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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진 Apr 27. 2024

문화예술경영과의 만남

빈 캔버스 위에 그리는 내일.

아름다움이 좋아 그림을 그리고, 기록이 좋아 사진을 찍고 글을 썼습니다.

과학이 재미있어서 생명공학과를 전공하고, 나와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 상담심리학을 졸업했습니다.

지금은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으로 문화예술경영 대학원에 재학 중입니다.



중학교 시절, 난 예술에 대한 열정에 반해 자신감은 부족했고, 애정에 비해 끈기가 부족했다. 고등학교 진학 전 부모님께 예술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말했다. 허락을 받지 못했다. 부모님께서는 평범한 삶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셨다. 여기서 평범한 삶이란, 고등학교 3년 간 열심히 공부해 대학교 입학하여 때가 되면 병장 만기 전역 후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세상에 쓸모를 인정받으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 후에는 안정된 가정을 꾸려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 부모님의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라는 격언 앞에서 설득에 실패한 이후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최애 과목은 '생물'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어릴 때부터 우주, 화학, 생명과 같은 단어들이 곧 잘 나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생물시간에 세포, 식물의 단면 등을 그릴 때가 좋았다. 제법 잘 그려냈다. 자랑스러운 듯 그림을 앞에 두면 왠지 모르게 자존감이 올라가곤 했다. 미술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남들보다 잘한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만, '미술로 생계를 이어갈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는 확신을 갖지 못했을 뿐. 어쨌거나 고3이 되어서는 생명공학과 진학에 반대하는 부모님과 마주했다. 중 · 고등학교 시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드린 적이 없었던 탓에 믿음이 적으셨을 테다. 그럼에도 제법 확신에 찬 목소리로 진학을 주장하고는 당당하게 생명공학과에 입학했다. 복수전공으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면서 실험실과 연구소에서도 일했다. 열심히 공부한 3년이 무색하게도 졸업은 하지는 못 했다. 3학년을 마치고, 타 대학으로 편입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평생을 바치고 싶은 일은 아니었나 보다. 편입한 대학에서는 상담심리학과 군사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장교로 복무했다.


군 생활은 내게 참 귀중한 시간이었다. 업무 중에는 장병 사기진작을 위한 '문화예술' 업무를 추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동아리 운영 및 발표회', '문화예술체험', '현장학습 교육', '문화예술 공연 관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병영문화 활성화와 함께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조직과 개인의 성장이 중요한 시대에서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이상향을 일치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나 스스로 자신 있게 일을 했지만 아쉽게도 주목받지는 못 했다. 그래도 좋았다. 분명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진1. 작품 '시선 I' 앞에서 촬영

그리고 2년 전, 그 기회가 찾아왔다. 부대에서 장병들과 함께 '회화'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면서 그림 그리는 것에 다시 도전하게 된 것이.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다. 작품 전시까지 진행하려 한 욕심이 과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데는 주변의 응원과 도움 덕분이다. 부대 행사와 연계해 전시도 했다.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에도 많은 일들을 이겨내고, 못해낼 것만 같았던 일을 이루어냈을 때 정말 기뻤다.

사진2. 작품 '시선 II' 앞에서 촬영

두 점의 그림은 내 작품이다. 실제로 마주하면 작품의 크기가 제법 크다. 행사 이후에는 집의 안방과 거실에 각 각 배치시켜 두었다. 여담이지만, '시선 II'눈 집안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동자가 무섭다는 의견이 있어 현재는 리터칭 해서 눈매가 다소 부드러워진 상태이다. 내게 두 작품은 '해낼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주었다. 덧붙이자면, 공책이 아닌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낸 내 생에 첫 작품이다.


이 회화 동아리를 추진하던 시기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전역을 코 앞에 두니 미래가 불안했다. 군인으로서의 내 모습만 상상했는데 전역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나를 찾아왔다. 앞 뒤 따져 물을 것도 없이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사회에 뛰어들어야 한다면 그토록 마음에 그리던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문화예술이다. 마침 홍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이 입학생을 모집하던 시기였다. 가족과 지인들의 응원 덕인지 감사하게도 합격 통지를 받았다. 더욱 다행인 것은 코로나19로 오프라인 수업이 병행되던 시기였다. 필요하면 휴가를 내서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2학기를 지낸 후 오프라인으로 변경되었다. 현재는 4학기 째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고성에서 3시간 이상을 운전해서 서울에 도착했던 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어려울 때가 오히려 더 독했던 것 같다. 입학 전 건강상의 이유로 한 차례 수술을 마치고, 충분한 휴식 없이 학기를 지낼 때라 체력적으로 어려웠었다. 장거리 운전으로 수업이 끝나 집에 돌아오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고, 늦으면 새벽 2시나 되어야 귀가할 수 있었다. 병원 통원 진료와 대학원, 업무 사이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하게 불안한 오늘과 불투명한 내일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사이에 부족하지만 과제도 제법 충실히 해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부쩍 좋아진 건강과 좋은 생활 여건에도 요즘은 조금 느슨해진 것 같다. 살만해지니 불안한 오늘을 포기하지 못하고 더욱 강하게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포기할 수 없는 순간이지만, 변명하지 않으려 한다. 이해해 준다고 용납할 수는 없을 테다. 모두가 진심으로 살아내는 하루이기에 누군가는 내가 마주하는 하루가 매우 불성실해 보일 수 있으니.


그렇기에 나름의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브런치 작가'에 대한 도전은 문화예술경영을 공부하며, 스스로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은 실천이다. 2년 전, 삶에 대한 애정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기 위해 작가 등록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로 블로그를 통해 필요할 때마다 글을 쓰긴 했지만, 다시 도전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 부끄러운 나의 민낯과 마주했다. 나는 대학원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무엇을 느꼈는가? 전문가로 성장하고 있는가? 한 교수의 열정과 열망 그리고 애정을 보며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잊어버렸거나 혹은 잠시 놓아버린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렇게 오늘 첫 작품을 발행하며, 시간을 쪼개서 문화예술경영대학원을 통해 내가 느끼는 바들을 계속 기록하고자 한다.



빈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바르면 순식간에 마른다. 그 위로 계속해서 물감을 얹는다. 처음에는 엉성하고, 무엇을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점점 형태를 찾아가고, 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작품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간과 예산만 있다면 단색의 물감으로 모든 것을 덮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니면 도중에 붓질을 내려놓고, 영영 그 자리에 머무를 수도 있다. 어떤 결과물이 나와도 모두 작품임이 틀림없다. 다만, 작가의 자아실현인 동시에 대중으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의 첫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글들은 모이고, 또 쌓여서 언젠가 삶의 방향성이 될 것이다. 순간순간이 내 삶을 대변할 수 없지만, 수많은 순간들이 모여 결국 내 삶이 되듯. 하나의 작품이 나를 대변할 수 없지만, 수많은 작품들이 모여 곧 나를 대변하게 될 것이다. 1년 뒤에도, 2년 뒤에도 그리고 계속해서 더욱 먼 미래에도 새롭지만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문화예술과 함께 성장하는 내 모습을 기대해 본다. 예술에 대한 열정에 반해 자신감은 부족했고, 애정에 비해 끈기가 부족했던 내가 포기하지 않고 문화예술을 찾아 오늘에 이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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