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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 May 24. 2021

오해와 이해 2

밤에 쓰는 일기

"그 사람 실제로 보면 성격 진짜 별로래."

"아 그래? 나도 소문 들었어. 인터뷰 갔던 아는 기자가 그러더라고."

"너도 그 소문 들었니?"


한때 내가 몸 담았던 업계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만난 그 순간을 캡처하듯이 저장해 대중매체로 전송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열심히 촬영 중인 모델을 앞에 두고 스탭들은 그 사람과 관련된 루머를 말하며  촬영 시간을 견디기도 하고. 인터뷰를 다녀온 이가 자신이 경험한 그날의 인터뷰이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면 같이 욕해주며 동료애를 쌓기도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빠른 시간 내 특징을 잡아서 써야 한다. 그때 첫인상이 많은 것을 좌우하기도 하고 기존에 알고 있던 대상에 대한 이미지가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물론 그 이미지나 루머는 사실인 경우도 있었고 아닌 경우도 있었다.


사실, 모든 사실은 반반이다. 내가 그를 오해하고 싶은가, 이해하고 싶은가의 차이만 있을 뿐. 만약 한 작가가 무리한 홍보 일정 때문에 계속 인터뷰 릴레이 중인데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인터뷰어가 미흡한 준비로 식상한 질문만 해온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작가는 어느 정도 피로감이 쌓여있을 테고 마침 그날따라 몸 상태까지 안 좋다고 치자, 그를 인터뷰하고 돌아온 누군가는 자신이 경험한 이런 그의 태도를 얼마든지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나 보니 생각보다 성의 없고 불성실한 사람이더라.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 이 사람이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구나. 내 인터뷰가 미흡해서 이 사람으로부터 충분한 인터뷰 내용을 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이것은 오해가 아닌 이해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이해의 토양에는 반드시 자신에 대한 성찰이 전제된다. 애초에 오해라는 것은 받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생기게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해라는 것은 오해하고 싶지 않다면 생기지 않는 일이니까.


서른 살에 직업을 바꾸고 처음으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학생들을 만나러 매일 학교에 갔다.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 하루하루 뛸 듯이 기뻤지만 그럼에도 수업시간에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학생들이 내 수업을 듣지 않을 때였다. 휴대폰을 보고 있거나 아예 엎드려 자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다 보니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다. 어젯밤에 몇 시간에 걸쳐 수업 준비를 했는데 이런 내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다니! 이러다가도 초보 선생님이니 자책을 하기도 했다. 내 수업이 재미가 없나 보다. 얼마나 무익하면 저렇게 잠을 자고 있을까. 그러니 열 명의 학생이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수업에 잘 참여해도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나머지 한 두 명에 자꾸 몸과 마음의 신경을 빼앗길 때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내 수업에 대한 자신이 어느 정도 생기고 경력도 쌓여갈 무렵. 나는 그런 학생들에게 쉬는 시간에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요즘 무슨 일이 있니? 혹은 선생님 수업이 재미없니? 선생님이 미안해 더 노력해 볼게. 등등. 그러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이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게 된 다양한 이유들을 이야기하며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전날 아르바이트로 밤을 새운 학생, 남자 친구와 싸워 울고 있는 학생, 고향에 안 좋은 일이 생겨 부모님과 연락하느라 수업을 못 들었다는 학생. 물론 그냥 공부가 싫어서 딴짓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말을 나누고 나면, 나의 문제가 아닌 그들의 문제로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도가 되었다. 더 이상 내가 그들을 오해하지 않아도 됨에 스스로 평온해지고 더 집중해서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것이 있다. 대부분의 오해는 나의 자존감이 낮을 때 발생할 확률이 높다는 것.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법한 그 사람의 표정, 말투, 태도에 유독 집착하고 있다면, 그의 그런 몸짓이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트라우마를 건들거나 자격지심을 불러일으킬 때라는 것.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는 대체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여유를 가져다주니까.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럴 수도 있지 뭐'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무의식이 절로 그렇게 받아들이니까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가게 된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생겨나는 크고 작은 오해들에 대해서. 나는 그를 왜 오해하고 있었을까? 한 번만 더 들여다볼 수 있다면, 상대가 오해의 여지를 먼저 줬다는 핑곗거리를 만나 그를 그저 비난하고 싶었던  아니었는지  비난은 나의 어떤 트라우마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 그 실체를 스스로 확인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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