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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 May 22. 2017

동네 고양이에게 은혜 갚는 법

숨은 고양이 찾기 - 부암동 골목길 사진전의 탄생

자주 가던 식당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매일 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을 몰라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것이 도시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이 고향인 내겐 오히려 이런 도시의 속도감과 익명성이 편할 때가 많았다. 한결같이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건 마치 무능의 상징 같기도 하고 뭔가 제자리 뛰기라도 하고 있어야, 그러니까 같은 자리에서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있어야 그래, 너도 열심히 사는구나 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는 말도 안 되는 말에도 나는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내가 여행을 다녀온 후 한 동네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겪은 변화가 하나 있다. 매일 같은 골목길을 걸으면서도 좋아하는 풍경 안에 있으니 그것이 하나 지겹지 않고 같은 풍경도 사시사철 다르게 보인다는 거다.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매일 다르게 보인다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없었다. 특히 나처럼 싫증 잘 내고 지겨운 걸 못 견뎌하는 도시 여자에겐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여기에선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했고 족히 천 번은 넘게 오갔을 골목길을 또 걸으면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흐린 날은 흐려서 맑은 날을 맑아서 비가 오면 비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의 그 모든 풍경이 좋았다. 매일 카메라를 들고 내 눈에 예뻐 보이는 동네 구석구석을 찍고 또 찍었다. 그저 좋아서 담아둔 동네 사진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새 하드디스크의 절반이 되었다. 사진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매일 찍은 사진들을 보며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순간들을 남기고 싶어 했는지.


사진 속에는 나무와 하늘, 바람과 햇빛, 그리고 고양이가 있었다. 늘 그 자리에 변함없이 머물러 주는 존재들. 내가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머물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내주기만 하는 존재들. 일상의 순간순간에서 그들로부터 나는 얼마나 큰 위로를 받고 있었나. 매일 보는 풍경 속에 그들이 없었다면 내 일상은 얼마나 삭막했을까 생각해 본다. 좀 더 생각에 잠기는 날엔 조용히 날 내려다보는 담벼락 위에 앉은 길고양이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주는 것 없이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걸까. 어떻게 하면 소중한 존재들이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이 고양이 책방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언젠가 고양이와 관련된 책으로만 가득한 서점을 여는 게 꿈이라고 말했던 그녀의 말이 일 년 만에 현실이 되는 것을 보았다. 꿈을 이룬 그녀에게 꼭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고민 끝에 지금까지 동네 골목길에서 찍은 고양이 사진들로 엽서를 만들어 선물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분들이 다들 좋게 보시고 이 사진들로 전시회를 하면 어떠냐고 하셨다. 당시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고양이를 키워본 적도 없고 사진을 배워본 적도 없는데 그런 내가 고양이 사진전을 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신설동에서 조그맣게 시작한 고양이 책방은 동숭동으로 확장 이전을 했고 지금 그곳에선 지난 오 년 간 내가 부암동 골목길에서 찍은 길고양이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사진으로 엽서도 만들고 포스터도 만들고 액자도 손수 제작해 걸었다. 전시 수익금은 모두 고양이 보호 협회에 한 푼도 남김없이 기부하는 조건으로. 이렇게 하면 그동안 고양이들에게 내가 받아온 것에 조금이나마 보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전시를 하기로 했다. 사진의 완성도로 보면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좋은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골목 사이사이 숨어 있는 고양이들이 귀여워 전시 제목은 숨은 고양이 찾기로 했다. 부제는 부암동 골목길이다. 이렇게나마 길고양이에게 조금은 은혜를 갚을 수 있지 않을까 빚지는 걸 싫어하는 도시 여자는 끝까지 지 마음 편안해 보려고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간 찍은 동네 사진들을 간간히 올리기 위해 계정도 만들었다. 쑥스럽지만 고양이 좋아하는 분들에겐 정말 좋은 장소이니 전시는 겸사겸사 책방 구경하러 나들이 많이들 오셨으면 좋겠다.

 

책방을 연 지인에게 선물해 주었던 엽서, 이것이 인연이 될 줄이야


엽서 판매 수익금은 모두 고양이 보호 협회에 기부할 예정


고양이 관련 서적이 벽면 가득 빼곡한 고양이 책방 풍경


멀리서 보니 정말 안 보인다, 부암동 골목 사이사이 숨어 있는 길고양이 사진들


고양이 사진전인데 첫 관객이 강아지 손님이었다 


전시가 열리는 고양이 책방 슈뢰딩거는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무이니 영업 시간을 확인해 보고 가면 더 좋다.



직접 만든 포스터, 전시는 이번주 일요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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