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그로피우스의 공식적인 첫 설계작
자신의 동료와 함께 호기롭게 회사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사무실을 차렸던 한 남자는 일이 없어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 로에도 거쳐간 건축계의 거장 페터 베렌스의 건축 사무실에서 나와 독립하면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그는 더는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일을 수주하려고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거나, 건축이 필요한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오는데, 반갑게도 공장설계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의뢰인은 카를 벤샤이트라는 인물로, 그는 함께 공장을 경영하던 사람과 마음이 맞지않아 회사를 분리했다. 그는 기존에 있던 공장 맞은 편에 자신의 공장을 지어서 보란 듯이 과시하고 싶어했다. 원래는 공장설계를 다른 건축가에게 맡겼지만, 의뢰인이 공장설계를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결국 새로 개설한 건축사무소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의뢰인은 경력이 없는 남자 실력을 마냥 믿을 수는 없었기에 먼저 설계안을 들고 오라고 요청한다. 남자는 반사적으로 설계비는 받지 않겠다고 의뢰인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장이 현대건축에서 크게 획을 그었던 바우하우스의 전신 파구스 공장(Faguswerk, 알펠트, 독일, 1911~1914)이었고, 건축가는 바로 바우하우스의 수장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였다. 그로피우스는 자신이 독립해서 짓는 첫 건축 의뢰인지라 여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밤낮없이 신나게 설계에 몰두한다.
마침내 제출일이 되자 설계도를 의뢰인에게 가져가 설명한다. 설계도에는 깔끔하고 반듯한 모양의 건축이 그려져 있었다. 고전건축에서 흔히 보이던 기둥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강철과 콘크리트 골조만으로 건물을 지탱한 이유였다. 거기다가 건축은 유리만으로 세 개 층과 모든 벽면을 이어 덮은 커튼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구스 공장 설계를 본 건축주는 주변에 널려있는 고전양식의 공장건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매우 흡족해 했다. 즉시 의뢰인은 그로피우스에게 일을 맡겼고, 완공된 건축은 건축계에서 큰 이슈가 되면서 성공을 이뤄냈다. 이후 그로피우스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건축계에서 인정받는 건축가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은 산업혁명으로 먼저 선진화된 영국을 따라잡으려고 건축가, 공업가, 공예가 등 모든 예술인을 집결해 독일공작연맹을 만들었다. 거기서 그로피우스는 파구스 공장과 거의 흡사한 형태로 '독일공작연맹 전시를 위한 공장 건축물'을 짓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파구스 공장의 파급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잘 나갈 것만 알았던 그의 앞길은 세계대전으로 군대에 징집되면서 끝이 날 뻔 했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멈추지않고, 많은 예술가들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꾸준히 교류를 했다.
마침내 전쟁이 끝이 나자 그로피우스는 예술가들을 모아 '예술노동평의회'를 결성하고 '건축선언'을 발표하면서 마음 깊숙히 응집해 있던 예술적인 열망을 한꺼번에 터뜨린다. 이후 그는 바우하우스를 만들어 일류 마이스터(Meister)들과 함께 전 세계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한 때는 아무 일이 없어 아등바등 살아가야만 했던 발터 그로피우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을 확실히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파구스공장을 시작으로 바우하우스까지, 건축으로 시작해 예술로 끝을 맺은 그는 세계 예술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가 없는 현대 예술은 없다.
*중부매일에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