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 만들어낸 다리, 베키오 다리
비가 잠시 내린 모양이었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잔뜩 구경하고 나오니 땅이 젖어있었다. 거리는 비에 젖은 돌과 풀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했다. 계획을 전혀 하지 않고 이탈리아에 온 탓이었다.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우피치 미술관을 모두 둘러보고 나니 딱히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야 할 방향을 정하려고 여기저기 고개를 연신 돌려보아도 내가 가야 할 길을 알 수는 없었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그 자리에서 지역별로 소분한 여행책과 관광센터에서 얻은 피렌체 지도를 가방에서 꺼내 커다랗게 펼쳤다. 내가 있는 주변에 무엇이 있나 지도 위로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마음에 끌릴 만한 모양과 글자를 눈으로 좇았다. 마침 내가 서 있는 곳 근처 강 건너에 아주 큰 궁전이 하나 있었다. 피티 궁전이라는 곳이었다. 피렌체에서 가장 큰 궁전이라고 쓰여있었다. 갈 곳이 정해졌다. 배가 고파져 근처에서 피자 몇 조각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곧장 피티 궁전으로 향했다. 조금 걷다 보니 강변에 수도원에서나 볼 수 있는 회랑이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점점 북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다리를 건너기 전이었다. 피티 궁전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여있는 걸 보니 피티 궁전의 인기가 우피치 미술관만큼이나 대단하구나 싶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사진을 찍는 통에 나도 덩달아 카메라를 들었다. 강변 길가에 늘어서 있는 난간에 연인 친구 할 것 없이 모두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뷰파인더를 보는 순간, 사람들이 등지고 있는 쪽에 범상치 않은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독특한 외형이었다. 창이 불규칙적으로 많이 나있어서 다리에 붙어있는 상점들이 마치 바위 위에 기생하고 있는 따개비처럼 보였다. 다리는 강을 가로막아 서있는 커다란 선박 같아 보이기도 했고, 수상가옥 같아 보이기도 했다. 색깔마저 알록달록해서 해서 여기저기 많이 덧댄 천 쪼가리 같아 보이기도 했다. 다리를 본 순간, 이미 나는 피티 궁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 다리는 내가 여태껏 보아 온 다리 중에 가장 매력적인 다리였으니까.
(* 현대엔지니어링에 기고한 글입니다. )
사람들은 이 다리를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라고 불렀다. 베키오는 오래된, 옛 이라는 뜻이다. 즉 오래된 다리이다. 베키오 다리의 역사는 기원전 59년 고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베키오 다리는 서울의 한강처럼 도시를 동서로 크게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에서 남북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형태도 단순된 나무다리에 불과했었다. 이후로 2천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몇 번의 큰 홍수로 파괴되고 재건된 지 다섯 번을 거친데다가 르네상스 시기를 온몸으로 관통했었기에 메디치가의 막강한 권력욕이 스며들어 현재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베키오 다리는 르네상스가 시작될 때 이미 다리가 완공되었다. 그래서 이탈리아를 휩쓸고 간 르네상스 양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반(反) 르네상스 건축이라고 불렀다. 베키오 다리는 2개의 교각과 3개의 아치 형태의 돌로 만든 다리로, 1345년에 조토의 제자였던 화가이자 건축가인 타 데오 가디가 설계했다. 그는 베키오 다리를 하나의 작은 도시로 만들 생각이었다. 로마는 길이 있고, 광장이 있다. 타 데오 가디는 베키오 다리에 도시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 그는 질서 있는 직선을 원했다. 그래서 다리 위에 총 46개의 상점으로 이루어진 4개의 기다란 직사각형 블록을 사방에 배치하고, 가운데 광장을 만들었다. 광장은 지붕을 덮지 않고 하늘을 열어놓았다.
다리 위에서도 상업적인 요건을 모두 충족시킨 히나의 작은 도시를 이룬 셈이다. 그렇게 베키오 다리는 1차적으로 완성되었다. 이렇게 상점이 즐비한 베키오 다리는 16세기에 만들어진 베네치아 리알토 다리의 전신이 되기도 했다.
14세기 중반에 다리가 완성되자 그곳에는 정육점과 가죽 상점 그리고 대장간 등의 상점이 잔뜩 들어왔다. 정부에서는 다리의 외관상 상점의 확장과 개조를 하는 것을 절대 금지했다. 그러나 15세기 중반, 수입이 줄어든 피렌체 정부는 상점의 확장을 어느 정도 허가해주면서 정육점 길드에게 상점 모두를 내어주나 싶더니, 돈이 더욱 궁했던 피렌체 정부는 이윽고 상점을 민영화하고, 건축규제를 모두 풀어버린다. 이때다 싶던 베키오 다리의 상인들은 너나할 것없이 상점을 확장하고 개조한다. 상점을 옆으로 확장할 수는 없었기에 건물을 다리 바깥으로 최대한 공간을 밀어내고, 스포르티(sporti)라는 버팀목으로 상가를 받쳤다. 그렇게 베키오 다리의 형태는 계속 진화했다.
르네상스 시기의 끝자락인 16세기 중반이 되자 메디치가의 최고 권력자 코지모 1세는 권력욕이 점점 과해졌다. 그는 시청의 역할을 하고 있는 베키오 궁전에서 사무기능을 분배할 궁전을 따로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그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의 전신, 우피치 궁전이다. 코지모 1세는 우피치 궁전 건축 프로젝트를 미켈란젤로의 애제자였던 조르조 바사리에게 맡기게 된다. 여기서 코지모 1세의 야망은 끝이 난 게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과 경쟁상대였던 피티 가문의 피티 궁전을 자신의 아내를 위해 매입하면서 피렌체 강남과 강북 전체에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다.
피티 궁전까지 사들인 코지모 1세는 모든 구역을 자유롭게 지나다니려면 베키오 다리를 반드시 지나야 만 했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코지모 1세는 베키오 궁에서 시작해 우피치 궁을 지나 베키오 다리를 건너 피티 궁전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자신만의 공중 통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조르조 바사리에게 다시 의뢰한다. 바티칸의 교황처럼 자신만의 비상통로를 가지길 원했다. 그래서 베키오 다리를 지나가기 전 우피치 궁전의 외부 회랑을 본떠 바사리 회랑을 만들고, 베키오 다리 상단에 그만의 공중 통로를 만들었다.
하지만, 통로 아래에서 올라오는 상점의 악취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결국 코시모는 모든 정육점을 퇴거시키고, 그 자리에 금세공인과 보석상으로 채워 넣었다. 그는 이 방법이 대외적인 이미지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영원한 권력은 없는 법.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시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자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에 결국 등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코지모 1세를 시작으로 메디치 가문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다가 결국 코지모 3세 때가 되어 메디치 가문은 완전히 몰락한다.
그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 20세기 중반에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전쟁 초반에 독일은 이탈리아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위해 베키오 다리에 있는 바사리 통로 서쪽 창을 크게 만들어 아르노 강의 전망을 보여주었고, 히틀러는 그곳에서 크게 감동받았다. 하지만 전세가 바뀌자 독일은 배신을 눈치채고 이탈리아를 침공하게 되는데, 히틀러는 베키오 다리를 무척이나 좋아했기에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베키오 다리에 얽힌 이야기는 그뿐만이 아니다. 사랑도 있다. 대문호 단테가 평생 짝사랑했던 베아트리체를 베키오 다리에서 9년 만에 우연히 만난 이후로 그녀를 잊지 못해 인류 최고의 명작 '신곡'을 쓴 건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지만, 현재 베키오 다리 형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기에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듬뿍 담긴 다리를 아무 생각 없이 건너버렸다. 그저 신기하게 생겼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 곱씹었다. '왜 그렇게 생겨 먹었을까?'라고. 피티궁전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베키오 다리에 오르면서 뭔가 알았다는 듯 내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갈 때는 내가 전혀 몰랐던 다리였지만, 올 때는 내게 익숙해진 다리가 되어 있었다. 계획 없는 여행은 예상치 못한 사건을 매번 새롭게 마주치게 된다. 재미있다. 처음 간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설 보이는 새로운 장면은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그래서 일부러 나는 여행에서 계획없이 걷는다. 베키오 다리를 공부하고 갔더라면, 마냥 새로웠을까? 누군가 써놓은 정보에 잔뜩 가려져 전혀 새로운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멋진 것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할 때 갑자기 다가온다. 이미 멋진 것이라고 누군가가 규정해놓은 것을 보았을 때, 과연 대상에게 호기심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이 든다. 베키오 다리는 내게 있어서만큼은 새로움이었고, 호기심 그 자체였다. 내가 돌아오면서 웃은 이유는 인간의 습성이 그대로 배여있는 베키오 다리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베키오 다리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