘 궁전의 입구는 마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두 개의 커다란 대문을 만들어 에우세비 구엘의 이니셜인 'E'와 'G'를 새겨넣었고,  대문과 대문 사이에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국기문양과 불사조를 금속으로 만들어 걸어놔 그냥 봐도 대단한 권력가의 집임을 알 수 있게 했다. 


구엘궁전의 대문 / 건축의 탄생에서


집 가운데에는 2개층 높이의 중정을 만들어 모든 방이 중정을 감싸도록 만들었다. 중정의 천장은 작은 구멍 84개를 내어 밤하늘의 별이 쏟아질 것만 같이 만들었다. 옥상은 타일을 잘게 깨부수어서 모자이크형식의 굴뚝을 만들었는데, 이때가 가우디의 전매특허인 트랜카디스 기법이 시작되었다.

(좌)구엘궁전의 내부 천장/ 출처 : barcelonahacks.com (우)구엘궁전의 옥상 굴뚝 / 출처 : flickr



 가우디는 건축실험하는 것이 신이 났었나 보다. 짓고 무너뜨리길 계속 반복하자 그걸 지켜보고 있던 구엘의 관리인이 가우디가 건축비용을 낭비하고 있다고 구엘에게 이르자, 구엘이 크게 화를 내면서 가우디에게 돈을 더 쓰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구엘궁전은 완성되었고, 1888년 바르셀로나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국왕을 비롯해 각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구엘궁전을 찾아와 매우 감동하고 돌아가 구엘의 입지는 더욱 강해졌다. 그렇게 가우디는 승승장구하는 스페인 대표 건축가로 자리매김했다.


구엘궁전 / 출처 : wikimedia





기사 게오르기우스와 용의 한판 대결 : 카사 바트요 (Casa Batlló, 1904~1906)


구엘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여유가 생긴 가우디는 개인주택일을 시작했다. 가우디에게 구엘이 없는 틈을 타 여러 부호들이 가우디에게 접근했다. 당시 주택은 파사드(건물 입면)을 두고 서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경쟁을 하던 시기라 가우디는 그야말로 부호들 사이에서 영입 1순위였다. 결국 가우디는 호세프 바트요라는 섬유업자의 집을 지어주게 되는데, 이 주택이 카사바트요(Casa Batlló)이다. 카사(casa)는 집이라는 의미이고, 바트요(Batlló)는 건축주 호셉 바트요 카사노바스(Josep Batlló i Casanovas)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 카사바트요는 바트요의 집이라는 뜻이다. 가우디는 용을 죽인 성 게오르기우스의 전설에서 착안해 집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하는 백마 탄 기사 이야기는 우리가 어릴 적 여느 동화책에서도 단골로 나왔었고, 각종 만화와 영화에서도 이 이야기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백마를 탄 기사는 이름이 있다. 라틴어로 게오르기우스(Georgius), 영어권에서는 조지(George)라고 부른다. 기사는 훗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순교하였다. 그래서 이름 앞에 성인을 뜻하는 성(세인트, Saint, St)이 붙어 성 게오르기우스라고 불리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오래 전, 게오르기우스라는 기사가 말을 타고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기사는 마을주민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마을주민은 끔찍한 용 한 마리가 사람과 짐승을 닥치는대로 잡아먹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용에게 바칠 양도 사람도 없어서 공주까지 바쳐질 위기에 처해있다고 주민들은 기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게오르기우스는 용을 찾아가 긴 창으로 용의 목을 깊숙이 찔러 상처를 입히고, 공주가 차고 있던 벨트로 용을 묶어 온 동네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이 나라의 왕은 공주와 결혼해달라고 부탁하자 기사는 거절하고, 이 마을의 종교를 기독교로 바꿔 달라고 말하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성 게오르기우스 그림 / 출처 : wikimedia



그 이야기로 가우디는 카사바트요를 지었다. 건물을 살펴보면, 지붕과 건물의 중상부를 반짝거리는 타일로 장식해 마치 한 마리의 용이 긴 창에 찔려 드러누운 모양으로 지붕을 뒤덮고 있다. 건물의 발코니는 마치 용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머리뼈 모양으로 만들어져 건물을 보면 한 편의 이야기가 장대하게 펼쳐진 것 같다. 그래서 카사바트요의 별명이 뼈의 집, 혹은 해골집이라고 한다. 


카사바트요 / 건축의 탄생에서



거기다가 건물 중앙에 있는 깊은 중정은 바다와 같이 표현해서 푸른색 타일로 마감했다. 상부를 하부보다 더 진한 푸른색으로 마감한 이유는 상부는 빛을 받기 때문에 아래에서 봤을 때 위와 아래의 색이 모두 같은 푸른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래로 갈수록 빛이 닿질 않아 어두워지는 탓에 아래창이 위창보다 크게 만들어 내부에 빛을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했다. 내부 역시 계단의 난간을 용의 등뼈처럼 장식했고, 모든 집기와 가구도 역시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했다.

카사바트요의 중정 / 건축의 탄생에서



가우디가 이렇게 실험적인 건축을 한 이유는 모두 사그라다파밀리아때문이었다. 깨진타일을 이용한 트랜카디스기법, 기둥 하나없이 높은천장을 만들어 별처럼 구멍을 낸 구엘궁전, 수많은 추를 거꾸로 매달아 건축의 구조를 계산했던 콜로니아 구엘교회 제실 등 자신이 일일이 실험해서 만들어낸 건축기술을 모두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 쏟아 넣었다. 


가우디는 자연의 곡선으로 건축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건축을 더욱 가치있게 만든 것은 이야기이다. 필자가 건축의 탄생이라는 책을 쓰면서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의미있는 것은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모든 것은 살아있다.' 라고 머리말 첫부분에 썼었다.  건축에 이야기를 담는다는 건,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에 너무나 묘한 표정으로 여자가 눈을 내리깔고 살며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너무 아름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림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여자의 왼손에 들려있던 건 사람의 머리였다는 걸 이야기를 듣고 그제서야 알아버렸다. 그림의 제목은 클림트의 ‘유디트’였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러 예술가의 그림 소재가 되었던 것을 클림트가 자신만의 생각으로 재해석했던 것이다. 

클림트의 유디트 / 출처 : wikimedia


이야기는 예술을 아름다운 것, 그 이상으로 만든다. 이야기는 사람의 발길과 시선을 그것에 머물게 한다. 가우디의 건축이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 여러 세대를 거쳐 내려오는 구전동화가 그렇고, 전설이 그렇다. 이야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가우디의 건축은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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