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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 Apr 27. 2017

서울 여행자의 집

부암동 장기 체류자의 게스트하우스

#. 살고 싶은 동네를 선택할 권리


살고 싶은 나라를 찾겠다며 한동안 한국을 떠나있던 적이 있다. 그랬던 내가 돌아와 여기 머문 지 벌써 칠 년째. 여행 전과 여행 후,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길래 나는 그렇게도 떠나고 싶어했던 곳에서 이렇게도 잘 머물고 있는 걸까? 스스로도 놀라워 생각해보면 크게 달라진 점은 두 가지 정도다. 그때보다 일을 덜 하는 것과 좋아하는 동네에 살고 있는 것. 이 두 가지가 서울에서의 장기체류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물론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언제든 서울을 떠나 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 서울에서의 장기체류는 의무가 아닌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었다.


태국의 작은 마을 빠이에 몇 달째 머물고 있을 때 만나는 여행자들마다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여기서 뭐해요? 그동안 뭐했어요? 그럼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해요. 안 했어요. 그냥 나는 빈 종이 같은 시간이 필요했고 빠이는 그러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일어나 밥 먹고 고양이들이랑 놀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해 좀 떨어지면 타운으로 슬슬 걸어 나가 놀다 들어오고. 그럼 사람들이 또 물었다. 안 심심해요? 네 안 심심해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날 보며 생각했다. '아... 나는 집에 있는 걸 심심해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서울에선 종일 집에 있어본 적이 없어 미처 몰랐던 사실. 하늘과 나무를 볼 수 있는 풍경이 걸린 집에서라면 더더욱 심심해하지 않는다는 걸.


긴 여행에서 돌아와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의 놀라움을 잊지 못한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인왕산과 북악산 자락이 만나는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을. 버스로 십 분이면 시내와 지척이지만 가까운 역이 없어 붐비지 않는 곳. 나무가 많아 새소리가 들리고 높은 건물이 없어 탁 트인 풍경을 볼 수 있는 곳. 본 순간 직감했다. 여기는 서울의 빠이구나.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면 이 곳에 살아야 한다.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여행 다녀와서 남아있던 모든 돈을 이 집 전세금에 보탰다. 그렇게 이사 온 지 벌써 칠 년째. 다사다난했던 서울살이 경력에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동네가 바로 여기 부암동이다.


물론 여기가 모두에게 살기 좋은 곳은 아닐 거다. 차가 있다면 골목이 좁아 주차가 불편할 테고 근처에 약국이나 병원이 없어 불안할 수도 있고 지하철로 출퇴근한다면 가까운 역까지 버스로 십 오분은 달려야 하는 이 동네가 마냥 좋지만은 않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암동은 빠이와 많이 닮았다. 내가 살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꼬불꼬불 길을 지나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사시사철 풍경을 즐기기에 좋고 동네를 아끼는 주민들의 마음이 골목골목 느껴지고 한가한 평일과 달리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주말의 모습까지 두 마을은 많이 닮았다. 그래서 이곳을 서울의 빠이로 명명하고 한동안 살아보기로 했다. 여기저기 여행 다니다 원하는 곳이 나타나면 맘껏 눌러앉아 몇 달이고 장기체류를 하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햇빛 좋은 날 동네 언덕에 올라 바라본 풍경


#. 세상에 하나뿐인 게스트하우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사람들은 이상해. 몇 억씩 대출받아 어렵게 집을 샀으면 그만큼 누려야 할 거 아냐. 집에서 편히 쉰다던가 하면서. 근데 왜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은 생활을 하는 걸까.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뭔가 이상한 말이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마치 무리해서 고급 호텔을 숙소로 잡아 놓았는데 여행 스케줄을 너무 빡빡하게 짜 놔서 새벽부터 일어나 조식 먹고 나가서 투어 마치고 밤늦게나 들어와 정작 숙소에선 잠만 자는 그런 삶 아닐까? 여행은 시간이 짧아서 그렇다 치더라도 일상에서의 집은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빚을 지고 산 집에서 빚을 갚기 위해 매일 야근하며 무리하게 일하다 훅 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면 그건 좀 슬플 것 같다.


살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일을 하는 직장과 생활을 하는 집이다. 이 두 가지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된다면 그 삶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특히 복잡한 도시에서의 집이란 여행지에서의 숙소만큼이나 중요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공간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나와 어울리는 동네, 어울리는 집, 어울리는 삶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 나는 보험도 빚도 없는 대신 집도 차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쉽게 떠나기 위한 구실이기도 하고 그럴만한 돈이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대신 집에 대한 생각을 좀 바꿨다. 여행지의 수많은 숙소들처럼 이곳 또한 그런 숙소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전셋집은 잠시 빌린 남의 집이기도 하지만 사는 동안은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게스트하우스이기도 하니까. 이곳을 내게 어울리는 공간으로 만들 권리가 내겐 있었다. 또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무엇을 살 보단 무엇을 버릴를 고민하며 살기로 했다. 큰 가구나 짐을 정리했더니 거실이 넓어져 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고 옷과 책을 정리했더니 책장도 옷장도 필요 없게 되었다. 모니터와 티브이를 팔고 대신 프로젝터를 구입해 벽면 한가득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가 흘러나오게 했다.


이 집을 찾는 모든 손님들은 나와 동등한 게스트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는 '내 집'이 아닌 '우리의 게스트하우스'다. 물론 돈을 받거나 방을 렌트해주는 정식 숙박업은 하지 않는다. 그저 친한 이들이 언제든 놀러와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게스트들이 제법  모이는 날이면 긴 테이블 위로 여행에서 사 온 세계 맥주와 희귀 음식들이 펼쳐지는 레스토랑이나 바가 되기도 하고 서로의 컬렉션으로 취향을 나누는 영화관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한 소절씩 기타를 튕기거나 노래를 하는 공연장이 되기도 하고 서로 뻐끈해진 몸을 풀고 마음의 스트레칭을 하는 요가원이 되기도 한다.

툭하면 봤던 영화 또 보는 상영회가 열리고


게스트들이 기증한 시디가 잔뜩 있으나 시디플레이어가 고장 나 몇 년 째 듣지를 못하고


겨울에 만든 북트리가 아직도 반짝이고 있는 게으른  부암 게스트하우스


#. 동네주의자로 살아가기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갖는 것도 좋은 것을 계속 쌓아두는 것도 모두 한계가 있다. 좀 더 비싼 의자를 사면 그만큼 더 편안할까? 방과 화장실이 하나씩 더 많은 집으로 이사 가면 훨씬 더 행복해질까? 한국처럼 좁은 땅덩이를 가진 나라에서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만 몰려 있는 이 상황에 되도록 내 공간을 넓히려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갖고 싶은 걸 집으로 끌어들이려면 더 많은 돈과 공간이 필요하지만 필요한 것을 서로 나누고 집 안이 아닌 밖에서 좋은 것을 찾아보면 어떨까? 아마 기쁨은 두 배가 될 거다. 집 앞에 마음 둘 공원이 있다면, 직접 만든 반찬으로 매일 정성스러운 밥을 내주는 단골 식당이 있다면, 매일 지나다니는 골목길에 마주치면 눈인사를 나눌 다정한 이웃이 있다면 말이다.


사람마다 여행지에서 숙소를 고를 때의 기준이 있을 거다. 집 자체가 중요한 사람도 있을 테고 집보다는 주변 환경 동네 분위기 자체가 더 중요한 사람도 있을 건데 나는 후자인 편이다. 화장실 없는  문간방에 얹혀살 때도 별로 슬프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면 언제든 좋아하는 오래된 골목길을 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날 슬프게 만든 건 정들만하면 그 동네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마다 주변 환경을 보는 기준도 다를 텐데 난 주로 믿고 갈만한 식당이 있나, 교통 소음은 어느 정도인가, 집 주변의 풍경이 어떤가, 뭐 이런 걸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다행히 부암동은 이런 나와 아주 잘 맞았고 나의 '집'을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은 자연스레 '동네'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커져나갔다.


답답할 때면 한 번씩 올라가 마음을 풀어놓을 언덕, 높은 빌딩이 없어 고개만 들면 언제든 볼 수 있는 뻥 뚫린 하늘, 여기저기 피어난 꽃과 나무, 골목골목 노래하는 새들과 길고양이들. 나는 주는 것 하나 없는데 그들은 늘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매일 다니는 길을 매일 보면서도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살면서 깨달았다.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얼마나 삶을 진하게 위로해 주는 지도. 그러니 매일 보는 동네를 어쩌다 한 번 가는 이국의 도시보다 좋아하게 된다면, 집의 주인이 되기보다 게스트가 되려 한다면 우리의 일상은 좀 더 가볍고 즐거워지지 않을까?


자주 가는 카페 창문 너머에도
자주 오르는 언덕 위에도 봄봄봄
매일 같은 자리의 개들
같은 자리에서 늘 취침 중인 고양이와 인사를 나누고
매일 봐도 매일 좋은 버스 정거장 가는 길
지금은 오후 다섯시의 빛이 좋아 그 시간에 좋아하는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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