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속에서 더 나다워지기를 2

김필을 들은 시간 2부 ‘거울’

by 홍연서




김필의 음악을 듣다가 문득,

나를 깊이 들여다보게 된

순간들에 관하여.








(1부에 이어서)


고백하자면 ‘내가 왜 이렇게 김필에 빠져있지’하고 어이없이 웃은 적이 여러 번이다. 돌이켜보면 김필의 고민과 이야기를 듣던 시간은 어느새 나의 고민과 이야기를 돌아보는 시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김필의 노래들이 내 고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울 같아서?

작정하고 내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혼자 있어도 칼날을 세우게 되는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땐 나와 무관한 듯하여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의 음악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의 마당을 쓸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부대끼는 것들, 그럴 때 부는 혼란들, 그것들의 이유와 의미는 무엇이겠는지까지도 생각해 보게 했다.








하나, 타인에게 나를 맞추는 것과 나를 지키는 것


(김필의 가사) 3

매일 나를 쫓아오는 시간에 목을 매고서
다른 그들의 시선에 조금씩 날 맞춰가네
Please tell me Lord Oh what should I do
어둠 가득한 이곳을 난 벗어날 수 없어

- 김필, <괴수(Feat. 강이채, 고상지)>, 싱글 《괴수》(2016)


https://youtu.be/zwvshyOJLzI 김필, <괴수> (김필 유튜브 채널 음원)

https://youtu.be/rfDG1rxf1-Q 김필, <괴수>, 서울재즈페스티벌, 2019

https://youtu.be/m8QmmC0Dq2Q 김필, <괴수>, '비긴어게인3', JTBC, 2019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그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환상일 거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기란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더 큰 목표를 위해 타인이나 기존의 질서에 맞춰야 할 때도 있다. 김필은 아마도 기존의 질서에 맞추느라 자신을 잃은 적이 있었을 테고, 그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이 곡을 쓴 것 같다.


나의 경우엔 체제보다 개인적 관계에 나를 맞추느라 힘들어했다. 상대방을 위하거나 나를 지키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털만 잔뜩 세운 괴물 같았던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하거나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면 어려워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 관계는 기쁨과 안정을 주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엔 나를 무리하게 내어주며 착한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고약한 일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미움은 나를 날카롭게 베고, 내가 누군가에게 주는 상처 또한 나를 가차 없이 베어버리기 때문에, 관계와 마음의 평화를 위해 타인에게 나를 맞췄다.


요즘에 들어서야 ‘사람들이 나다움을 좋아해 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지’라는 마음을 갖게 됐지만, 여전히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고 싶고’ ‘상대방에게 맞춰주고 싶은’ 마음 또한 강하다. ‘타인에게 맞추고 싶지만’ ‘나다워지고 싶기도 한’—이 언뜻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마음은 내 안에서 대등한 힘으로 맞붙고,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아웅다웅한다. 그럴 때 난 가끔 어쩔 줄 몰라 울음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한 가지 마음이 더 커서 큰 갈등 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 보다 타인에게 맞추면서 성실하고 필요한 사람이 되거나, 보다 자기를 주장하면서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 뚜렷한 사람으로 말이다. 내게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처럼 비슷한 크기로 부대끼는 마음들을 굳이 택하진 않겠다.


그러나 그건 다음 생에서야 가능할 듯하다. 앞으로도 나는 때로는 타인에게 맞추면서, 때로는 나를 주장하면서, 때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괴로워할 것이다. 잘 생각해 보니 내가 힘든 본질적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그 자신으로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최대한 나로 존재했으면 좋겠고, 상대방도 최대한 그로 존재했으면 좋겠다. 두 명만 같이 있어도 선택은 불가피한데 말이다.


결국엔 나를 ‘내어주느냐 지키느냐’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내어주든 나를 지키든, ‘무엇을 위해’ 나를 내어주고 ‘무엇을 위해’ 나를 지키는지 명확히 알면서 선택해나간다면. 또 나를 ‘어디까지’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지, ‘어디서부터는’ 절대로 지켜야 하는지 알아간다면. 무언가를 잃어서 괴로운 마음을 안고도 점점 나다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둘,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과 느린 나


(김필의 가사) 4

조금만 더 천천히 흘러가길 바래
모든걸 다 알기엔 완전하지 않아

- 김필, <Pray>, 정규 《yours, sincerely》(2019)


https://youtu.be/EiEeN6yM8Yg 김필, <Pray> (김필 유튜브 채널 음원)


느린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시간을 압축하는 상상을 해왔다. 나의 시간은 크루아상 같아서 결은 많지만 누르면 힘 없이 짜부라질 것 같다. 내가 삼 년간 해온 일들을 압축하면 누군가가 일 년에 한 일만큼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흘러가는 시간에 맞추어 재빠르게 움직이거나 즐길 수가 없다. 그래서 하고 싶거나 해야 하지만 하지 못한 일들이 쌓여간다. 그런 일들이 쌓여서 지층이라도 만들 듯하다.


오늘을 살아야 하는데, 과거도 정리해야 하고 미래도 준비해야 한다. 호기심이 많아서 공부하고 배워가야 하는데, 그렇게 공부하고 배운 것들을 정리도 해야 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내기도 해야 한다. 읽고 싶은 책들은 굳이 리스트를 뽑지 않아도 지구를 몇 바퀴 두를 것 같다. 나는 늘 시간과 평행을 달리거나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나의 경험들은 정리되지 못하여 의미를 낳지 못한 채, 그래서 유용한 것이 되지 못한 채 창고에 쌓여가는 느낌이다.


나의 성격들—낯을 가리고, 이해한 후에야 행동하고, 완벽하고 싶은 마음은 적응과 행동을 느리게 한다. 상대적으로 사람과 상황은 빠르게 지나간다. 난 아마 목표지점을 향해 열심히 헤엄쳐가는 사람이 아니라, 바다 위에 두둥실 떠 있고 싶은 사람이어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가만히 찬찬히 좀 더 음미하고 의미하고 싶다. 나는 목표를 향해서만 달려갈 때는 놓치게 되는 사각지대를, 느리게 지나가야만 누릴 수 있는 축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느릴 수밖에 없고 느리게 흘러가고 싶은 내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나의 시간은 앞으로도 상대적으로 빠르게 흘러가겠고, 나는 그 시간을 잡을 수 없어 애가 탈 것이다. 매정하게도 애타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겠지. 결국은 시간 속에서 내가 원하는 걸 다 할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이다. 소중한 것들 중에 무언가를 쳐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하나를 버려야 할 땐, 그것의 가치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생각해 보게 된다. 느리기에 더욱 제한된 시간 속에 사는 나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물리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의 리스트를 추리느라 내게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에 대해 뼈저리게 알아가게 될 것이다. 마음 아프지만 여전히 소중한 것들 중 무언가를 버리고 포기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더 나다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 하고 싶은 말과 말할 수 없는 현실


(김필의 가사) 5

매일 듣지 못할 말을 내뱉고
보이지도 않을 상상을 하지
그리고 늘 되물어
혹 나만 이런 걸까

오늘 밤 너의 얘길 난 듣고 싶어
아침이 오면 다 희미해 진대도
너만 괜찮다면 난 기다릴 수 있어

- 김필, <불면(sleeplessness)>, 싱글 《불면(sleeplessness)》(2020)


https://youtu.be/X5tLJ6jPfzo 김필, <불면(sleeplessness)>, 뮤직비디오, 2020

https://youtu.be/onD9CYlFZMk?t=4 김필, <불면(sleeplessness)>, 뮤콘 쇼케이스, 2021

https://youtu.be/nnJhf0N0W9o?t=68 김필, 싱글 제작 인터뷰, '우리의 "불면"에 대하여', 2020


올가미에 걸린 듯 벗어나고 싶지만 계속 살을 파고들던 문제가 있었다. 믿고 있던 누군가가 예기치 못하게 나를 떠나 생긴 상처였는데, 그 상처가 그렇게 깊은 줄 나도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다.


아마도 그 상처를 내가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혼란이 터져 나왔던 것 같다. 오랜만에 그 사람을 본 날이면 계속 눈물이 나고 그 후로도 얼마간은 힘든 마음으로 지내야 했다.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그런 말이 있는 줄 알았을 때에도, 그 말을 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모든 상황은 오래전에 지나갔고,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문제에 아프게 걸려 있었고 풀리지 않아 엉망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을 만나 속으로만 삼켰던 감정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 내 마음이 어땠는지,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 말이다. 많이 주저했지만 결국 그를 만나기로 했다.


떠날 당시, 그는 자기 삶을 살아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내가 그렇게 힘들어한 줄 몰랐다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당사자에게 털어놓는 것으로, 그 사람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 아파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그 사람에게서 내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란 걸 알게 된 것으로 만족했다. 말을 하고 난 뒤에야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난 시간을 돌린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내 마음이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나를 위해 그 정도의 아픔쯤은 그가 기꺼이 감수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난 운이 좋았다는 걸 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를 마주쳐서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있었고, 내가 용기를 낸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나아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런 것들에 있지 않았다. 내가 나아질 수 있었던 건, 내가 매일 그 사람은 "듣지 못할 말을 내뱉고", 그 사람에겐 "보이지도 않을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이유 모를 눈물이 흐르고 그저 답답한 가슴일 때, 일기를 쓰고 부치지 ‘않을’ 편지를 썼다. 그럼으로써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내 귀로는 들을 수 있었고, 그 사람과 하고 싶은 일들을 내 눈으로는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우선 됐다. 스스로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내가 날 위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상처를 입었을 때 아프다고 소리를 치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삼키는 편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런 나라서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줄도 모르거나, 있는 줄은 알아도 그 말을 못 하고 지나가는 때가 많을 것이다. 뒤늦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거나 말하기로 결심한대도 말하지 못할 상황은 많다. 더는 상대를 만날 수 없거나, 만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을 만나는 게 공허한 일임을 알거나, 그 사람에게 도리어 큰 상처를 주게 되어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말과 말할 수 없는 현실에 묶여 힘들어하겠지만. 억눌렸던 말을 꺼내 나 자신에게는 해보면서, 나아가 작업을 통해 표현해 보면서 더 나다워지리라 믿는다. 죽을 때,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말들을 가슴에 묻고 가진 않겠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3부에 계속)





ⓒ 2021. 홍연서 All rights reserved.



https://youtu.be/GuBUUmv2qbk

※이 글은 2021.03.17. 유튜브에 업로드한 내용을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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