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해. 삼수를 결정짓는 그 겨울의 밤이 내 인생의 깊이를 만들지 않았을까. 2008년 1월이었어. 기숙사 산골에서 보낸 1년은 의미가 없었어. 좋은 점수를 받아야만 의미가 있는 공간은 그렇게 수능이 끝나는 날 바로 의미를 잃었어. 그리고 새해가 밝았는데 내 처지는 2년 전에 머물러 있었어. 마음이 답답해 전대를 수십 바퀴 돌았어. 상대를 지나서 전대부고를 지나서 정문을 넘어서 후문과 쪽문을 지났어. 백도 앞 분수 앞에서 하염없이 노래를 들었어. 고독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이 재수했던 내 친한 친구들은 모두 시험을 잘 봤거든. 고2, 고3 2년을 짝꿍으로 지내던, 기숙사 머리를 맞대고 자던, 늘 성적은 나보다 좋지 않았지만, 목표만큼은 원대하던 친구마저 운 좋게 자리가 비어 대학에 합격했어. 한 번만 더 하면 목표하는 대학에 갈 수 있겠지. 사실 그 마음보다는 나보다 성적만큼은 못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마저 잘되니 도망갈 구석이 없었어. 아마 그 마음이 더 컸을 거야. 스스로 아쉬운 마음은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아니고, 친구보다 못한 나였어. 그걸 인정하는 게 쉽지 않더라. 합격한 대학에 가면 됐는데, 그게 안 되더라. 그래서 고독했어. 내 판단 기준은 내 것이 아니었어. 사람들의 시선이었어. 나를 바라보는 시선. 나는 아부지 회사에서는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모범생이었거든. 재수조차 실패한 사람이 아니었거든. 1년에 2천만원을 재수 비용에 탕진한 그저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 고독했어. 그 모든 순간을 오롯하게 받아들이는 게 힘들더라.
그렇게 삼수를 시작했어. 찝찝한 기분이었어. 이번에도 망하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 합격했던 대학들보다 좋은 곳에 갈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1년을 어떤 식으로 충실하게 할까라는 생각보다는 2008년 11월의 나를 생각하고 있더라. 과정의 나는 보이지 않았어. 그때 너무 어렸어. 그래서 수첩을 샀어. 끄적였어. 틈틈이 책을 넘겼어. 일상을 잊게 하는 돌파구로서 쓰고, 읽었어. 친구들은 대학 시절을 만끽하고, 연애를 시작하고, 영화를 보며 쉬는 모습을 잊고 싶었어. 늘 끄적이며 버킷리스트도 썼어. 꼭 이 시간을 마치면 이것만큼은 해보겠다고.
그런데 수능 백일 카운트다운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알게 됐어. 결국 내 선택이었더라고. 내가 결정한 순간들이었더라고.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경험하려고 한 거였더라. 잘할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내가 선택해서 일궈온 나날이더라고. 내 삼수 생활을 몇 달 남겨두지 않은 때 알았어. 수첩을 넘겨보니 막연한 기대가 가득하더라. 일단 부딪혀보자는 마음이 하나하나 아로새겨졌더라. 그래도 다행이었어. 그걸 알게 된 다음 날부터 시험을 보는 그날까지 두렵지 않았어. 마음이 홀가분했어. 그렇게 2008년이 흘렀어. 그 해의 내 고독함과 외로움과 깨달음이 이후의 20대를 관통했을 거야. 아니 그랬어. 내 인생의 깊이는 아마 그때 시작된 것 같아. 무려 10년이 훌쩍 지난 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