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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Oct 04. 2024

알몸은 보여줘도 신상은 안 알려주는 사이


 

올 것이 왔다. ‘언젠간..’ 막연히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닥치니 어떻게 해야 잘 빠져나갈지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이번주 금요일 7시 회식장소 알려드립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은 참석하셔서 같이 즐거운 시간 보내요!”

 

 

 

 수영이 좋았다. 혼자 하는 운동이라서 좋았다. 다른 사람들이 불쑥 들어올 여지가 많은 다른 운동들과는 달리, 수영은 철저하게 혼자만의 감각에 집중해야 한다. 거울이 없기 때문에 거울 너머의 다른 사람은커녕 나 자신조차 볼 수 없다. 물속으로 뽀글뽀글 들어가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도 없다. 앞으로 뒤로 나란히 나란히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가야 한다. 이런 점이 좋았다. 많고 많은 시간대중에 새벽이 좋았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수영이 끝나면 제 갈길을 가야 한다는. 절대로 붙잡을 수 없다. 커피 한 잔? 밥 한 끼? 술 한 잔? 누구도 당장에 권할 수 없다. 출근이 바쁘다. 강습이 끝나고 다 같이 손을 잡고 “아자! 아자! 파이팅! 수고하셨습니다!” 외치자마자 서둘러 물속을 빠져나가도 그리 눈에 띌 일도 아니다. 출근이 바쁜 사람이다.

 

 나는 어쩐지 익명성이라는 가면이 좋았다.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많은 탓에 기대만큼 익명으로 살 진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나의 외형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뚜렷하게 기억나건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었다. 나는 평소엔 포니테일을 하고 다니는 초등학생이었으나, 그날은 어쩐지 양갈래를 했었다. 아마 TV 만화영화의 누군가를 따라 했을 것이다. 내가 포니테일이 아닌 양갈래 머리를 했기 때문에 문방구 사장님이 나를 몰라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짝이는 왕 눈, 빨갛고 세상 요란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이들 조차 변신 후 옷만 바뀐 모습도 아무도 못 알아보더라. 심지어 나는 저들보다 더 평범하게 생겼는걸. 하지만 문방구 사장님이 나를 알아보는 눈치였고, 놀란 나는 “근데 저 누군지 알아보신 거예요?”하고 물었다. 문방구 사장이란 무엇인가. 기막힌 눈썰미로 먹고사는 직업이 아닌가? 손님 기억하기가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노하우일 텐데. 어른이 되어서야 이 사실을 깨달았다. 껄껄.

 

 그런데 수영장이란 무엇인가. 운동할 때는 철저하게 혼자일 수 있지만, 입수까지의 과정은 나체 그 자체이다. 20년 지기 친구들과도 여즉 내외를 한다. 야 너 씻고 벗은 채로 그냥 나오지 마라, 옷 입고 나와라, 옷 갈아입는 거 보지 마라, 안 봐 내가 너를 왜 보냐 헛소리하지 마라, 네가 뒤돌아 있어라, 안 본다고 짜증 나 진짜.... 고성과 짜증과 실소가 오간다. 그런데 다짜고짜 알몸을 보이는 사이가 우리네 수영장 풍경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를 내어주고 나머지 전부를 숨기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나의 이름과 나이와 직업과 사는 곳 기타 등등은 모두 시크릿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친목을 다지잔 내용의 문자를 받았을 땐 마음이 쭈굴쭈굴해진다. 이번에도 내가 또 너무 지레 겁을 먹었을까? 그깟 이름, 나이 그런 신상이 뭐라고. 마침 회식 시간은 금요일이었고, 대체로 나는 금요일엔 항상 스케줄이 있으므로, 지금까지 있었던 총 2번의 회식자리에는 안타깝게도(?)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나도 궁금은 하다. 내 또래의 저 여성분은 몇 살일까? 저 친구분은 왜 수요일에만 결석하시는 걸까? 저 아저씨는 어떤 일을 하시길래 저렇게 근성이 좋으실까? 하지만 회식 자리에 나가는 순간 나의 정보도 캐내어질 것을 알기에 참석을 고사한다.

 나는야 묘령의 H여인. 그저 접영을 굉장히 잘하고, 수영복을 많이 갖고 있는 젊은이로만 알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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