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한국사람 3명 중 1명은 암에 걸리는 시대에 곧 도래할지 모른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엄마가 담담히 말했다.
"얼마전부터 배에 이상한 혹 같은게 만져지더라고.
뭔지 모르겠어서 눌러봤는데 통증이 있길래 동네 병원에 갔더니..
몇가지 검사를 해보고선 이게 난소에 생긴 혹 같은데...
15CM가 넘게 크다고 큰 종합병원에 가보라며 추천서를 써주더라.
다음주 화요일로 예약되었어."
나는 머리속으로 잠시 15센티미터의 크기를 가늠해보며 말했다.
"15센티라고? 그럼 엄청 큰거 아닌가?"
"그렇지."
"....근데 엄마 얼마전에도 나라에서 해주는 정기 암 검진 받았잖아.
그땐 다 괜찮다고 나오지 않았어?"
"글쎄. 내가 자궁이 없어서..부인과 쪽 검진은 안하거든...
그 혹이 난소에 생겼다고 하더라."
"엄마 난소가 있었어?"
엄마는 자궁이 없다. 10살 터울의 어린 여동생이 태어날 때 탯줄을 목에 감고 있었고,
아이와 엄마의 목숨을 다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자궁을 함께 절제했다고 했다.
그 때 이후로 엄마는 자신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육체의 반을 잃어버려 극심한 감정의 변화와
호르몬 이상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다만 한가지 자궁이 없는 것에 장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부인과 3대 암들(유방암, 자궁암, 난소암) 중 2가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를 통해 전해 들은 동네 병원 의사의 설명은 이러했다.
엄마가 아기를 낳던 옛날 시절, 그러니까 1990년대에는
자궁을 적출할 때 난소를 남겨놓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요즘은 환자의 의사를 물어 난소를 함께 제거하고 있다고.
그 때는 이미 의미가 없어진 기관이긴 하지만 아무 이상도 없고 멀쩡한 몸의 기관을
제거하는 것을 꺼렸다는 거다.
신체발모 수지부모 같은 뭐 그런 건가...
게다가 자궁이 없는 난소의 경우는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거의 없어서
엄마의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라고 했다.
"매우 드문 경우라...."
"응, 큰 딸. 엄마가 그 어려운 일을 또 해냈어."
"..........."
엄마는 슬펐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 정보만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무래도 내가 운전중이기 때문에 걱정이 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녀의 노력에 부응하기 위해 최대한 담담히 들으려 애썼다.
우리는 함께 다시 기묘한 침묵속으로 들어갔다.
엄마에게 뭐라고 해줄 위로의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백지장처럼 새햐애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가끔 아이들을 앞에 놓고 그날의 그룹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멍해지는 경우가 있다.
대게는 전날 잠을 잘 못자거나 마음속에 걱정거리가 있을 때인데
그럴 때 효과적으로 시간을 버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출석체크이다.
나는 이 기묘한 침묵을 깨기 위해 또 같은 수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소연이는 알아? (10살 터울 여동생)"
"응"
"아빠한테는 말했고? ( 엄마가 3년전 재혼한 새아빠)"
"응..알고 계셔."
"할머니는? 이모는? 삼촌은? 고모 할머니는?"
이러다 호적상 내가 아는 모든 친인척들이 등판할 참이었다.
엄마가 말했다.
"천천히 알려도 되지, 뭐. 일단 같이 사는 가족만 알면 되지.."
아...애석하게도 우린 가족도 친척도 얼마 되지 않는 뿌리가 옅은 사람들이었다.
출석체크 방법...실패.
"어! 엄마 저기 경찰이 음주단속 한다.
내가 집에 가서 전화할께."
음주단속은 없다. 어느 경찰이 미쳤다고 오후 3시 30분 한적한 동네에서 음주단속 하겠는가.
그러나 엄마는 순순히 믿어주고 전화를 끊어주었다.
나는 흔들리는 손에 다시 힘을 주며 생각했다.
일단 집에 가는 거야.
안전하게 운전해서 집에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