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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Jun 15. 2024

그래서, 자연주의 출산 하셨나요? 2편

자연주의 출산 같지 않은 자연주의 출산기

  "남편분 퇴근하시면 저녁 몇 시라도 괜찮으니 출산센터로 잠깐 오셨으면 좋겠어요."


 자연주의 출산센터로부터 걸려온 전화. 집에서 병원까지는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진료도 없는 날짜에 갑작스레 오라고 하시니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올 수 있느냐가 아닌 오면 좋겠다는 조산사님의 말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남편과 늦은 저녁에 출산센터를 찾았다.


  조산사님이 무겁게 말을 꺼냈다. 지난주 태동검사에서 아기에게 자극을 주었는데도 움직임이 바로바로 나타나지 않아 걱정이 되셨다고. 아기가 자고 있는 경우 태동검사에서 그렇게 나타날 수 있으나, 2주 전과 비교해 거의 늘지 않은 아기 몸무게와 나의 낮은 혈소판 수치, 높은 혈압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임신중독증이 의심된다고 하셨다. 사실 엄마와 외할머니가 임신중독증 이력이 있기도 했다. 임신중독증이 아니라도 아기 상태가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예정일 전에 유도분만을 고려해 보는 게 어떨 제안하셨다.

  이제껏 남편과 자연주의 출산을 공부하면서 촉진제, 무통주사, 회음부 절개 없는 출산을 계획하고 준비해 왔던 터라 혼란스러웠다. 유도분만을 하게 되면 흐름상 무통주사를 맞을 확률이 높아진다. 일단 지금은 아기 태동이 잘 느껴지니 남편과 좀 더 의논을 해보겠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복잡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 것도 잠시, 한밤중에 눈이 떠졌다. 갑자기 배를 콕 누르는 느낌과 함께 '폭' 하는 소리가 났다. 직감적으로 양수가 터졌음을 느꼈다. 남편을 부르면서 몸을 일으키자 양수가 콸콸 흘러내렸다. 양수가 터지면 감염의 위험이 있어 24시간 내에 분만을 해야 한다.

  오늘이 행복이를 만나는 날이구나. 기대감과 두려움, 긴장감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미리 싸둔 출산 가방을 챙겨 남편과 집을 나선 조용한 새벽. 밤하늘에는 보름달 하루 전의 동그란 달이 떠있었다.

  "거봐, 보름달이 뜰 때 행복이가 나올 거라고 했지?"

  남편에게 기세 등등 하며 장난도 쳤다. 5월 말의 적당히 시원한 새벽바람이 불었다.

  "행복아, 돌아올 때는 우리 셋이서 같이 오자."

  약한 가진통이 오는 와중에 행복이와 약속을 했다.


  출산센터에 도착해서 내진을 해보니 자궁문은 2센티 정도 열린 상태. 통증의 강도는 괜찮으나 지속되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조산사님은 이 정도로는 24시간 내에 출산하기 어려우니 촉진제를 쓰는 게 어떨지 권하셨다. 참을 만한 통증이었고 머릿속으로 그려온 자연주의 출산의 그림이 있었기에 촉진제를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통증의 강도는 더 세졌다. 통증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산처럼 솟았다 내려갔다. 진통은 파도처럼 왔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진통이 올 것 같다는 느낌과 함께 스멀스멀 골반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가 갔다. 눈을 꼭 감고 출산 교육 때 배운 호흡을 하면서 통증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남편이 옆에서 골반을 눌러주는 마사지를 해주니 그나마 나았지만, 점점 통증이 세지면서 온몸이 떨리고 내뱉는 호흡이 고통의 신음소리로 바뀌어 갔다.

  조산사님이 내 상태를 보시고는 다시 한번 촉진제와 무통 주사 사용을 권하셨다. 여전히 24시간 이내 출산을 하기엔 지속시간이 부족하고, 중요한 건 출산의 방법이 아니라 행복이와 건강하게 만나는 것이라고 하셨다. 조산사님의 말을 듣는데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무통 주사를 맞으면 나는 통증에 무뎌지지만 그동안 아기는 혼자서 숨이 조여 오는 질식 상태에 놓인 채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엄마로서 도망가는 것 같아 행복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거기다 무통주사의 마약성 진통제가 행복이에게도 전해지는 것에 속상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상황상 행복이를 건강하게 만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했다. 나의 고집으로 행복이를 건강하게 만나지 못한다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연주의 출산을 같이 공부하면서 재밌었잖아. 그럼 된 거야. 과정이 즐거웠으니까 된 거야."

  남편의 말에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촉진제와 무통주사를 맞기로 했다.


  촉진제와 무통주사를 맞고 나서 출산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촉진제를 맞았기 때문에 태동검사기를 달고 누워있어야 했다. 하반신의 감각이 사라졌고, 스스로 소변을 눌 수가 없어 소변줄로 소변을 받아냈다. 내가 그렸던 출산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무통주사 약발이 점점 약해짐과 동시에 아래쪽으로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행복이가 내려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치골 쪽이 으스러질 듯이 아파왔다. 진통이 올 때마다 태동검사기 속 행복이의 심박수가 떨어졌다. 가만히 누워있을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덜덜 떨리고 고통에 몸이 저절로 베베 꼬였다. 남편의 팔을 잡고 버텼다. 그 순간 행복이가 배를 팡하고 차는 게 느껴졌다. 촉진제의 강한 수축에 심박수가 떨어지면서도 엄마 배를 차는 행복이에게 고마웠다. 엄마, 나도 힘내고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호흡을 하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떨어지는 행복이의 심박수를 보며 필사적으로 호흡을 하려고 했다.

  

  아기 머리가 보였다. 힘주기가 시작되었다. 진통이 올 때마다 아래쪽으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힘을 주었다. 진통이 심해서 오히려 힘을 주는 것이 시원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아기가 나오는 골반 입구가 작아서 어쩔 수 없이 회음부 절개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담당의 선생님이 오셨고, 몇 번의 힘주기 끝에 행복이를 만났다. 따뜻하고 말랑한 행복이가 내 배 위에 얹어졌다.

  "고생했어, 많이 힘들었지?"

  행복이와의 첫마디. 행복이는 우렁차게 울다가 남편과 나의 목소리를 듣더니 울음을 멈추고 눈을 뜬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뱃속에서 듣던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행복이와 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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