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의 서른 즈음에, 프롤로그
나는 방송 프로그램인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좋아한다. 코로나 이전에 유재석이 길거리를 다니며 평생 나는 만나보지 못할 사람들을 인터뷰하면 그들의 사는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거기에 출연한 사람들은 모두 우연히 방송에 나오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 우연함이 좋았다. 마침 그때 그 자리에 있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 사람들. 그런 기회가 없었다면 그들은 아마 평생 자신의 얼굴이나 사는 모습, 이야기를 방송에 내보낼 일이 없었을 거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우연히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얘기할 기회가 왔을 때, 숨길 것도 더 보탤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그동안 잘 살아왔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책에 실린 30명의 글이 ‘유 퀴즈’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우연히 하게 된 사람들의 말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우연히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글을 쓰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우연함의 계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나는 서른이 되던 해에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를 30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버전으로 재해석해서 노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2021년 1월, 나는 마흔이 되었다. 이번에는 각자 살아온 30대의 삶을 돌아보는 글을 써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인터넷에 프로젝트에 대한 글을 올리고 참여자를 모집했다. 그렇게 우리는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하다 우연히 이 글을 보고 마음이 동해서 ‘서른 즈음에 프로젝트’를 함께하게 되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지난 6개월간, 서로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 채 같은 질문에 답을 하고 같은 주제로 각자 다른 글을 썼다. 단 한 번의 만남 없이 300여 통의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이 책을 완성시켰다. 우리에게는 이 책을 완성해야 하는 어떤 계약 조건이나 시스템도 없었다. 기획자인 나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질문을 정리해 3주에 한 번 메일로 보냈고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답장했다. 어떤 형태의 결과물이 될지, 얼마큼의 사람들이 끝까지 함께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단지, 지나온 삶을 기록해보고 싶다는 ‘마음’, 지난 삶을 솔직히 바라볼 수 있는 ‘용기’,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이 있었다. 그리고 이 우연한 기회를 소중히 여기며 서로를 믿고 끝까지 함께해 준 ‘신뢰’. 결국 이런 가치들이 이 책을 세상으로 나오게 했다.
이 프로젝트 참여자 대부분은 서른 즈음을 통과해 마흔 즈음에 도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서른 즈음에’의 가사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관통한다. 매일 만나던 친구들이 각자의 삶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삶의 특별함보다는 평범함을 소중히 여기는 시기에 도착한 사람들. 그들이 통과한 서른 즈음에는 하나같이 다 달랐다. 누군가는 서른 즈음 한국의 삶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떠났고, 누군가는 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 정착했다. 누군가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와 이별했다. 또 누군가는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기존의 경력을 다 져버릴 때, 누군가는 경력을 쌓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같은 시간을 통과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랐지만,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시간을 탐험했다.
모두 다른 방식으로 통과한 그 시간 끝에서 우리가 내린 결론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나답게 살 것. 내 삶의 주인공이 될 것. 어쩌면 삶이란 누구나 알 법한 이런 명제를 자신의 방식으로 증명해 나가는 것 아닐까?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이 쉽고도 단순한 사실을 현실화시키기는 얼마나 쉽지 않은가. 그래서 시간을 탐험하는 주인공이 당신이 되는 것에, 이 책이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공평한 유산은 시간이니까. 어릴 때부터 공부하고 시험을 친 문제지 속 질문에는 늘 정해진 답이 있었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없으니까.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아갈 이유도, 나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살아갈 이유도 없다. 누군가 내 삶에 대해 물어올 때, 이제는 숨길 것도 더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지나온 삶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열 달간 이 책을 만들며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다.
저녁 여섯 시 이후 3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서울의 유례없는 밤에도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이 책을 편집하고 있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홀로 침대에 누워있어도 서른 명의 얼굴이 둥둥 떠오르던 밤,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져 더 이상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게 된다 해도 ‘나 죽기 전에 이런 책 만들었어. 그때 하길 정말 잘했지.’ 할만한 책이라고. 큰 시스템이나 자본 없이, 각자의 고독과 연대만으로 현실에서 이런 책을 만들게 될 줄이야. 내가 늘 꿈꾸던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책을 만들게 해 준 당신에게, 그리고 이 책을 발견해 준 당신에게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2021년 11월 11일, 홍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