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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Feb 15. 2021

평등 명절 실험, 3년의 기록

하소연과 뒷담화를 넘어서

설날 전날, 지인들의 연락이 갑자기 폭주했다. 오마이뉴스 재입사 한 거냐고. 여기 이 홍현진이 너 맞냐고. 


재입사 아니고, 새해부터 오마이뉴스 ‘해시태그 비사이드’라는 프리미엄 연재에 필진으로 합류하게 됐다. 10년 전처럼 다시 시민기자로 글을 쓰게 되면서 가장 먼저 쓴 글이 다음 메인 30대가 가장 많이 본 기사 1위에 올랐다.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다는데 나는 읽어 보지 않았다. 


3년 전, 명절 보이콧 후 나와 남편 그리고 가족들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산발적으로 기록도 하고 인터뷰도 했지만 한번쯤 나의 언어로 제대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잘 쓰고 싶다는 압박감에 원고를 갈아 엎고 머리를 쥐어싸고... 어쨌든 글이 나왔다. 지인은 “명절의 억울함을 정확하게 표현한 글”이라고 내 글이 소개되어 있어 읽어보게 됐다고 했다. 또 다른 지인은 이제 명절 전문가로 나서도 되겠다고 ㅎㅎㅎ


재작년부터 우리 가족은 설날에는 시가, 추석에는 친정에만 간다. 얼마 전 시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시부모님은 올해부터 차례를 없애기로 했다. 차례만 사라졌을 뿐인데 속도 편하고 마음도 편해졌다. 모두가 나처럼 하라는 건 아니다. 나는 이렇게 해야 살 수 있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저렇게 계속 실험해보고 있을 뿐이다. 선택과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각자의 몫이다. 여전히 나도 명절과 시부모님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죄송하고 불편한 마음이 교차한다.


이번 명절에는 지속가능한 일과 삶을 고민하는 커뮤니티 '창고살롱'에서 강화길 작가의 단편 소설 <음복>을 읽고 '명절을 맞이하는 여자들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하소연이나 뒷담화로 끝나지 않고 생산적이고 대안적인 명절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고무적인 시간이었다. 다음 명절에는 좀 더 큰 판을 벌여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누군가에게 나의 경험이 작은 레퍼런스가 되기를 바라며, 지금까지의 '평등 명절 실험' 기록을 아카이빙 해본다. 



[명절 보이콧 기록] 


['명절 파업한 요즘 것들' 인터뷰]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YhMceglYVz0

2부 https://www.youtube.com/watch?v=wpB0uesHEI8 


[마더티브 여성 동아 인터뷰] 


[오마이뉴스] 어느 며느리의 '명절 보이콧' 3년 후...



3년 전 추석, 나와 남편은 명절을 보이콧하고 호캉스를 떠났다. 두 돌 넘은 아이와 호텔에서 보내는 명절은 육아의 연장이었지만 평화로웠다. 북적이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근처 인천 공항에서 쉐이크쉑 버거를 먹고, 호텔 룸 창 밖으로 뜨고 지는 비행기를 바라봤다. 결혼 6년째 되던 해였다. 


명절을 보이콧하면서 우리는 시부모님에게 말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내년부터는 설날에는 시가에만, 추석에는 친정에만 가겠다고. 


설날에는 시가, 추석에는 친정. 단순한 문구 너머에는 지난한 투쟁이 있었다. 결혼하면서부터 명절에 시가 먼저 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왜 그게 당연했을까. 시가는 원주, 친정은 부산. 명절 연휴에 둘 다 가는 건 힘들었다. 아이 데리고는 더욱더. 어느 시점부터 명절에는 시가에만 갔다. 그것도 너무 당연히.


시가의 명절은 화목했다. 명절 전날, 남녀 모두 함께 명절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윷놀이를 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화목함은 몇 배로 커졌다. 시할머니까지 4대가 모인 집에는 웃음과 행복이 넘쳤다. 


시가의 명절이 화목할수록 나는 혼란스러웠다. 양성 평등이니 페미니즘이니 뭐니 했지만 명절에는 당연히 남자 집안 먼저 가서 좋은 며느리 역할극을 반복하는 처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는 현실에 자괴감과 모멸감이 밀려왔다. 부산에 있는 부모님도 마음에 걸렸다. 


결혼 후 9번의 명절을 보낼 때마다 울지 않은 적이 없다. 그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내가 미안해. 내가 잘할게." 그 말 뒤에는 '그러니까 이번에만 니가 좀 참아줘'라는 말이 숨어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아이 때문이었다. 불평등한 명절 문화를 아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명절에 친정에만 가보니 


명절을 바꾸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리는 평등을 말했는데 시부모님은 배은망덕을 말했다. 시부모님은 희생과 헌신의 아이콘이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요지였다. 시아버지는 말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어도 우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시어머니는 시할머니를 40년 가까이 모시고 살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에게 헌신하는 게 당연한 줄 아는 사람들. 시부모님은 선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시부모님이 말하는 평범한 명절을 위해서는 내가 계속 좋은 며느리 코스프레를 해야 했고, 부산에 있는 부모님은 매번 외로운 명절을 보내야 했다. 시가 단톡방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다. 남편도 나도 시가와 수개월간 교류를 끊고 지냈다. 더는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이듬해 추석, 드디어 결혼 후 처음으로 명절에 친정에만 가게 됐다. 처음에는 마냥 신났다. 드디어 우리 부모님도 딸, 사위, 손자와 함께 명절다운 명절을 보내게 되는구나. 같이 명절 음식도 만들고 즐거운 시간 보내야지.


새벽 3시에 일어나 카시트에 아이를 태우고 8시간 걸려 부산 집에 도착했을 때, 나도 남편도 아이도 이미 녹초가 돼 있었다. 아빠는 출근했고 엄마는 혼자 명절 음식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결혼 전 명절과 똑같았다. 당연히 아빠 본가가 먼저였다. 음식은 엄마와 큰엄마가 다 했는데 차례는 남자들만 지냈다. 엄마 본가에 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북한 음식, 수많은 그릇, 앞치마를 두르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며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나까지 가족들 데리고 와서 밥그릇 개수 늘린 게 아닐까, 마음이 불편했다. 친척 집만 전전하다 9시간 걸려 다시 서울 집에 돌아왔다.


그제야 생각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명절이 싫었다는 걸. 엄마가 기름 냄새 맡으며 하루종일 부엌에 서 있는 것도 싫었고, 남자들은 방안에 앉아 술 마시는데 여자들만 부엌에서 종종거리며 상 차리는 것도 싫었다. 차례상 물리자마자 화투판이 벌어지는 것도 싫었다. '엄마도 엄마 집에 가고 싶을 텐데' 자꾸만 엄마 눈치를 살피게 됐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명절이 좋은 사람은 아빠뿐인 것 같았다. 



내 눈에만 보이는 것들 

 

 

강화길 단편 소설 <음복>에는 결혼 이후 처음 시가 제사에 참석하게 된 주인공 '세나'가 나온다. 단 하룻밤 제사에 참석한 세나가 집안의 숨은 권력관계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끊임없이 눈치를 보는 동안 가부장제의 최대 수혜자인 남편 '정우'는 속 편한 얼굴로 새집 증후군을 걱정하고 토마토 고기찜을 먹는다. 제사를 준비하고 할머니를 챙기는 여자들은 모든 것을 다 아는데 남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몰라도 괜찮다.


드라마 <며느라기>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시가에서 늘 눈치 보며 종종거리는 사린과 달리 남편 무구영은 어쩜 저렇게 모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시종일관 순진무구하다. 


<음복>의 해설을 쓴 오은교 평론가는 소설 속 남성들의 무지가 곧 권력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의식해야 하는 이는 권력의 피지배자들이다. 권력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력이 행사되는 곳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힘이다...(중략)...'나'가 생전 처음 치르는 시댁 제사 자리에 가서 식사 한 끼만 해도 삼대손 집안의 알력 관계를 능히 꿰뚫어볼 수 있을 때, 평생을 나고 자란 집에서 일어나는 가내 정치에 대해 까맣게 모를 수 있는 남편의 그 산뜻하고 안온한 무지가 바로 권력이다."


몇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명절 새벽, 시어머니가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소리에 깼는데 남편은 옆에서 쿨쿨 잘도 자던 기억. 시가에서 밥 먹고 설거지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남편은 밥 먹자마자 소파에 누워 TV를 보던 기억. 심지어 친정에 가서도 거실에 잘도 누워 있는 남편을 보면서 이게 정말로 그저 성격과 기질의 차이인 걸까 궁금했다. 소설 속 세나처럼, 드라마 속 사린처럼, 내 눈에만 너무 많은 것이 보였다. 명절에는 더 많이.  


결혼 5년만에 명절 보이콧을 결심하면서 남편은 말했다. 기존의 명절 문화가 불합리하다는 건 알았지만 솔직히 남성인 자신은 명절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고. 본가에 가면 가족들이 아이도 봐주고 맛있는 것도 같이 만들어 먹고 잠도 푹 자며 편히 쉬다 올 수 있어서 좋았다고. 단 하나. 내가 힘들어하는 것만 빼면 말이다. 


"솔직히 니가 좀만 더 참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 할머니 살아계실 때까지만이라도. 괜히 분란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니가 이렇게까지 힘들다는데. 이렇게까지 싫다는데. 그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우리 아이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남편은 이제 명절이 마냥 즐겁지 않다고 했다. 내 눈치도 보이고 부모님 눈치도 보이고 장인어른, 장모님도 마음 쓰인다고.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남편이 불쌍하지 않냐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아니. 나는 남편이 불쌍하지 않다. 남편도 나처럼 많은 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 불편한 게 많아졌을 때, 함께 목소리를 내기로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평등해질 수 있었다. 그제야 진짜로 부부가 된 것 같았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눈물과 희생에 기댄 안온함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지난 추석에는 처음으로 친정 식구들과 여행을 갔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명절 노동에서 해방돼 "여기가 천국"이라며 행복해 하는 엄마 얼굴을 보며 기쁘면서도, 적적하게 명절을 보내고 있을 시가 식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여전히 내 눈에는 너무 많은 게 보인다.


끝없는 가사 노동과 감정 노동. 지금도 명절 한가운데 있을 여자들을 떠올린다. 나만 탈출하면 되는 걸까. 나는 진짜 탈출한 게 맞는 걸까. 평등 명절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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