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지재 Jan 18. 2022

설악산 이야기 11.  K에게





뜬금없지만 피아노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UDT 훈련하는 내내 나는 무엇을 가장 힘들어했을까? 육체적 고단함? 지옥주? 밥걸이? 그 모든 것은 그저 고통의 편린일 뿐이었다. 수료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즉 ‘불확실성’만이 내게 유일한 고통이었다. 나는 나의 불확실성 앞에서 자연스레 나 자신의 실존과 대면하게 됐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그러한 일종의 존재론적 물음들은 군 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이 수료하고나서 먹고 싶은 음식의 목록을 수양록(일기장)에 남몰래 적어 내려가는 귀여움과도 본질적으로 같았다. 


훈련병들의 초코파이가 나에게는 피아노였다. 훈련 중 한계에 다다를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피아노의 소리가 떠올랐고, 흑건과 백건이 교차하며 뽐내는 피아노의 우아한 자태가 아른거렸다. 이 모든 훈련이 끝나고 혹시나 내가 대한민국 유디티 휘장을 무사히 달게 되면 반드시 전자피아노를 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꿈은 고비 때마다 나를 버티게 했던 원동력 중의 하나였다. 


부사관 훈련소를 거쳐 UDT 초급반을 수료하고, 공수교육과 전문화 과정(SQT), 그리고 대테러 교육까지 논스톱으로 마치는 데 정확히 1년이 걸렸다. 드디어 훈련소를 벗어나 개인 관사에 입주할 수 있었다. 당시 내가 훈련을 무사히 끝마쳤다는 사실보다도 피아노를 만질 생각에 더 설렜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미리 택배로 시켜 놓은 피아노를 관사 택배실에서 수령해서 방에 설치했다. (읽는 분들은 이쯤에서 택배를 해체하던 그 순간 나를 감싸고 있던 엄청난 두근거림을 함께 느껴야 한다.) 그리고 한없이 나대는 심장의 박동을 감추지 못한 채 조심스레 건반 하나를 툭, 눌렀는데, 그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아련함에 사로잡히며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이 소리를 듣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던 것이구나, 하고. 그러나 UDT 실무 생활을 하며 피아노를 연습하기란 쉽지 않았다. 실무 생활에 적응하기에도 바빴을뿐더러 야간 훈련이 연달아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랍으로 파병을 떠났다. 작전 특성 상 늘 새벽까지 이어지던 훈련은 실수 연발의 대환장파티였다. 막내 기수라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선배들에게 고통스러울 만큼 혼이 나곤 했다. 실탄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한 번의 실수로 팀원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으니 우리에게 실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막내들에게는 이 모든 시간이 지옥 같던 UDT 훈련보다 더한 지옥의 시간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또 한 번 나 자신의 실존과 눈물겹게 대면하는 시간을 매일 밤 찐하게 갖게 됐다.


그럴 때마다 떠올랐던 것은 이번에도 역시나, 피아노였다. 나는 피아노와 나 자신의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의 연결고리를 느꼈다. 한 번 자리잡은 미련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미련이 남을 바에는 한 번 할 때 제대로, 끝까지 해보자고 생각했다. 서울의 유명 재즈피아노 선생님을 모조리 수소문했다. 이후 귀국하자마자 주말마다 상경하여 강남의 교습실에서 재즈피아노를 배웠다. 내가 진해에서 강남까지, 주말 왕복 10시간을 과감히 도로에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재즈라는 장르 특유의 즉흥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재즈의 특성은 우리네 삶을 닮아있다고도 생각했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재즈 피아노의 선율을 들을 때마다 전율했다.


그러나 시간과 비용의 문제로 가까운 창원의 학원으로 옮기게 됐다. 나는 대부분의 의사 결정을 느낌과 직관으로 한다. 그것이 내 삶에서는 타율이 훨씬 높고 후회가 적었다. 이 창원의 학원은 작고 허름했는데 상담하던 형님에게서 느껴지는 사람됨이 좋았다. 다른 학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즉시 이곳으로 결정했다. 이 판단이 옳았음은 첫 수업에서 증명되는데, 그날 숙제가 하농 39번 스케일을 12KEY로 전부 외워서 연습해오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내 관점으로는 말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저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대한민국 UDT입니다만…”

“못해오면 등짝 몇 대 맞으면 되지요.”

나의 ‘쫄보스러움’을 단 한마디로 잠재우고는 호탕하게 웃어 제끼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아, 여기서도 희대의 보물같은 또라이를 하나 발견했구나 싶어 나는 진실로 행복했다. 여기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굳혔다. 


(12부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내가 유디티가 된 이유, 100만 부 팔고자 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