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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키자 Oct 26. 2019

해가 뉘엿뉘엿 지는 토요일 오후 5시 반

압구정에 볼일이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토요일 오후 5시 반.

토요일은 늘 꽉 막힌다. 꽉 막힌다. 아마 막히지 않는 날은 없을 것 같다.

강변북로는 늘 그렇다. 올림픽대로도 마찬가지다.


내비게이션의 도착 시간은 6시 20분. 아니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인가.

라디오를 켰다. 91.9메가 헤르츠에서 김지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샵의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이 참 좋았는데.

개그우먼 김미려가 게스트로 나왔다. 아이들 얘기를 했다. 아들이 콧구멍에 젤리를 넣어 숨이 안 쉬어져서 병원에 가서 응급치료를 했단다.

왜 그랬어?라고 물어보니, 젤리가 먹기 싫었다고 했다나. 그래서 콧구멍에 숨긴 거야. 아하, 숨겼구나.


차는 계속 막혔다.

주말에 차를 안 들고 나오겠다고, 수십 번 다짐했는데, 또 들고 올 물건이 많다는 핑계로 시동을 걸었다.

토요일 저녁을 실감한다. 이 많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꾸역꾸역 차를 몰아 6시 10분이 됐다. 이제 10분만 더 가면 도착이군.

300미터 앞의 성수대교 북단으로 진입하면 되겠다.

성수대교만 건너면 압구정이 나올 것이다.

성수대교 진입로 우측으로, 동부간선도로 진입로가 나왔다.

조심해야지, 안 그러면 동쪽으로 천호대교까지 간다고. 천호대교까지 가면 30분은 더 갈걸.

조심조심 움직였다. 300미터, 200미터, 100미터가 남아. 차선 2개가 보였다. 맨 오른쪽은 동부간선도로니까, 그 옆 차선은 성수대교로 가겠군.

맨 우측 옆 2차선을 타고 차를 서서히 움직였다. 어? 어? 우회전이네? 여긴 동부간선도로인데?

좌측으로 눈을 돌리자, 직진 차로로 성수대교 남단 진입로가 보였다. 찰나였다. 지금 차를 꺾으면 위험한가. 뒤차가 빵빵일까. 3초 찰나에 온갖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난 동부간선도로를 탔다. 내비게이션을 화난 눈길로 쏘아봤다. 6시 50분 도착. 아... 30분이 늘었다.


찰나의 선택이, 시간을 바꿨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늘 하는 순간의 선택이, 내 인생의 시간표를 바꿔왔겠군.

지금은 30분이지만, 어떤 때는 3년이 될 수도, 30년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살아왔겠구나. 난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았나. 과연 늘 '최선'의 길을 선택했나. '차악'의 길을 선택했다. '차선'의 길을 선택했나.

31년이 가까운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텐데, 어떤 시간들이 나를 채워왔나. 그 시간은 누적되는 것인가. 그 시간은 섞이는 것인가.


그때,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가 플레이됐다.

수현이의 깊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포기하고

찢어질 것같이 아파할 수 없어 난

두세 번 더 길을 돌아갈까

적막 짙은 도로 위에 걸음을 포갠다


지난 연애들이 떠올랐다. 그때 참 많이 아프고, 참 많이 울기도 했고.

참 많이 웃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순간의 선택들이 쌓여 그들은 지금 내 곁에 없다.

나의 시간들을 바꿨다. 그리고 난 지금 내 곁의 너와 미래를 꿈꾼다.

그때 날 옭아매던 시간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천호대교 북단으로 빠졌다가, 이내 압구정까지 왔다.

6시 50분. 30분이나 더 소요됐다.

서둘러, 건물로 뛰어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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