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을 들은 시간 1부 ‘만남’
‘김필’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던 한 달이었던 것 같다. 잠들기 전에 그의 노래를 듣고, 아침에 일어나 들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들었다. 그렇게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걷던 나를 뒤에서 잡아당긴 건, 현실로의 복귀였다. 문을 닫아야 했던 나의 일터가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일을 쉬게 됐을 땐, 언제 다시 시작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불안한 무급휴가였다. 일이 끊긴 동료들은 단기간에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나는, 적금을 깨기로 했다. 목에 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돈 대신 시간을 택하는 게 늘 나였다.
일을 쉬는 동안에도 달은 어김없이 지구를 돌았고, 내게도 월경이 찾아왔다. 그날 아침, 속이 울렁거리고 희미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나는 조용히 무덤을 파듯 자리를 폈다. 누군가는 나보다 심한 통증을 겪겠고, 누군가는 별일 없이 지나가겠지만.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 시기이면 구토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덮이는 통증을 겪는다. 통증의 파동에 집중하다 보면 더 예민해지므로 일부러 영화나 책을 보기도 하지만, 심할 때는 그저 숨 쉬고 견디다 잠든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손을 뻗어 음악을 트는 것뿐. 그날 김필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그냥 잠들고 말았다.
듣고 싶은 목소리를 제때 못 들은 게 짧은 한이 됐는지 그 후로 며칠 동안 김필의 커버곡 영상들을 끊임없이 봤다.
▶ https://youtu.be/_phOnRkXJeM 김필, <instagram> (원곡 DEAN), '더 콜2', Mnet, 2019
▶ https://youtu.be/kRvCL2tAKzU 김필, <슬픈 언약식> (원곡 김정민), '슈가맨3', JTBC, 2020
▶ https://tv.naver.com/v/753989 김필, <다시 사랑한다면> (원곡 도원경), '복면가왕', MBC, 2016
댓글에는 그 목소리에 대한 감탄들—아름답고 슬프다, 매력적이고 하나뿐인 음색이다, 독특한 목소리지만 계속 듣게 된다…… 그가 이 세상의 모든 좋은 노래들을 불러줬으면 하는 댓글도 있었다. 한편 커버곡이 사랑받는 것에 비해 그 자신의 히트곡이 없는 것을 두고, 그가 더 사랑받기를, 더 좋은 곡을 만나기를 바란다는 댓글도 있었다.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곤 했는데…… 의문이 피어올랐다.
김필은 더 유명해질 수 있는데 왜 지금의 인지도에 머무는 걸까?
곡을 쓰는 사람들이 탐내지 않는 걸까?
그의 목소리는 한낮의 대로에 내놓은 보석과 같은데?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며 ‘나 여기 있어요’라고 소리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가 곡을 받지 않는 것밖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김필은 싱어-송라이터잖아. 자기가 부를 노래는 자기가 쓰는 거라구.’
김필이 자기 곡을 쓴다는 걸 아예 몰랐던 건 아니다. 변명하자면 단지 무심하게 잊었을 뿐.
사실 얼마 전까지도 내겐 가수가 직접 노래를 썼는지 아닌지 상관이 없었다. 나에게 노래는 누군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든 작품이라기보다 나에게 어떤 역할을 해주는 기능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의식중에 어떤 노래를 흥얼거린다면 내 마음이 그 가사와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슬럼프의 늪에 빠진다면 밧줄 같은 노래들을 붙잡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쩌면 수험생활 때부터 그런 습관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책은 불타버린 듯, 수험서만 덩그러니 남은 곳에서 나를 유일하게 돌봐주었던 것이 노래였으니까. 공부하다 힘들면 몇 분 안에 위로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음악시장에서 생산되는 곡들을 ‘소비’했고, 곡을 쓰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뮤지션 그 누구의 팬도 아니어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그저 ‘들려오는 노래’만 들어서일 수도 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볼 때는 창작자나 작품이 유명하든 아니든 내 호기심과 기호에 따랐으면서, 음악은 방송되거나 유명하여 들려오는 것들만 들었다. 들려오지 않는 것, 유명하지 않은 가수의 노래, 유명하지 않은 노래는 내게 있지만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김필이 자기 곡을 쓴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 그의 곡들을 하나하나 듣게 되었다. 그 곡들에 어떤 애정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 음악시장 속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알던 김필은 예능 무대에서 커버곡을 부르며 홀로 외로이 슬픔을 감당해 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기 노래를 부르는 김필은 달랐다. 그는 밴드와 함께하고 관객들과 호흡하며 보다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에게 깔린 외로움과 슬픔은 여전했지만 그 컬러는 보다 짙고 선명했다. 가사로 표현된 그의 언어들은 솔직하고 자기 성찰적이었다.
(김필의 가사) 1
오늘도 넌 여기서 정말 괜찮은 건지
Just smile 어릿광대처럼 종일 웃음 지으며
갈 곳 잃은 눈동자 둘 곳 잃은 마음을 감추고
두꺼운 화장 뒤에 슬픔을 숨기고 사는 것
- 김필, <Pierrot(광대)>, EP 《Feel Free》(2015)
▶ https://youtu.be/ZB4gmBu57Wc 김필, <Pierrot> (김필 유튜브 채널 음원)
▶ https://youtu.be/uagrrVII_8o 김필, <Pierrot>, 서울파크뮤직페스티벌, 2019
▶ https://youtu.be/unopFwvVUmI 김필, <Pierrot>, '비긴어게인3', JTBC, 2019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쳤고, 때로는 지나간 기억들을 붙잡고 과거를 꿈꿨다. 그제서야 나는 김필의 목소리에서 풀려난 것 같았는데, 커버곡들을 들을 때 나의 목적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면, 그가 쓴 곡들을 들을 때 나의 목적은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는 사람인지, 노래를 쓸 때의 마음이 어땠는지가 중요했다. 자기 이야기를 할 때 김필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그의 머리 위에 놓인 빛나지만 무거운 왕관이 아니라, 김필 자신의 이야기를 충실히 전하는 통로로서 그의 일부가 되었다.
결론은 내가 알던 김필 못지않게 내가 알지 못했던 김필도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마치 목소리라는 두꺼운 망토 아래 감춰져 있던 모습을 본 느낌이랄까. 그러나 두 모습의 간극이 컸던 게 내겐 하나의 충격이었고, 그 후로 그의 음악을 보다 진지하게 듣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필은 충돌하는 두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 걸까?
그의 목소리―싱어는 대중이 사랑하는 ‘스타’였고, 그의 송라이터는 자기 색이 강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동시에 가지기 힘들거니와, 동시에 가지면 힘든 두 정체성을 지닌 듯했다.
명확히 이분할 수는 없지만, 스타와 예술가는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다. 스타는 대중의 사람이다. 대중에 많은 시간 노출되고 대중이 원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널리 알려지고 인기나 차트 시스템에서 상위를 차지한다. 예술가는 매니아들의 지지를 받지만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사람이다. 자기만족을 위해 보내는 시간이 중요하고 자기가 드러내고 싶은 모습을 드러낸다. 좁더라도 깊어지려 하며 인기나 차트인보다는 자기다움을 추구한다.
스타나 예술가 모두 자기만의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스타는 대중의 사랑에 의존하므로 그 사랑이 사라질까 봐 두렵고, 예술가는 수용층이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음악만으로는 충분한 돈을 벌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두 가지를 다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의 특수한 괴로움은 뭘까. 예술가가 스타이기도 하다면, 고통을 부르는 상황의 핵심은 그가 ‘스타의 기회’를 가진 것 아닐까? 자기가 원하는 방향을 조금씩 포기하면 쉽게 인기를 얻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늘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 기회를 애써 뿌리치며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그 기회가 유혹이 되는 것은, 그가 특별히 부와 성공을 바라서라기보다, 그렇게 하면 주위 사람들을 덜 고생시키며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세계에 대한 강한 소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는 마음도 가졌다면 내적 갈등은 정해진 게 아닐까 싶다.
(김필의 가사) 2
외로운 맘 감춰봐도
참으려고 할수록 더 조여 오는 숨
그 숨을 참지 마
천천히 그렇게 네 모습을 찾아가
- 김필, <I Feel You>, EP 《from Feel》(2016)
▶ https://youtu.be/RFp0uXr68lg 김필, <I Feel You> (김필 유튜브 채널 음원)
▶ https://youtu.be/35KhvJPGqpk 김필, <I Feel You>, 서울파크뮤직페스티벌, 2019
▶ https://youtu.be/dHBpyGS31qE 김필, <I Feel You>, '바람의 남자들', TV조선, 2022
김필은 "어릿광대처럼 종일 웃음 지으며" "슬픔을 숨기고 사는" 자신에게 "오늘도 넌 여기서 정말 괜찮은 건지"라고 묻고(<Pierrot(광대)>), "그 숨을 참지 마 천천히 그렇게 네 모습을 찾아가"라고 말한다(<I Feel you>).
그의 가사를 보니 알 것도 같다. 그가 왜 대중이 환호하는 목소리를 가지고도 지금의 인기에 머무는지. 그가 원하는 건 부와 성공을 가진 ‘스타’라기보다, 자기답게 사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무대에 서고 싶었던 이유는, 맹목적인 열광을 원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에 핀 라이트를 비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노래를 듣던 중, 싱글 <불면(sleeplessness)>이 발표됐다.
▶ https://youtu.be/X5tLJ6jPfzo 김필, <불면(sleeplessness)>, 뮤직비디오, 2020
▶ https://youtu.be/AbfSthM4paQ 김필, <불면(sleeplessness)>, '유희열의 스케치북', KBS, 2021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너무 많은 가사를 한 곡에 다 넣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엔 방향성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표현 못 하는 안타까움, 사랑의 어려움, 늘어가는 책임들과 소신을 지키기 어려워지는 현실 등…… 한 곡에서 말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물음 가운데 쉽게 잠들 수 없어"라고 노래하는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았다. 그 많은 이야기가 실은 그가 잠 못 드는 밤에 하는 수많은 고민들이란 것.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물음들인데, 그 고민을 다 안은 밤은 얼마나 무거울까.
만일 누군가가 내게 김필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불면(sleeplessness)>의 가사를 보내주겠다. 고민은 그 사람을 잘 드러내 주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문제 중 무엇에 사로잡혀, 어떻게 고민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 노래에는 그간 한 곡에는 담을 수 없었던 그의 고민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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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1.03.17. 유튜브에 업로드한 내용을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