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물물리학을 연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Biophysical chemistry, 생물리화학을 연구한다.
생물학이면 생물학이고, 물리학이면 물리학이고, 화학이면 화학일 것이지. 생물리화학이라니. 이 분야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은 '이 무슨 김피탕같은 학문인가?'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생물학도 연구하고, 물리학도 연구하고, 화학도 연구하는 것이냐는, 전공 소개 후에 뒤따라오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단백질의 결합이 열역학적으로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 효소의 반응속도가 확산속도보다 빠른지 느린지, 자기장 내에서 단백질이 반응을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단백질의 구조가 양자역학적으로 옳은지 틀린 지, DNA에 단백질이 결합하는 양상이 수식적으로 설명 가능한지를 연구한다. 단백질은 생물학의 영역이지만. 열역학, 반응속도, 양자역학, 수식 따위는 물리학의 영역이고, 이 두 영역은 화학으로 이어져있다.
우리 연구실이 생명과학부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여타 연구실과는 다르다. 연구하는 물질은 이온이나 아미노산 분자 따위의 화학이고, 연구하는 방법은 열역학, 정전기적 인력 같은 물리고, 연구의 목표는 선택적 유전자 조절이라는 생명과학이다. 세포를 배양한다거나 모델생물을 키우지 않는다. 통계적으로 유의하다는 *표시 대신에 물리 수식이 한 바닥 가득 채워진 논문을 읽는다. 우리 연구실의 목적은 치매환자의 증상을 완화시킨다거나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데 있지 않다. 우리 연구실은 기술의 개발보다는 자연의 비밀에 대해서 탐구한다. 그래서 그 홍씨네 아들내미는 박사한다는데 뭐 공부한다고?라고 물어보면 그냥 생명과학, 물리학, 화학 모두 공부한다고 얘기한다. 일반인들에게 단백질도 얘기하기 어려운데, 열역학 얘기는 더욱더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다.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으로 연구비 제안서를 작성할 때, 우리 연구실은 연구의 활용방안 파트에 작성할 건덕지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딱히 돈이나 기술이 되는 연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연구실은 굉장히 기초적인 자연과학을 다룬다.
생물물리학은 생명과학 중에서 마이너한 분야다. 생물물리학은 암세포학, 발생생물학, 신경과학, 등등 이름만 들어도 핫해보이는 분야는 아니다. 한국 연구진들은 생물물리학을 많이들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신약이나 기술 개발이 아닌 생명과학 연구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동종업계 연구자가 드물다. 논문을 읽다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직접적으로는 모르더라도 한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이다. 그에 따라오는 장점으로는 스쿱, 다른 연구자가 내 연구를 먼저 발표하는 걱정은 적다. 스쿱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스쿱도 당한다. 장점이 사라졌네... 단점으로는 이 분야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내 연구가 중요하다고 백날천날 떠들어봤자 쇠귀에 경읽기라는 점이다.
https://youtu.be/FwBaFDAWEEE?si=IiMzSSv9eu9vyv9-
포스트닥터 시절의 논문부터 눈여겨본 최정모 교수님의 생물리화학 강연
요즘 생명과학 트렌드 중 하나는 liquid-liquid phase separation (LLPS) 현상이다. LLPS는 특정 단백질들이 고농도로 뭉친 방울이 세포질과는 섞이지 않는 현상이다. 현미경으로 확실히 보일만큼 세포 안에 단백질이 방울로 뭉쳐있으니까 뭔가 중요한 거 같기는 한데. 이게 어떻게 뭉쳐져 있는지 설명이 어렵다. 굳이 단백질들이 뭉쳐있지 말고 질서 정연하면 안 되나? 방울 안에 들어오는 단백질이랑 안 들어오는 단백질은 어떻게 구분하지? 생물학적 신호가 어떻게 단백질 방울을 유도하는 거지? 생물학자들이 LLPS 방울에 대해서 여러 질문을 던졌다. (일반인들은 크게 궁금하지 않겠지만)
생물학자들의 LLPS 방울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생물물리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굳이 단백질들이 뭉쳐있지 말고 질서 정연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질서 정연할 때의 엔트로피로 열역학적 자발성을 비교해야 한다는 물리학적인 답변이 필요하다. 방울 안에 들어오는 단백질이랑 안 들어오는 단백질은 어떻게 구분하지에 대한 질문에는 여러 단백질의 구조 및 아미노산 서열에 따른 원자 수준 특징으로 방울 여부를 결정한다는 화학적인 답변이 필요하다. 생물학적 신호가 어떻게 단백질 방울을 유도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생물학적 신호가 유발하는 화학적인 변화를 찾아야 한다는 생물학적인 답변이 필요하다. 위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분야를 다룰 수 있는 생물물리학을 공부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서야 생물물리학의 중요성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본다. 내가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을 때에도 LLPS 방울과 생물물리학을 향한 관심이 유지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 생물물리학이 다시 주목을 받는 때가 오지 않을까.
https://youtu.be/vzSruYQINQw?si=4Xm5IHeAz_Id6thB
생물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이 연구실에 입학한 건 아니었다. 학부생 시절에는 마우스 실험을 꽤 오래 했고, 다른 연구분야에 흥미가 있었다. 그래서 1년 차에 실험할 때는 ' 나도 마우스랑 세포 키우고 싶다'라는 부러움도 있었다. '앞으로 다른 기업체/연구소에서 세포도 키워본 적 없는 나를 채용할 가능성이 있을까?'라는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공부를 3년 정도 더 해보니 생물물리학 연구진은 전 세계적으로 얼마 없었다. 제대로 하는 연구자는 더 적었다. 그 순간 꼼수같은 발상이 떠올랐다.
내가 생물물리학 분야에서 조금만 잘해도 1등 할 수 있겠다.
생명과학 박사 중에서 FACS, cell imaging 하는 연구자는 많지만, 물리/화학/수학적인 사고를 가진 전공자는 나 밖에 없을 것이다. 생명과학 기업체에 생물물리학 전공자의 TO가 많지는 않겠지만 어쩌다 TO가 나면 그 자리는 내가 가져가겠다는 공산이다.
"요즘 다들 유행따라서 저 분야를 하는데 이거 때려치우고 나도 저 분야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하고 있는 이 분야가 경쟁력이 없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은 조금 덜어도 좋겠다. 내 분야를 잘하면 언젠가는 내 시대가 온다. 걱정할 시간에 내 분야에서 내 경쟁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내 전공의 붐이 왔을 때 성공을 쟁취할 수 있다. 그니까 이 글을 읽는 모두는 각자의 전문성을 열심히 연마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생물물리학은 제가 박사로 전문성을 갖추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