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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gsungg labnote Aug 19. 2024

있어보이는 연구자

연구 일기

(24년 8월 첫주에 작성한 글을 기반으로 합니다.)


'조승연의 탐구생활'이라는 유튜브를 즐겨본다. 조승연 작가는 TV 방송에도 종종 나와서 해외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주로 얘기를 했었고, 마찬가지로 그의 유튜브도 해외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다룬다. 그의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인문학적 교양이 풍부해지는 느낌이라서 즐겨보고 있다. 


오늘은 "버터 vs 올리브오일" 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시청했다. 오늘 보던 영상은 유독 bgm이 고급스러운 재즈 느낌이었고, 버터를 가미한 음식 플레이팅도, 레시피를 알려주는 자막도 모두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더 고급스러운, 소위 말하는, '있어보이는' 유튜브 영상이 되었다.

https://youtu.be/H8l0wyfJA_E?si=c7ygembcUmix6aWN


조승연 작가가 10년 쯤 전에 라디오스타에 출연해서 한 말이 있다. "저는 폼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라서, 예쁜 카페에서 시집 하나 들고, 양복 입고, 다리 꼬고 이렇게 공부하는 게 멋있어 보이고, 그래야지 공부가 되거든요." 그는 폼 나고 있어보이고, 고급져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말을 한 10년 후 그의 모습을 보면 꽤나 고급진 인텔리 느낌이 난다.


이와 비슷하게, 베스트셀러 "라틴어 수업" 첫 챕터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첫 수업에서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학생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라틴어 수업을 들으려고 하느냐고요. 그러면 저마다 제각각의 이유를 이야기 합니다. 그 중에서도 "있어 보이려고요" 라는 대답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어요.

저자 본인도, 외국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해외의 학생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어떤 공부를 하던, 그 공부가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공부에 거창한 목적마저 있어야 한다면 숨이 막힐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든 그냥 유치한 동기로 시작해도 좋다. 저자는 이렇게 얘기했고, 나도 일정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도 고급져보이고, 있어보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쉬는 동안에 커피를 못 마시지만 분위기 좋은 카페에도 가고, 예술적 조예를 얻고자 전시회도 가고, 지식인이라면 필수적인 독서도 하고, 이렇게 문장도 끄적이고 있다. 그리고 있어보이는 행위들을 하고 있다보면 실제로 머리 속에 뭔가 채워지기도 한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주인공이 전문직 사기를 치면서, 실제로 귀동냥으로 해당 분야의 지식이 늘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내 머리와 내 마음에 아무 교양도 없는데, 있는 척을 하기가 더 어렵다. 있는 척을 하기 위해서는 진짜 교양이 있어야 한다. 


생명과학 연구자라는 이 본업도 어찌보면 있어보이는 직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내 본업이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기 때문에 생명과학 연구자가 그다지 고급스러운 느낌인지 잘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와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을 만나다보면, 그 사람들은 생명과학 연구직이 굉장히 해박하고 인텔리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중 한 친구는 박사과정의 나를 "역시 고학력자"라면서 장난치며 과대평가해주기도 해서 기분이 좋았다. 일상 속 본업의 나는 실패하고 깨지는 날이 많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한민국 과학의 최전선에서 연구하는, 있어보이는 사람이다. 그동안 본업이 아닌 시간동안, 뭔가 있는 척하려고 노력했는데, 본업까지도 있어보인다면 두 배로 고급스럽고 있어보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대학생 때 전공수업에서 생명공학 기업(Genentech 이었나..)의 설립에 관한 썰을 하나 들었다. 지루했던 학회가 끝나고 펍에서 우연히 두 연구자가 만나서 냅킨에다가 이런 저런 연구 아이디어를 적어보다가 그 길로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그래서  재조합 인슐린을 대량생산해서 돈을 왕창 벌 수 있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와, 맥주 마시면서 사이언스 얘기 하면 기깔나게 멋있겠다." 라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얼마 후에, 나는 생명과학 논문을 읽는 대외활동에서 최종발표를 다같이 준비할 일이 있었다. 어쩌다보니 맥주집에서 노트북 키고, 다같이 발표를 준비했다. 발표 내용이 뭐였는지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와 오늘 다들 진짜 멋있었다.." 라는 뿌듯함으로 맥주집을 나왔다는 기억만 난다.


일상 속 본업의 나도 있어보이려고 한다. 실험실 생활 4년차까지는 굳이 실험복(랩코트)을 입지 않고 실험을 했다. 그냥 평상복에다가 슬리퍼 신고. 편한 의상으로 실험했다. 랩코트를 잘 입지 않았던 이유는 소매가 늘어져서 실험할 때마다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랩코트 없이 편하게 실험을 하던 중에, 갑자기 실험실 안전점검이 찾아왔다. 실험실 안전점검은 실험실에 위험한 요소들은 없는지, 실험자들은 안전하게 실험을 수행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이 안전점검을 할 때는 꼭, 랩코트와 운동화를 착용해야 한다. 안전점검 때문에 소매가 잘 고정되는 랩코트를 받아서, 그 랩코트를 몇 번 입고 실험을 했다.


그런데 의외의 효과가 있었다. 랩코트를 입고 있으니까 실험 노동자가 아니라, 주체적인 연구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부의 과학기술 홍보 영상에 나오는 연구자가 된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장인, 전문가, 지식숙련자, 박사(과정)의 느낌이 랩코트에 의해 시각적으로 보여지니까 꽤 기분이 좋았다. 저 먼 미래에만 존재하는, 불분명한 이상적인 과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거울 앞에 바로 보이는 그럴싸한 연구자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랩코트를 매번 착용한 채로 실험을 하고 있다.



덧1.

사실, 랩코트를 입음으로써 안전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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