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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ul 14. 2021

아이의 안짱 걸음, 남편과의 대화

정상성을 벗어난다는 것에 대해

교사는 날날이가 살짝 안짱다리로 걷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심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넘어질까 걱정된다고. 옆에 있던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집에 오는 길, 아이가 걷는 걸 뒤에서 지켜봤다. 안짱 걸음이었다. 조금 심해 보였다.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유치원 다닐 때였으니 지금 날날이 나이랑 비슷할 때였을 거다. 선생님이 내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엄마에게 말했고, 선생님과 엄마가 내 걸음걸이를 함께 봤던 것 같다. 그 대화를 나눴던 유치원 복도가 아직도 기억난다. 차가운 공기까지도.


그때부터 10년 훌쩍 넘게 엄마는 내가 걸을 때마다 뒤에서 나를 지켜봤다.


“진아, 발!”


엄마가 슬쩍 내 뒤로 가서 걸을 때면 심장이 콩닥댔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발끝이 안쪽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애썼다. 신경을 안 쓰면 도로 안짱 걸음이 됐다.


엄마는 안짱 걸음 교정에 좋다며 수십만 원짜리 깔창을 사주기도 했다. 대학에 가면서 엄마와 떨어져 살았고 몇 개월에 한 번, 엄마와 만날 때만 걸음걸이에 신경 썼다. 엄마는 깔창 때문에 안짱 걸음이 좋아졌다고 굳게 믿었다. 스무 살 넘은 딸이 엄마를 속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깔창이 뉴스에 나왔다. 안짱 걸음 교정에 효과가 없다고.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저 깔창이 그 깔창이냐고. 당장 신발에서 깔창을 뺐다. 해방이었다.



“애기 너무 업어주지 마요”


아이가 돌이 지나고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주변에서 아이가 오다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 다리를 사람들이 그렇게 유심히 보는 줄 처음 알았다. 정작 소아과 의사는 아직 아이가 어리니까 괜찮다고 했다.


하루는 아이, 남편과 함께 하늘공원에 놀러 갔다.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가 말했다. “이 애기는 많이 업어주면 안 되겠네.” 나를 보더니 한마디 덧붙인다. “애기 너무 업어주지 마요.” 안 그래도 아이 오다리 때문에 한껏 예민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남편도 뻔히 옆에 있는데, 아이 오다리가 엄마 탓이라는 소린가. 왜 알지도 못하는 아이 다리에 참견인가. 화가 났다.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안 업어요!” 그 후 한동안 나는 아이에게 붙는 바지를 입히지 않았다.


의사의 말처럼 아이의 오다리는 괜찮아졌고 한동안 아이의 다리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안짱다리 이야기를 들은 거다. 왜 아이가 안짱 걸음이라는 걸 몰랐지? 아이 오다리를 발견했을 때처럼 나는 안짱 걸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안짱 걸음이 계속되면 무릎, 골반, 척추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고 키가 안 자랄 수도 있고... 그런 거 다 떠나서 아이가 안짱 걸음 때문에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는 게 싫었다.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아니까. 대학 병원에 가서 뼈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일단 진단을 받아야 하고, 교정 치료를 받아야 하고... 내 마음은 이미 대학병원 진료실에 가 있다.


아이에게 뭔가 이상 징후가 생길 때마다 매번 나는 늘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실제로 사람들은 너무 쉽게 엄마 탓을 했다. 그럼 나는 습관적으로 엄마 탓을 하게 됐다. ‘정상성'에서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엄마. 지금 내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는 엄마를.


하필이면 캐럴라인 냅의 책을 읽고 있었다. 캐럴라인 냅은 <욕구들>에서 엄마의 세계와 딸의 세계가 얼마나 징글징글하게 연결돼 있는지 말한다. 냅은 “모든 세대는 바로 앞 세대를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한다"며 “허기에 대한 모든 딸의 경험은 어느 정도는 허기에 대한 어머니의 경험에 의해 형태가 잡힌다"고 썼다.


“다이어트와 체중으로 고통받는 어머니, 자신의 외모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자신의 몸에 역겨움을 느끼는 어머니가 딸에게 음식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체중에 대해 느긋해하도록, 혹은 여성의 육체를 즐겁게 느끼도록 가르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두렵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운 것이라고 느끼는 어머니가 딸의 섹슈얼리티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 캐럴라인 냅 <욕구들>


어머니의 결핍, 취약성, 좌절은 딸의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진다. 엄마 역시 피해자라는 걸 안다. 그런데 왜 자꾸만 모든 게 엄마 때문인 것 같을까.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굳은 얼굴로 정형외과 정보를 찾다 남편에게 물었다.


“근데 너는 왜 애가 안짱 걸음이라는 걸 알고도 가만히 있었어?”


남편이 답했다.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안짱 걸음이라고 사는 데 지장 있는 건 아니잖아.”


남편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 걸 신경 썼으면 내가 이렇게 살겠냐.”


평소 같았으면 남편에게 화를 냈을 거다. 네가 안짱 걸음으로 사는 게 어떤 건 줄 아냐. 너는 아빠니까 별소리 안 듣겠지만 엄마인 나한테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 줄 아냐.


이번에는 남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과체중, 탈모. 남편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20대 초반부터 남편은 빈약한 머리숱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머리를 길게 길러서 파마를 했다가(거기에 머리띠까지…) 열심히 야구 모자와 비니를 쓰고 다니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머리를 밀고 다닌다. 수시로 다이어트를 다짐하지만 남편은 음식을 만드는 것도 먹는 것도 매우 사랑한다. 다이어트는 늘 내일부터다.


아이는 “우리 아빠는 뚱뚱보 대머리"라 말하며 아빠를 팔아 친구들의 호감을 사려한다. 밖에 나가면 처음 보는 아이들이 남편을 보고 수군댄다. 조심성 있는 아이는 엄마에게 가서 귓속말로 ‘엄마, 저 아저씨 대머리야’로 추정되는 말을 한다. 그럼 아이 엄마는 표정이 변하면서 “그런 말 하면 안 돼”라고 말한다. 그 모습을 보는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남편은 의연한 표정이다. 언젠가 남편을 보며 “어 대머리다! 대머리!” 소리치는 아이에게 남편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니 자식도 대머리 돼라.”


밑도 끝도 맥락도 없는 말. 나는 또 빵 터졌다. 정상성에서 벗어난 외모로 살아간다는 건 끝없는 수군거림과 놀람의 눈빛을 견뎌야 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남편을 보면서 알게 됐다. 어른이라고 다를까. 세상에는 아이보다 더 개념 없는 어른도 많다. “어. 살이 더 쪘네.” 결혼식 후 몇 년 만에 남편을 만난 먼 친척은 남편의 면전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남성인 남편이 외모 때문에 받아야 하는 사회적 시선이나 압박은 여성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래도 분명 상처가 되는 일일 텐데 남편은 대수롭지 않아 한다. ‘사는 데 크게 지장 없잖아. 죽는 거 아니잖아.’ 남편 말처럼 그래서 “이렇게" 사는 걸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몸을 갖는 거였다. 키가 너무 작거나 크지 않게, 살이 너무 빠지거나 찌지 않게. 적당히. 튀지 않게. 정상성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평생을 싸워왔는데, 그냥 신경을 안 쓰는 방법도 있구나. 부디 아이의 세계는 나와 엄마의 세계보다는 남편의 세계에 좀 더 가까웠으면 좋겠다. 이것도 아이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 가능한 일인 걸까.


생각해 보면 주변 사람, 특히 엄마의 시선을 제외하면 안짱 걸음으로 살면서 크게 힘든 점은 없었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무릎 통증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꼭 안짱 걸음이 아니라도 사람은 누구나 몸의 균형이 조금씩 무너져 있다. 무엇보다 내가 아이의 안짱 걸음을 걱정하는 본질이 균형 때문은 아니니까.


나는 검색을 멈추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러네. 사는 데 지장 없잖아. 날날이는 심지어 잘 넘어지지도 않고.”


아이는 잘 걷고 잘 뛰어다닌다. 그럼 괜찮은 거 아닐까. 일단은 좀 더 기다려 보려 한다. 사는 데 지장 있는 거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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