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의 창끝 전투력,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일하다
1. 전환의 시작
2024년 12월, 나는 다른 전우들보다 뒤늦은 시기 군복을 벗는 준비를 시작했다. 15년 동안 정훈장교로 복무하는 동안 소속된 부대의 정신전력교육과 문화예술 그리고 홍보 및 공보 업무를 수행하며 조직의 대내외 소통을 담당해 왔다. 국방이 가지는 정책의 큰 틀 안에서 이를 실현하는 사여단급 부대의 구성원에게 당위성을 부여하고, 전투력을 끌어올리며, 소진된 사기를 다시금 진작시키는 일은 지휘관만큼이나 정훈장교에게 핵심적인 임무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익숙한 환경을 떠나, 사회라는 새로운 무대로 나아가야 했다.
그런 내게 짧지만 4개월 간의 전직지원 교육 기간은 나의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자,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수많은 직업군이 소개되고 민간 기업의 사례가 공유됐지만, 나의 시선은 늘 ‘공공성’이라는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고, 조직의 목표가 개인의 삶을 향할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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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엇을 할 것인가 – 방향을 찾는 시간
2022년, 그 무렵 나는 지방자치법 전부개정과 함께 새로 생긴 ‘정책지원관’ 제도에 주목하고 있었다. 기초의회에서 전문 인력이 의정활동을 실질적으로 보조한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지방의회가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평생 함께하길 바랐던 군복과 계급장이었지만, 이 꿈이 좌절되었을 때는 튼튼한 국방만큼 튼튼한 민주주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로 ‘정책지원관’을 가슴 한 켠에 새겨두게 되었다.
때문에 더 이상 군복과 계급장 그리고 전투화와 전투모가 나의 제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그 첫 시작을 어디로 설정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단연코 고향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태어난 곳. 목포.
많은 이들이 국회나 광역의회를 선호하고, ‘작은 조직보다 큰 조직이 낫다’고 말한다. ‘큰 조직에서 작은 조직으로 이직은 쉽지만, 작은 조직에서 큰 조직으로 가는 것은 어렵다’ 그것이 현실이라는 선배들의 크나큰 조언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생각했다. 국방은 창끝 전투력, 지방은 풀뿌리 민주주의다. 지방사무를 모르고, 국가사무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주권이 보장되는 나라를 꿈꾼다는 공무원이 그 현실을 외면한 체 자신의 이익에 빠지는 것만큼 모순적인 모습이 더 있을까?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은 지방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고 믿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군에서조차 진급을 위해 작은 조직을 꺼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더욱 확신했다. 나의 다음은 반드시 ‘지방’이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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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의 경험은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
군이라는 특수한 조직에서, 구성원의 공감을 얻어 조직의 방향을 함께 만드는 일은 항상 내 역할이었다. 위기 상황 시 대외적으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소통하는 방식, 보고서를 통해 정책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기술은 모두 체계적인 훈련과 실전을 통해 쌓아 온 나의 자산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경험들이 민간에서 얼마나 통할 수 있을지 걱정도 있었지만, 정책지원관이라는 역할은 내 경험과 매우 유사한 결을 가지고 있었다. 지방의회는 전문인력의 부족, 자료 준비의 한계, 의정 역량의 차이 등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는 이 틈을 메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느꼈고, 그 가능성은 내게 명확한 목표가 되었다. 아직은 시작 단계이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적어도 내 스스로 창피하지 않도록 설정한 방향성을 유지하며 가고 싶은 작은 욕심을 앞세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나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는지 찾아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 감사의 손을 떨쳐내고 이곳에 온 나로서는 물러설 곳이 없다. 아니 물러서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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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책지원관이라는 기회
2025년 3월 31일, 나는 정식으로 전역했다. 전역을 앞두고 지원한 시의회의 공고문에 적힌 ‘정책지원관’이라는 문구는 내 심장을 뛰게 했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지원서에는 나의 군 생활 경험과 함께 정책지원관이라는 역할이 내게 왜 적합한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단순한 행정능력이 아니라, 기획-설득-전달-조율이라는 일련의 정책 흐름 안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의정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담아냈다. 그리고 이 내용을 기준으로 삼고 면접에 충실히 임했다. 그 결과 2025년 5월 7일. 전역 후 37일 만에 나는 목포시의회 정책지원관으로 임용되었다. 그날의 선서는 내 인생의 새로운 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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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시, 목포에서 시작하다
첫 출근 날, 목포시청에 들어서면서 나는 오래된 기억과 마주했다. 어린 시절 이모집에서 얹혀살며 가장 좋아했던 강아지 인형. 지금은 재개발로 없어진 용해아파트, 그리고 그 자리에 터를 잡은 신안인스빌. ‘하나님‘이라고 부르던 목사님의 모습. 화원에서 목포로 이사 오신 외할머니가 후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던 부영아파트. 큰아버지의 집, 동아 아파트 옆 공사장의 인디언집 모양의 아지트. 어머니가 임상병리사가 되기 위해 학업에 매진하셨던 대학, 목포과학대. 고향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울림이었다. 그저 모두의 응원을 담아 온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꼭 갚겠다는 다짐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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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앞으로의 다짐
지금 나는 새로운 정체성을 살고 있다. 군인으로서의 시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 단단함은 지금 목포시의회 정책지원관이라는 자리에 스며들어 있다.
나는 단순한 보조자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 의제를 스스로 탐색하며 정책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자 한다. 자료의 정합성, 의정활동의 논리 구조, 주민과의 소통방식 등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앞으로도 나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변화’를 믿고 싶다. 비록 나의 힘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나의 눈과 귀 그리고 손에서 주민의 삶을 바꾸는 작은 정책 하나가 시작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걸어온 그리고 걸어갈 길의 보람이라 생각한다.
고향 목포는 내게 뿌리였고, 이제는 미래다. 군에서 시작된 공공의 길은 이제 목포라는 지역에서 더 깊어지고 있다. 나는 오늘도 그 길 위에서 질문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지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하루하루가 더 큰 대한민국, 진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킬 나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