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홍철 Jun 17. 2020

루이스 칸의 빛으로 빚은 건축

소크 생물학 연구소와 영국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제 막 시작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다니던 회사는 야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일찍 집으로 향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은 시끄럽게 북적였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하철을 탄지 몇 정거장을 지나쳤을까. 지하철은 동호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순간 시끄러웠던 지하철 안은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시선은 창 밖을 향해 있었다. 한강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노을은 차량 안에도 구석구석 붉은빛이 스며 들어와 벽과 바닥은 물론이고, 사람들 모두를 온통 붉게 물들였다. 한강 위로 소복이 떨어지는 붉은 이불은 무거운 업무에 지친 나와 차량 안에 있는 사람 모두를 덮었다. 지하철은 다시 땅 아래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고, 차량 안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 기적 같은 광경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광경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한강의 노을 / 출처 : pixabay


주말은 온전히 집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다. 그래야 다음 주말을 살 수 있으니까. 삶은 너무나 퍽퍽했고, 머리는 점점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사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이 들어 하루는 간신히 이불을 걷어내고, 미술관을 갈 생각을 했다. 무슨 전시를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냥 무작정 집을 나와 미술관으로 향했다. 마침 전시의 주제는 빛의 화가 모네였다. 사실 유명해서 이름만 들었지 인상파니 야수파니 하며 화가 뒤에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복잡하고 머리 아픈 지식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겐 그저 난해한 그림 조각일 뿐이었다. 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은 잘 들여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표를 끊고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풍경 그림들이 잔뜩 걸려있었다. 모두 흐릿하게 그려진 그림들 뿐이었다. 꿈속에서 봤다면 아마 그런 장면들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모퉁이를 돌았는데, 몇 년 전 지하철에서 느꼈던 감정이 다시 소환됐다. 지하철 창 밖을 한참 바라본 그 날처럼 그림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클로드 모네의 해돋이를 본 순간이었다. 그림은 바다 위에 붉은 태양이 만들어낸 다양한 색채가 세상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 아래 작은 배 위에서 노를 젓고 있는 사공 뒤로 아스라이 보이는 게 범선인지 항구에 삐죽하게 솟아난 나무막대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붉은빛은 지쳐있던 나를 포근히 덮어주었다.

모네의 해돋이 / 출처 : wikipedia


그래서 해돋이를 그린 화가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를 찾아본 기억이 난다. 그는 시간이 흐름으로 만들어지는 빛의 흔적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화가였다. 같은 장소에서 매분 매시간 다른 빛을 그린 모네는 다양한 공간을 그리는 것보다 다양한 빛을 그려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전통적인 기법을 거부하고 시간의 흐름으로 빛을 색과 질감으로 그려내는 작가였다. 클로드 모네는 해돋이를 시작으로 자신의 그림을 세상에 알렸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인상파라고 불렀다.  



1. 인상주의 건축, 소크생물학연구소

소크생물학연구소 / 건축의 탄생에서

20세기 중반,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라호이아 해안가에 모네의 해돋이와 같은 건축이 지어졌다. 이 건축물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해 노벨상을 받은 조나단 소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소크생물학연구소이다. 이 건축물은 남북으로 갈라진 커다란 콘크리트 매스 가운데 중정을 만들어 빛을 받아들였다. 중정으로 스며드는 빛은 공간을 매분 매시간 다르게 공간을 변화시킨다. 연구소 중정 가운데에서 바다를 바라볼 때, 모네의 해돋이가 생각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이 건축물은 공간을 비우고, 빛을 채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한 폭의 인상주의 그림과 같이 건축은 변화한다.

소크생물학연구소 중정에서 바라본 광경 / 출처 : www.salk.edu

소크생물학연구소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러했다. 당시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고 있던 소크는 연구가 진척이 없어 머리를 식힐 겸 여행을 떠났다. 소크는 이탈리아 여행 중, 어느 고성당에서 불현듯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덕분에 소크는 백신을 만들어냈고, 노벨상을 거머쥐는 영광을 누렸다. 그 일을 계기로 소크는 창의력은 성당과 같이 천장이 높은 공간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소크는 자신의 연구소를 짓기로 하고, 그는 당시 건축계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건축가 루이스 칸에게 건축을 의뢰했다. 소크는 칸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천장 높이를 3미터로 올려주세요. 천장이 높은 곳은 창의력도 높아지니까요. 전 이곳을 성 프란체스코의 수도원처럼 사색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합니다. 연구소는 감각적인 곳이 되어야 합니다. 피카소가 와도 감동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소크는 연구소가 과학과 인문학이 한데 어우러지는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건축물로 만들어지길 바랐다.

좌측 : 루이스 칸, 우측 : 조나단 소크 / 출처 : wikimedia


칸은 첫 설계안에서 연구동과 숙소동 그리고 미팅 하우스로 3개의 공간으로 분할하고, 연구동은 4개의 원통 모양의 타워로 설계했다. 이후 연구동은 4개의 박스형 건물을 남북으로 나열해있는 모양으로 수정했다. 그러다 보니 건물 사이 2개의 안뜰이 생겼다. 칸이 다시 생각하길 여러 동을 만들어 업무적으로 분리하기보다는 가운데 큰 중정을 만들어 모두가 한 곳에서 일하는 느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4개의 건물을 2개로 줄이고 그 가운데 큰 중정을 놓고, 포플러 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좌측부터 순서대로 1차, 2차, 3차 설계 수정 / 건축의 탄생에서

칸은 건물 안에서 연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것인지 소크와 많은 대화 끝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구실마다 창을 삼각 형태로 밖으로 내밀어 태평양을 조망할 수 있게 했다. 칸은 이 계획안을 들고 멕시코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을 찾아갔다. 바라간은 중정에 나무를 심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칸에게 조언을 한다. 비우는 것이 채우는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소크생물학연구소 설계과정 / 건축의 탄생에서


연구원들의 휴식을 위해 나무를 심어 중정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나무 한 그루 없이 비워놓는 것이 온전하게 빛으로 건물을 다 채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소크생물학연구소는 해안가 우뚝 서지 않고, 한 폭의 하얀 도화지가 되길 자처했다. 그렇게 매시간 빛을 받아들이면서, 언제나 다른 건축이 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소크생물학연구소는 그렇게 걸작이 되었다.


2. 루이스 칸의 건축 언어


루이스 칸은 예일대학교 미술관(Yale University Art Gallery. 뉴헤이븐, 미국, 1953)을 짓고 나서, 52살이 되어서야 뒤늦게 건축계에서 큰 두각을 보였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에서 에콜 드 보자르 양식을 배운 칸은 그곳에서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건축가 폴 크레 (Paul P. Cret, 1876~1945)교수를 만나게 된다. 칸은 폴 크레에게서 배운 건축의 본질은 훗날 그가 건축을 하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축 언어가 되었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what is wants to be), 어떻게 이루어졌는가(How it was done)" 건축을 하기 전에 언제나 벽돌에게 물었던 칸의 유명한 어록을 보면, 얼마나 본질에 대한 집착이 강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건축의 본질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원하는 바대로 건물의 형태는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이다. 건축의 본질은 사람의 필요와 욕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본질은 필요(need)와 욕구(desire)로 나누어지는데, 필요는 건축주의 바람을 말하고, 욕구는 창조적인 본능을 말한다. 그래서 필요(need)는 어떤 모양(shape)으로 이루어지고 거기서 끝이 난다. 하지만, 욕구(desire)는 깨달음(realization)을 얻고 형태의 본질(Form)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다시 질서(Order)와 룸(Room)으로 나누어진다. 질서는 물질들의 디테일을 말하는데, 여기서 주공간(Served Space)과 보조공간(Servant Space)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룸은 장소의 본질 혹은 형태의 특성을 말한다.

루이스 칸의 건축언어 / 건축의 탄생에서


칸은 룸(Room)을 건축의 가장 작은 기본적인 단위로 사용했다. 룸은 독립된 구조와 빛을 갖는 공간으로 건축의 시작이자 마음의 장소라고 칸은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빛과 공간 그리고 구조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건축의 가장 작은 단위를 칸은 룸이라고 말하고 있다. 룸은 두 가지 형태를 보인다. 하나는 유닛 단위의 룸으로, 유닛 하나하나를 쌓아가며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중심 공간의 룸으로 중심을 가지고 동심원 구조로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다. 룸에서도 언제나 빛은 중요했다.


룸의 조건과 형식 / 건축의 탄생에서


3. 책을 든 사람은 빛을 찾아간다. 영국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


칸이 룸으로 만든 대표적인 건축물은 영국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Phillips Exeter Academy Library, 엑서터 미국, 1965~1972)이다. 그는 먼저 건축을 하기에 앞서 도서관에 대한 본질을 파악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도서관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져야 그 본질을 충족할 수 있는지 연구했다. 도서관은 사서가 책을 배열하고, 선택된 페이지를 열어 독자를 유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은 책을 보관하는 용도로 써야 할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의 건물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책을 든 사람은 '빛'을 찾아가게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도서관의 설계는 빛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 외부와 내부 / 출처 : wikipedia, wikimedia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은 정방향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칸은 도서관을 소통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어떤 건물이든 출입구를 하나로 만들어 그곳에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일반적인데 비해,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은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평면의 네 모퉁이에 모두 출입구를 만들어 어디서든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 네 방향의 출입구 어디서든 들어오자마자 도서관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열린 공간을 만들어 여기는 도서관이라는 것을 한눈에 직감할 수 있다. 칸은 영국의 중세 도서관에 있는 회랑에서 구조에서 착안해 사람을 공간에서 회전시켜 곧장 어디로든 갈 수 있게 했다.


도서관은 공간을 물리적인 벽으로 구분하지 않고, 빛을 사용해 단계적으로 가운데에서부터 바깥쪽까지 차례대로 아트리움(중정), 책 보관실, 열람실로 분리했다. 인공적인 조명보다는 자연광으로 빛으로 내부를 밝혔다. 도서관의 중앙은 마치 원탁의 기사처럼 가운데 원형 테이블을 두고 천장에서 빛을 떨어뜨려 가장 깊은 공간을 엄숙하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책을 고른 학생은 빛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창이 있는 건물의 가장 바깥쪽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실을 만들었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의 디자인 과정 / 건축의 탄생에서

무엇보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의 가장 압권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사방으로 둥그렇게 열린 콘크리트 구조이다. 칸의 건축에서는 언제나 기하학적인 형태가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미우스적 인간(Vitruvian Man)을 참고해서 디자인한 벽체는 열린 구조 안에서 보이는 책장을 통해 이 건축물은 도서관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게 해 학생이 어느 곳에서 서 있어도 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은 칸이 말하는 빛, 구조, 공간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룸의 형태가 되었다.


도서관에서 그 어떤 것도 불필요하게 만들어진 것은 없다. '무엇이 되고픈가'로 시작해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이 건축물은 반듯하게 모던한 형태로 지어졌지만, 균일하지 않은 붉은 벽돌을 사용해 신고전주의 건축으로 가득찬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캠퍼스 안에서 서로 어긋남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빛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시선을 머물게 한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인다. 빛은 공간의 형태를 드러나게 하고, 때로는 흔적없이 감추기도 한다. 틈이 있다면, 그 사이로 비집고 파고 들어가 아무도 모를 벽 너머에 흔적을 남긴다. 그렇게 루이스 칸은 빛처럼 세상에 큰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 건축은 그에게서 빛이었다. 건축을 향한 그의 집념은 하나의 커다란 이념이 되어 건축을 하는 많은 후세에게 한줄기 빛이 되었다.

*한국건설기술관리협회에 기고




루이스 칸의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


루이스 칸의 소크 생물학 연구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