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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gsungg labnote Sep 04. 2024

린튼아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폭풍의 언덕>

★★★



<폭풍의 언덕>을 읽고, 두꺼운 세계 고전은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에 금이 갔다. 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캐서린과 결혼하지 못해서 분노한 집착광공 히스클리프가 복수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요약해보니, 세계 고전문학은 매일매일 방영되는 K-아침드라마를 당시의 시대상에서 구현해 놓았을 뿐이었다.


"전에는 워더링 하이츠에 가는 것이 잘못인 것 같았는데, 이젠 가지 않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생각됐어."

린튼을 만나러 몰래 워더링 하이츠에 가는 캐시의 대사.




소설은 히스클리프, 캐서린, 에드거 등 1세대의 자식들인 2세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언쇼는 워더링 하이츠에서 글을 배우지 못하고 농장 일을 하며 자란다. 캐시는 캐서린과 에드거의 딸로, 캐시를 낳다가 캐서린이 죽는다. 린튼은 이사벨라와 히스클리프의 아들로, 이사벨라가 죽고나서 히스클리프 아래에서 자란다. 어린 캐시는 고운 모습의 린튼에게 호감을 가진다. 하지만 린튼은 히스클리프 아래에서 소심하게 자라며 캐시와 린튼의 만남은 어려워만 진다.


나는 1세대보다 2세대의 이야기에 이입해서 소설을 읽었다. 1세대의 남녀주인공인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제정신이 아닌 캐릭터들이라서, 1세대의 이야기는 현실 저 너머의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이 감상했다. 다행히도 2세대의 캐시, 린튼, 언쇼는 그래도 주위에서 한 번은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 캐릭터들이었다.



"굉장한 사랑이로군요. 캐시 아가씨가 지금까지 린튼 도령님을 만난 것은 두 번 다 합해서 네 시간도 채 못 돼요!"


가정부 엘리가 사랑 편지를 쓴 캐시를 다그치며하는 대사



이 때의 캐시는 린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고운 머리카락을 가졌고, 조용한 성격을 지녔고, 나이가 살짝 어리며, 병약미가 있는 귀여운 남자애. 캐시는 린튼을 이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둘은 얼굴만 조금 보고, 잠깐의 대화만을 나누고 호감을 가진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괜한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마스크를 끼고 있는 사람들의 입매에 대해 좋게 상상하면서 호감도가 높아지기도 하고. 소개팅에 나가기 전에 상대방에 대해 이런저런 기대감이 부푸는 것과 마찬가지다.


집안의 반대로 캐시와 린튼이 만나지 못하고 있을 때, 둘은 편지로 대화를 나눈다. 아마 상대방의 호감을 사기 위해 보여줄만한 적당한 이야기들과 글솜씨의 편지가 오갔을 것이다. 그 이후에 캐시와 린튼은 점점 자주 만나게 되며 이런 저런 즐거운 이야기를 한다. 평화롭게 누워있는 린튼의 천국과 빛나고 춤추는 캐시의 천국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사소하게 달라서 다퉜다고는 하지만 서로 잘 모를 때에는 좋은 이야기들만 나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해. 그리고 난 오늘 우리가 만난 일에 대해서 실망했다는 것만은 숨길 수 없어."

오랜만에 린튼을 만난 캐시가 실망하며 하는 대사.



캐시와 린튼이 모처럼 만난 날, 린튼은 잔뜩 기운 없는 모습으로 캐시와 대화한다. 사실 린튼은 그 전부터 소심하고 우울하고 병약한 모습을 계속 보여왔다. 린튼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캐시를 워더링 하이츠로 데려와서 결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린튼은 캐시를 워더링 하이츠로 데려오는 게 너무 버겁고, 한편으로는 홀로 돌아갔다가는 아버지에게 폭언을 들어야 하는 게 너무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린튼은 캐시와 만나던 시간동안 그 불안한 모습을 숨길 수 없었고, 캐시는 그런 린튼의 모습에 실망했다.


캐시가 린튼에 대해 잘 모르고 친해지던 중에 있을 때는 린튼의 좋은 모습과 장점들만 보였다. 하지만 린튼과 친해질수록 캐시는 린튼 본연의 어두운 모습과 불안함을 보기 시작했다. 캐시가 린튼에게 가지는 호감의 크기로는 린튼의 단점들까지 좋아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또는 린튼이 본인의 단점을 상쇄할만큼 매력적인 장점이 없었던 것 같다.


캐시와 린튼이 친해지면서 의도하지 않게 린튼은 본인의 단점들을 캐시에게 내보였다. 나는 다른 사람과 적정선으로 친해지면 의도치 않게 내 단점을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긴밀하게 가까워지는 사람들에게는 의도적으로 내 단점을 말하기도 한다. 나도 사회생활하며 사람들에게 자신감이 넘치고, 호감으로 보이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찌질하고 불안한 모습이 있다. 그런 불안한 모습을 숨기고만 있으면 내가 너무 답답하고 속앓이만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만 나의 찌질하고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나의 불안을 모두 털어놓아도 나를 떠나지 않고 계속 좋아해줄 것이라고 상대방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분의 마음은 같은 목표를 향했던 것이지요. 한 사람은 상대방을 사랑하고 인정해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고, 그 상대방 역시 사랑하고 인정받으려고 결심했으니까요.


언쇼와 캐시의 사랑에 행복해하는 엘리의 대사



캐시가 린튼을 향한 정이 뚝 떨어진 이유는 린튼이 본인의 소심함을 극복할 생각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빠에게 휘둘리며 징징대기만 할지, 캐시는 린튼에게 지쳐버렸다. 캐시에게 언쇼는 다르게 다가왔다. 망나니같던 첫인상과 함께, 무시하지 말라면서 폭력적인 모습을 주기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과는 대비적으로 더듬더듬 글을 읽는 모습과 워더링 하이츠에 갇혔을 때 식사를 챙겨준 모습도 가끔씩 보였다. 캐시는 언쇼에 대한 기대감이 이미 없는 상황에서 언쇼의 괜찮은 면모를 봤다.


언쇼는 본인이 글을 읽지 못하는 데에 열등함이 있었다. 캐시가 언쇼에게 멍청하다고 하면 언쇼가 삐쳐서 화내기도 했지만, 언쇼는 캐시에게 관심과 호감이 있었다. 그래서 언쇼는 방에 책을 비치해두고 읽어보기도 하면서, 글을 배우고자 하고, 캐시에게서 환심을 사고자 하기도 했다. 캐시와 언쇼가 서로 삐쳐서 말을 제대로 하지 않다가, 언성을 높여 싸우게 된 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미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언쇼는 본인의 단점을 보여줬지만, 그 본인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모습 또한 보여줬기 때문에, 언쇼를 향한 캐시의 마음이 호감으로 바꼈다. 누구에게나 찌질하고 불안한 면이 있지만, 그 불안함을 딛고 잘 될 거라는 의지가 있고, 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에게 호감이 간다. 




나의 찌질함과 불안을 상대방에게 드러낸다는 건, 이런 단점들을 내보여도 상대방이 나를 계속 사랑해주리라는 믿음이 있다는 의미다. 즉, 그만큼 내가 상대방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그런 상대방이 나를 계속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나의 불안감과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나의 노력을 도와주고 응원해주는 상대방을 만나 사랑하고 싶다.



"하여튼 에드거와 결혼할테니까. 내가 결혼을 승낙한 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말해줘"

히스클리프에 대한 호감을 제쳐두고 에드거를 선택한 캐서린의 대사.



"전에는 그 곳에 가는 것이 잘못인 것 같았는데, 이젠 가지 않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생각됐어."

워더링 하이츠로의 방문에 대해 고민하던 캐시의 대사.



"우리도 들을 수 있게 읽어달라고 얘기해봐, 질라(가정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해 죽겠어. 캐시가 읽는 걸 들으면 재미있을 거야! 내가 그랬다고 하지 말고 질라가 듣고 싶다고 말해 보란 말이야."

캐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질라에게 말하는 언쇼의 대사.




덧. 린튼처럼 병약하면 사랑도 도망갑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횐님들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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