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충성대, 예복을 입기까지
영천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3사관학교 정문을 들어섰을 때만 해도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가입교 후 기억은 늘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먼저 떠올리는 쪽으로 기운다.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매서웠고 공기는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곳을 떠올리면 몸이 먼저 긴장한다. 그렇다고 그 시절을 내 인생의 최악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여렸고, 미숙했다.
나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날이 섰고, 사람들의 말과 표정에 과도하게 반응했다. 언제나 기대는 컸고, 실망은 늘 그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래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용기도, 돌아갈 곳도 없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버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당시, 한 동기생은 교대를 다니다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언제나 조직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라졌다. 생도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다시 원래의 학교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교대니까 그랬겠지.”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곳을 떠날 수 있었던 그의 결단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한 번 들어온 길을 끝까지 가야만 한다고 믿던 내게, 그의 선택은 용기처럼 보였다. 지금쯤 그는 학생들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좋은 선생님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훈련 성적도, 인간관계도 중간쯤 어딘가에 머물렀다. 친한 후배에게 내게 ‘찐따였네“라는 말을 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던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린다. 부정하기엔 너무 분명했던 어제의 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고, 혼자 생각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물론, 그 본성이 지금이라고 없겠는가? 그나마 좀 더 사회화된 내가 있을 뿐이다.
지금도 연락이 이어지는 동기들에게 당시의 나를 물으면 비슷한 말이 돌아온다. 고집이 셌다, 조금 이상했다, 조용했다, 착했다. 누군가를 정확히 규정하기에는 부족한 말들이지만, 그 말들 사이에서 나는 대략의 내 모습을 짐작한다. 그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임관 후, 같은 중대 동기들이 모여 술을 마시던 날이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시작된 자리였고, 분위기는 금세 풀어졌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한 동기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홍진선이 정도는 해보잖아.”
그 말은 칼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러워서 더 오래 남았다. 나는 말없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 말을 한 동기의 얼굴, 옆에서 멋쩍게 웃던 사람,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던 사람의 표정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직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대해 기대하는 일을 조금씩 줄여 나갔다. 그 무렵 나는 어렴풋 이해하게 되었다. 세상은 언제나 공정한 경기장이 아니며, 모든 싸움이 같은 규칙으로 치러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신이 없는 자리에 나서지 않는 법,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지나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지혜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
어느 영화의 한 대사가 머리에 와 꽂힌다.
생도 시절, 내 주변에는 각자 자기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고집이 있었고,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려 애썼다. 지금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조직에 남았고, 누군가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같은 길을 오래 걷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에 맞는 길을 찾는 일이라는 것을. 최근 함께 일하게 된 과장도 이따금씩 소주를 한 잔 할 때면 내게 같은 말을 하신다.
“아야, 니거나 잘해야.”
“사람은 나한테 잘하면 좋은 거고, 못 하면 나쁜 거여.”
“조직이란 게, 다 그런 거야.”
그의 말은 조언이라기보다, 오래전 내가 알았어야 할 문장들처럼 들린다. 나는 이제 예전처럼 모든 일에 마음을 쏟지 않는다. 의미를 붙일 곳과 흘려보낼 곳을 조금은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남의 몫에 개입하지 않고, 내 몫을 넘기지 않는 일. 그것이 내가 긴 시간을 돌아 이 자리에 와서 얻은, 몇 안 되는 태도다. 그럼에도 본성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적어도 그 시절, 내 친구라는 사람들은 그 부분에서 만큼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입교 후. 일상은 이전의 삶과 많이 달랐다. 기상나팔과 함께 하루가 시작됐다. 세면장과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늘 급했고, 집합 5분 전, 3분 전을 알리는 방송은 그 급함에 박자를 더했다. 손끝이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얇은 가죽 장갑을 끼고, 짧은 머리 위로는 체육모를 눌러썼다. 귀와 뒷목을 덮는 귀덮개, 체육복 위에 걸친 패딩까지. 지금에 와서 떠올리면 꽤 우스꽝스러운 차림이다. 그 순박한 모습으로 우리는 가입교 기간을 버텼다.
기초군사훈련이라 불렸던가. 처음 일주일은 이런 아침을 맞이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어지는 1.5km 구보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팔 굽혀 펴기와 윗몸일으키기는 살면서 이만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오리걸음은 또 얼마나 많이 했던가. 결국 내 왼쪽 무릎은 지금도 90도 이상 굽히기 어렵다. 부러진 것도 아니고, 연골이 닳아 없어진 것도 아니다. 단순한 염좌가 만성이 되어 남은 불편함이다. 차라리 크게 다쳤다면 쉬어갈 명분이라도 있었을 텐데, 애매하게 남은 통증은 지금까지도 나를 따라다닌다.
영천의 추위 때문이었는지, 평생 해보지 않던 체력단련 때문이었는지 밥은 유난히 맛있었다. 간혹 식사 도중 훈육이 들어오면 허탈함이 밀려왔지만, 우리는 그래도 양반이었다고 나중에야 알게 됐다. 다른 중대는 시도 때도 없이 밥줄이 끊겼다고 했다. 기초군사훈련 기간 중 중간 체력 측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2분 안에 팔 굽혀 펴기 90개. 나는 간신히 넘겼고, 어떤 동기들은 100개를 채웠다. 윗몸일으키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1.5km 기록만은 분명하다. 4분 30초. 내가 빠른 것은 아니었다. 다른 동기들은 더 빨랐다. 선배들이 놀라 “천천히 뛰라”라고 외칠 정도였다. 그 말을 들으며 더 신이 나 뛰던 동기들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지만, 그때의 우리는 그저 순수했다.
결국 이런저런 기억들이 겹치며 ‘동기’라는 말은 하나의 연대가 된다. 모든 나쁜 감정을 흐릿하게 만드는 힘.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아마도 그 시절 대단하게 느껴졌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 별것 아닌 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렸고, 미숙했다. 동시에 성장의 여지는 충분했다. 다만 나는 그 성장을 자주 회피하며 더딘 성장기를 보냈다. 그런 내게 영천의 바람은 더 날카로웠다. 그 바람 앞에 서 있던 나는 늘 위태로웠다. 기초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파견 생도, 한 기수 위 선배는 몇 차례나 내 퇴학을 막았다고 한다. 그는 지금 중령으로 진급해 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 퇴학 계속 말린 거, 후회한 적도 있다.”
무릎을 다치고, 적응하지 못한 채 고집으로 버티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감사한다. 내가 원해서 선택한 길이었다. “군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길을 시작조차 못 했다면, 더 큰 후회로 남았을 것이다.
2008년, 우리는 정식 입교를 앞두고 분열 연습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우로 어깨총’을 한 채 왼팔을 힘차게 들어 올리며 전진하는 동작. 중대가 하나로 움직이는 순간. 지금 떠올려도 그 장면은 선명하다. 역시나, 그때도 ‘동기’라는 말은 마법 같았다. 나쁜 기억은 사라지고 좋은 장면만 남는다. 입교 전 마지막 연습이었을 것이다. 예복을 입고 분열을 마친 뒤 연병장을 빠져나오던 중, 내 앞을 가로막던 깃발을 반사적으로 뛰어넘었다. 현장에서는 웃음이 터졌지만, 돌아가서는 호되게 혼났다. 지금에서야 인정한다. 그때 나는 너무 들떠 있었다. 좋아서, 그저 펄쩍 뛰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예복이 아직 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향에 가면, 오랜만에 꺼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