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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추진 계획 및 전략

1.5년이면 졸업할 수 있는데, 나는 6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by honggsungg labnote


지난 주를 할애해서 박사과정생 연구계획서를 완료했다. 백프로 연구비를 지원받는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넣어야 할 컨텐츠를 다 넣었고, 논리적 흐름도 너무 엇나가는 것 같지는 않다. 박사과정생 연구계획서는 박사과정생이 직접 연구책임자가 되어, 1년 혹은 2년 (연구기간은 기밀이므로, 편의를 위해 이 글에서는 그냥 1.5년이라 하겠다.) 동안 수행할 연구에 대해서 작성하는 연구계획서다. 이 연구계획서의 논리, 기간, 중요성 등이 타당한지 평가받고, 그 결과에 따라 박사과정생은 연구비를 받는다.


연구계획서의 작성항목 중에서는 "연구의 추진 계획"이라는 항목이 있다. 연구의 추진계획에는 각각의 시점에 어떤 연구를 할 것인지 그 계획을 작성하고, 그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작성한다. 예를 들어서 3년 동안 총 3억원을 지원하는 연구비에 지원한다고 하면, 1, 2, 3년차에 어떤 실험을 해서 이 연구를 완료할 것인지를 작성해야 한다. 연구의 추진계획을 통해서, 이 연구가 1년 정도면 끝날 연구인데 3년 동안 연구를 질질 끌어서 돈을 많이 받아먹겠다고 하는 속셈인지, 또는 이 연구가 10년 정도의 대형 연구인데, 3년 동안 하겠다고 하면서 저티어 연구자들의 연구비를 뺏어가겠다고 하는 의도인지를 알아본다. 그러니까 3년짜리 연구지원금에는 3년짜리 연구 계획을 작성해야 한다.


근데 연구가 하다보면 항상 계획보다 더 미뤄지고 늦어지는 경우가 대다수고, 내 예상과는 다른 과학적인 발견 때문에 연구의 방향이 틀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상과는 다른 과학적 발견이 대형 발견인 경우도 많다. 플레밍의 푸른 곰팡이나, 펜지어스와 윌슨의 우주 배경 복사 같은 케이스들이 대표적인, 예상치 못한 과학적 발견이다. 원래 과학이 이런 식으로 계획에 없던 우연에 의해서 발견되는 케이스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 연구의 추진계획을 작성해야 한다는 게 사실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연구비를 받으려면 써야지 어쩌겠나.




그래도 실험을 하다보면 아 이게 1년짜리, 혹은 3개월짜리 프로젝트다. 라는 시간적인 감이 온다. 이를 테면, "단백질을 하나 정제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는가?" 라는 물음에 나는 "운이 좋게 잘 되면 2주, 잘 안 되면 2달"이라고 말한다. primer를 주문하고 PCR 하는데 2일. PCR product를 vector에 넣고, vector를 e.coli에 TF하는데 3일. TF된 e.coli의 단백질을 과발현 하는데 3일. 과발현한 단백질을 깨어서 일련의 chromatograph로 정제하는데 4일. 총 12일 정도 걸리니까 실험이 모두 운이 좋게 잘 되면 2주이다. 위 과정에서 실험이 잘 되지 않는 경우의 수는 수없이 많으므로 대략 2달으로 추정했다. 3년차 이상의 바이오 대학원생들은 다들 이런 감이 생길 것 같다. 어떤 약물이 특정 단백질의 PTM을 일으키는지 알아보는데 소요되는 기간, 특정 genotype의 초파리를 만들어내는데 소요되는 기간 등등 말이다.


그리고 실험을 하다보면 이상하게 잘 되는 시스템이 있고, 이상하게 안 되는 시스템이 있다. 예를 들어, A 단백질은 정제하는데 2주면 충분하고, B 단백질은 정제하는데 2달 넘게 소요된다. C 단백질의 항체는 잘 디자인 되는데, D 단백질의 항체는 디자인이 안 되기도 하고. E genotype은 금방 나오는데, F genotype은 몇 달이 소요되어도 나오지 않는다. A 단백질은 잘 되고 B 단백질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B를 정제해서 그 특징을 봐야 A와 B의 비교가 되는데,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으니 안 되는 이유를 분석할 수가 없다. 사실 스크리닝을 해서 뭔가 척척 잘 돌아가는 시스템은 100개 중에서 10개 정도이고, 90개는 잘 안 된다. 그래서 대학원을 다니다보면 아래와 같은 말을 듣는다.


어려운 시스템을 선정해서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 쉬운 시스템을 찾아서 연구를 해야 한다.
다만, 그 쉬운 시스템을 찾아내기까지의 여정이 험난할 것이다.




이 연구계획서는 1.5년 짜리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작성했다. 나는 6년 가량 대학원을 다녔지만, 그 6년을 종합하는 큰 연구가 아니라, 1.5년 짜리 상대적으로 짧은 연구 프로젝트를 위한 연구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동안 붙잡고 있던 프로젝트 A도 아니고, 교수님이 시켜서하던 프로젝트 B도 아니고, 생물정보학으로 뭐 좀 해보려고 했던 프로젝트 C도 아닌 아예 다른 프로젝트 D를 하겠다는 연구계획서였다. 누군가는 지금까지의 프로젝트 A, B, C를 모두 종합하는 연구계획서를 작성했을 수도 있다. 어떤 전략이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프로젝트 D를 위한 연구계획서를 작성했다. 지금까지 했던 5년 동안의 연구보다 앞으로 할 1.5년의 프로젝트 D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 방향이 연구계획서를 작성하기에 더 수월했다. 초고를 마친 연구계획서의 1.5년 짜리 연구의 추진계획이 과연 적절한지 검토해봤고, 내 기준에는 충분히 실험을 수행할만한 기간이라고 판단했다. 그러고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연구계획서에 작성된 프로젝트 D는 내가 대학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에도 1.5년 만에 수행할 수 있는 연구인데, 왜 그 때는 이 연구를 못 했지? 그 때 이 연구를 했으면 1.5년 만에 바로 졸업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고는 나는 바로 나의 의문에 대답했다.

이 연구는 입학하고 바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연구는 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할 수 있다.


우선 이 시스템을 찾는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막 입학했을 때는 도대체 어떤 단백질을 가지고 실험을 해야 하는지 한참 고민하고 공부했다. 연구하고픈 생명현상에 관여하는 단백질은 20개가 넘는다. 그 중에서 내가 다룰 수 있는 단백질의 개수는 기껏해야 5개 정도이다. 모든 단백질을 다 발현시키고 정제하는 일은 우리 연구실과 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중에서 5개의 단백질을 고르고, 그 중에서도 내가 정말 연구해야 하는 도메인을 잘라서 연구를 진행했다. 이 도메인을 설정하는 일은 다분히 나의 주관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었다. 1-50 aa까지의 도메인은 정제가 어렵기도 했고, 3-52 aa까지의 도메인은 정제가 잘 되기도 했다. 단지 2 aa 만 차이났을 뿐인데 말이다. 실험이 잘 되는 단백질과 도메인을 찾는데까지 년 단위로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을 어떻게 분석해야할지 그 개념적인 이해를 체화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단백질을 물리화학적이고 수식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입학하고서 3년차까지는 그 수식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완벽히 이해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이 수식들에 많이 노출되고, 자주 들여다보니, 이해보다도 익숙해졌다. 왜 해야하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느낌상으로 그 중요성을 느낀다. 3년차 이전에는 교수님에게 도대체 이걸 왜 해야하는지 많이 물어보고 따지고 대들었을텐데, 이제는 그렇지 않는다. 교수님께서 생명현상을 바라보는 렌즈와 나의 렌즈가 6년의 시간을 거쳐 많이 동기화되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지금도 대들기는 하지만, 이 문제로 대들지는 않는다.)


개념적인 이해와 쉬운 시스템의 발견은 상호보완적이었다. 아마 내가 실험하기 쉬운 시스템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개념적인 이해의 발전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론적인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직접적인 내 데이터를 물고 뜯고 분석하면서 실습을 해봐야 개념을 확실히 익힐 수 있었다. 수학을 공부할 때 예제없이 개념만 알고 있으면 하나도 실력이 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개념적인 이해가 없었더라면, 내가 실험하기 쉬운 시스템을 발견하더라도, 이 시스템이 정말 실험하기에 쉬운 시스템인지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념이 없었더라면 마냥 더 높은 결합 세기의 시스템을 찾으려고 허송세월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1.5년짜리 연구를 하기 위해 5년 넘게 대학원에서 실험하고, 스크리닝하고, 공부를 했다. 그 덕분에 연구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 연구계획서가 과연 선정이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선정되지는 않더라도 이 연구를 1.5년 안에 수행하고 나는 박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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