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보루가 되어준 곳
나의 집, 본가는 감나무 8그루가 꽉 차게 둘러싸인 ㅁ자형집. 목수였던 아버지가 지은 집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3대가 함께 살았던 마당 넓은 집. 긴 마당의 길을 따라가면 커다란 미류나무총각이 쭉 늘어선 풍경.
노란 감꽃이 피고 떨어지면 강아지풀에 구슬처럼 꿰어 놀던 막내딸. 내 목에 금동이 돼지목걸이처럼 걸어주였던 아버지. 소꿉놀이처럼 그 감 꽃잎, 하나하나 빼먹던 알싸한 기억. 밤새 눈이 오면 눈사람이 마당 끝 세퍼트(개) 집 옆에 서있었다.
시골은 가난과 불편의 상징이 아닌
모태 같은 곳, 대자연의 섭리와 순리로
나를 위해 나팔꽃도 심어주셨는데, 이른 아침이면 나팔꽃이 왜 봉오리를 다물고 있는지도 골똘히 생각하는 소녀이기도 했다. 이미 나팔꽃의 생태를 알고 있는 아버지는 어린아이의 생각이 마냥 신기했다고 한다.
신작로를 따라 핀 코스모스에 꿀벌을 잡겠다고 고무신을 사달라고 졸라서, 그 고무신에 어떻게하면 벌에 쏘이지 않으면서 꿀벌을 기절시킬까에 골몰하던 아이.
그런 추억이 있어서 그런 몰라도 '시골'은 '가난과 불편‘의 상징보다는, 학교생활에서의 힘듦과 대학교를 장학생과 공모전을 입상하고서도 백수로 지낸, 눈총 같던 화살을 맞아내며 그런 성인이 된 내가 상처입은 몸으로 도망갈 수 있는 피난처, 딸로 대접받을 수 있는 곳, 성스러운 곳, 모태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타이틀을 가진 3남매였다.
아버지와 엄마는 결혼하고 8년 만에 맏딸인 언니를 낳았고, 6년 뒤에 2대 독자인 오빠를 낳았다. 그리고 2년 뒤에 막내딸인 나를 낳았다. 시골의 이웃집들은 5남매 6남매가 보통이었지만 우리 집은 아버지도 외동아들이고 자손이 귀한 집이었기에 명절에는 조금 쓸쓸하기도 했다. 다만 아버지가 문중의 큰 어른이라서 친척들이 많이 왔지만, 세뱃돈이나 용돈의 총량을 올리기엔 영양가가 없었다. 가부장적 씨족 공동체에선 막내딸은 그냥 순위에도 없다는 거.
언니오빠는 1학년때부터 성적 1등과 전교회장과 부회장 반장 부반장,,, 상장이 박스로 쌓여도 나는 고작 4학년때부터 부반장을 했다. 그것도 싫다고 거절했으니.(사실이다. 풉)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내 성적표를 보고 놀라서 나를 설득하려고 어느 날 영덕대게를 사 오셔서 “이젠, 공부 좀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을 때, “공부는 언니오빠만 잘하면 되지, 나까지 잘해야 해요? 내 밑에도 공부 못하는 애들이 많아요. 아버지.“라고 해서 아버지를 허허 웃게 했다고. 막내딸은 어쩔 도리가 없는 기쎈 존재가 맞는지도. 그 대신 미술, 음악(지휘자),무용에 관심이 많아서 대회를 나가곤 했었다. 나는 대회에 입고 갈 옷을 사달라고 그때마다 떼를 썼다. 마당에서 엄마의 몸빼바지를 잡고 늘어진 상상은 독자에게 맡긴다.
시집와서 8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못 낳는다며 내쫓길 뻔한 엄마였다. 서울에서 목수일을 하다가 할아버지의 권유겸 회유로 귀농하였으나 실질적인 명의가 다 할아버지로 되어 있어서 머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할아버지와 잦은 갈등으로 결혼을 하셨음에도 가출을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못 잡고 있을 때 8년 만에 애지중지 얻은 그 맏딸(언니)로 인해 마음을 잡았다고 한다. 엄마는 재봉틀을 사서 옷을 만들며 아버지의 경제적인 것을 도왔다고.
결혼 후 8년만에 얻은 귀한 딸, 쌔근쌔근 잠든 첫 딸을 보며 아버지와 엄마가 어떤 생각으로 버티셨을지, 웃으셨을지. 그렇게 아버지의 꿈, 엄마의 자랑으로 자란 언니는 무궁화4개의 경찰공무원이 되었다.
언니는 문중의 큰딸이라 친척들이 와도 언니를 먼저 찾았다. 나? 나는 낯가림이 심해서 엄마 치마폭에 숨은 아이였다. 목소리 큰 경상도 친척들이 몰려와 용돈도 안 주면서 시끄럽게 하는 게 성가셔서 이웃집으로. 나에 대한 관심을 갖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게 상책이었다. 솔직히 잘생긴 시골삼촌들이 어딧겠냐 말이다. 뻔하지.
홀로 남은 엄마를 배려하여 감나무도
결국 모두 베어졌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슬펐던 기억이 있다. 내 기억도 와락~
베어진 것 같은,,, 쓰러져 누운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고등학교 때 차례로 돌아가시고, 대학교를 졸업 후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결혼도 안 한 자식들은 각자의 일로 서울에 있었고 엄마 혼자 남은 집이, 늦가을엔 감을 따기도 힘들었지만 떨어지는 감과 수북한 낙엽을 치우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라서 엄마를 배려하여 감나무도 결국 모두 베어졌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슬펐던 기억이 있다. 내 기억의 일부가 와락~ 베어진 것 같은.
집 또한 혼자 남은 엄마가 쓰기 편한 전원주택으로 다시 지어졌다. 소를 키우던 곳은 텃밭을 위한 비닐하우스로 상추와 대파가 자라고 있었다.
간혹 튀어나오는 사투리로 짐작할 뿐.
“혹시 고향이...." 로 상대가 대화의 친밀감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나로선 지겹게 반복된
물음이었다. 못참지. 그건.
그런 시골아이가 자라서 누구보다 서울아이 처럼 되어버린.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는가 말이다. 일을 하면서 만난 많은 디렉터나 거래처 사람들은 내가 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놀라곤 했다. 겉으로는 174센티의 모델 같은 기럭지와 누가 봐도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리더로서 감출 수 없는 장군 같은 포스의 나의 빛, 그 아우라가.
또한 디자인학과 전공으로 진학한 케이스는 내가 유일했다는 것이다. 안동시내를 통틀어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별것 아니라고 하겠지만 지방대 대신 내겐 과감한 선택이었고 그 모든 것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각인되었다. 그것은 자랑이라기 보단 경쟁에서 나를 더욱 단단한 마음으로 거칠것 없이 나아가게 해준 용기의 조각으로 나를 도왔다는 것이다. 선택과 결과가 어떤 결과를 미치는지 몸소 습득하고 학습했기에 그렇다.
그때의 아이가 성장하여 선택한 일, 꿈을 향한 지난한 승부 등 내가 가고자 한 길에 어떤 일이 생길지 나는 지금 2024년 미래에 있으니 다 알고 있다. 미래에서 와서 이 글을 쓰고 있으니까.
그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으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과대포장되거나 미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다만 성공과 꿈이라는 것에 대한 요즘의 결과치에, 나는 선택한 길을 특히나 반대하는 길을 내 의지로 개척하고 걸어온 사람이라 뼛속까지 자부심이다.
그것은 내가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았거나의 차이일 뿐이지 얼마를 벌었고 대박을 냈나 성공했나로 비교하기엔 발끝에도 못 미치는 조잡하고 조잔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가진 최고의 노력으로도 그 어깨는 부서져야 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의 나와 경쟁 하려면.
경쟁이라는 서울에서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부모님이 계신 곳에서 배수의 진을 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었다.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드러내야 하겠지만 어린 유년의 시간이 내겐 정말 몇 개 안 남은 단편적인 기억이지만 든든한 추억으로 꺼내 먹었다. 맛있게.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떨떠름해 하면서.
나를 지켜봐준 8그루의 감나무와 계절마다 떨어지던 감꽃처럼. 때로는 간식으로 때로는 주렁주렁 보석으로
서울생활에서 지치고 힘들 때는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티켓을 끊었다. 자주 가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아 참다 참다 너무 힘겨울 때 달려갔다.
그렇게 말없이 나를 지켜준 것은 도시가 아닌 대자연이 품은 풋내나는 시골이기도 했다. '도시'라는 콘크리트 박스가 아니라 부모님이 일궈놓은 논과 밭, 산과 들, 이름 모를 풀꽃이 자생으로 자연과 타협하고 조화롭게 피고 지는 그 순리와 섭리...그 곁에 있던 커다란 미류나무의 손짓 그리고 부모님이 계신 곳. 세상물정 모르고 까르르 웃던 순수한 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아름답게 기억되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삶이 매번 즐겁겠는가 말이다. 그곳에도 비극이 있고, 갈등이 있다. 무엇보다 이제는 그 본가에 다시 가지 않으니까 말이다.
목수이자 농부의 딸로서 기억이 있어서 더 풍요로웠고 단단했다.
경쟁이라는 서울에서 승리하지 못한다고해도 부모님이 계신 곳에서 배수의 진을 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품어 안아주던 곳. 그래서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하는 지도 모르겠다.
환희와 좌절과 기쁨 그리고 치유와 소생, 그 모든 것이 응축된 웃음의 미소로 내가 저장한 곳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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