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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더티브 Oct 02. 2018

명절 호캉스, 달콤할 줄만 알았는데

결혼 6년차 부부의 명절 보이콧, 리얼후기

명절을 보이콧하고 호텔에서 추석연휴를 보낸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이전 글 : 결혼 6년차, 명절을 보이콧하다).  


1번 : 우와 진짜 부럽다 
2번 : 진짜... 괜찮겠어? 


예상 가능하듯 1번은 여자들, 2번은 남자들의 반응. 여자들은 그런 결단을 내린 남편이 대단하다 했고, 남자들은 그런 결단을 내리게 만든 내가 대단하다고 했다. 남자들의 ‘대단하다’는 말에는 반어법이 숨어있었다. 한마디로 유난스런 부인 만나 고생하는 남편이 불쌍하다는 것. 부모님과 부인 사이에서 남편이 얼마나 고민하다 그런 결정을 내렸겠냐며. 오죽 부인이 남편을 닦달했으면...(이하 생략) 


명절, 호텔, 공항 


호텔 로비에 차려진 차례상...인 줄 알았는데 술 선물세트 판매중


추석연휴가 시작된 9월 22일 토요일. 바리바리 짐 싸들고 찾아간 인천의 한 호텔은 만실이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가족단위 투숙객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우리 앞에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 손을 잡고 온 가족이 체크인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3대가 함께 온 대가족, 우리처럼 어린 아이 데리고 유모차 끌고 온 가족... 아이들이 로비를 뛰어다녔다.    


결혼 6년차. 명절에 시가에 가지 않은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시가와 친정의 거리가 멀어서 친정은 거의 가지 못했다). 첫 번째는 아이 임신했을 때. ‘태교여행’ 핑계 대고 오키나와에 갔다. 명절이라 항공권 가격이 평소의 몇 배였는데 공항은 미어터졌다. 


그 때 받은 문화 충격이란. 세상에는 명절에 차례 안 지내고 여행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TV로 보는 것과는 리얼리티가 다르다). 오키나와에 갔더니 한국 여행객이 어찌나 많은지. 여기가 일본인이 제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무료로 인천공항까지 데려다 주는 모노레일(사진 속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고요...)


아이와 함께 모노레일을 타고 찾아간 인천공항은 여전히 북적였다. 이번 추석 연휴, 하루 평균 10만 여명이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고 한다. 특히 추석연휴가 시작된 토요일 출국 여객은 11만 여 명으로 인천공항이 문을 연 이래 최고 인원을 기록했다. 우리는 아이 손을 잡고 마치 여행객이라도 된 기분으로 공항을 누비고 다녔다.


홀가분은 개뿔


명절 연휴, 인천공항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명절 문화 때문에 우리 부부는 자주 다퉜다. 아무리 시부모님이 나를 배려한다 해도 내가 남편 집안에 종속된 며느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시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내가 계속 ‘평범한 며느리’라는 역할극을 수행해야 했다.


남편이 자신의 표현대로 ‘패륜’을 감행하기로 한 건 나와 아이 때문이었다. 남편은 말했다. 명절이 부모님에게 종교와도 같은 것임을 알지만, 같이 사는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면서까지 그 종교를 따라야 할까 싶었다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더 합리적이고 평등했으면 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우리도 바뀌어야 한다고. 나름 시부모님에게 최선을 다해 진심을 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설득에 실패했다. 처참히.


새로 개장한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명절에 호캉스라니, 모든 게 홀가분하긴 개뿔. 호텔에 머무는 4박5일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가 정말 패륜을 저지른 건 아닐까. 연착륙 할 방법은 없었을까. 대체 명절이 뭐기에 다들 매번 이 난리인 걸까. 명절을 뒤흔든 어느 교수의 칼럼 제목처럼, ‘명절이란 무엇인가’. 호텔 방 넓은 창 너머로 비행기가 연이어 내려앉았다. 아이는 창문에 매달려 그 광경을 바라봤다. 


3살 아이와 함께 하는 호캉스는 그냥 장소만 옮긴 육아일뿐이었다. 침대에 아무리 누워있어도, 아무리 잠을 자도 도무지 피로가 안 풀렸다. 3만 원이 넘는 호텔 조식 가격이 부담스러워 명절 당일 딱 하루를 제외하고는 전날 마트나 편의점에서 사온 음식으로 아침을 때웠다(덕분에 아이는 MSG 파티를 했다는 후문). 


카펫 알레르기 때문에 남편도 나도 아이도 계속 긁어대고 기침하고. 멀쩡한 집 놔두고 이 무슨 돈지랄인가 싶었다. 남이 해주는 밥 먹고 집 안 치워도 되는 건 좋았지만. 


공항 갬성. jpg


대학 시절. 무슨 수업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빨간 넥타이를 매고 온 발표자가 있었다. 튀기 좋아하는 애구나, 속으로 생각했는데 그 때 그 발표자가 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유행을 따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결국은 유행을 의식하는 걸지도 몰라요.
제가 이렇게 빨간 넥타이를 하고 온 것처럼요.”  



명절에 굳이 비싼 돈 들여 호텔을 찾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어쩌면 명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평소처럼 집에 있으면 왠지 전 부쳐야 할 것만 같고 차례 지내야 할 것만 같으니까. 그게 불가능한 완전히 다른 공간을 찾는 게 아닐까. 적어도 우리 부부는 그랬다. 해외로 나가지 않고, 호텔에 가지 않으면서 남들처럼 명절을 보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명절이란 무엇인가 


추석 당일 아침. 남편이 곱게 담아온 호텔 조식. 이게 얼마라고요?



명절 당일. 명절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 호텔 조식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전 없이 보내는 명절은 달콤할 줄 알았건만, 전 빠진 명절은 영 어색했다. 점심은 새로 개장한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 있는 쉑쉑버거에서 먹었다. 생각보다 공항이 한산해서 15분 정도 기다려 쉑쉑버거를 영접할 수 있었다.


터진다, 칼로리 폭탄이 터져(feat. 슈퍼윙즈)


아이를 차 뒷자석에 태우고 돌아오는 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멘트가 귀를 잡았다.

 

“한평생 자식만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부모님...” 


남편도 나도 잠시 말이 없어졌다.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 헌신한 것을 생각한다면 명절 그까이꺼, 며칠 꾹 참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며칠 꾹 참아야 하는 사람이 늘 여성이라는 거다. 그것도 1년에 2번씩. 꼬박꼬박. 제사까지 더해지면 횟수는 더 늘어난다. 


부모님을 생각해 ‘이번까지만’ 참고 또 참다 보면 이놈의 명절 문화는 언제 바뀔 수 있는 걸까. 대부분의 20~30대에게 이제 명절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다. ‘명절이란 무엇인가’ 묻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명절 노동을 묵묵히 수행하던 여성들의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꼬질꼬질 유모차와 거꾸로 신은 신발. 뭐 어때.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한 건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음 명절이 벌써부터 두렵기도 하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명절은 이전과는 전혀 다를 거라는 것. 그 후폭풍 역시 나와 남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더티브 인스타그램 instagram.com/mothertive
에디터 홍 브런치 brunch.co.kr/@hongmil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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