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전쟁] 볼드저널 인터뷰에서 알게 된 의외의 사실
퇴근 후 어린이집에 아이 데리러 가는 길, 같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다니는 ‘치타’에게 전화가 왔다(공동육아에서는 별명을 쓴다).
치타는 대뜸 볼드저널을 아냐고 물었다. 알죠, 볼드저널, 잘 알죠(우리 집 냉장고에 볼드저널 굿즈 스티커도 붙어 있는 걸요).
치타는 볼드저널과 인연이 있는데, 다음 호 주제가 ‘부부 위기’라는 이야기를 듣고 편집장에게 우리 부부를 인터뷰이로 강력 추천했다고 말했다. 치타네 부부 역시 ‘주말’을 주제로 한 볼드저널 인터뷰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무려 표지 장식!).
“작년에 뿡뿡이 또바기 소식지에 글 쓴 거 있잖아요. 그게 너무 재밌었거든요. 그 제목에 위기가 들어갔던 거 같은데. 사실 진짜 위기면 위기라는 말을 못 쓰잖아요. 땡땡네 부부가 인터뷰 하면 딱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뿡뿡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남편, 땡땡은 나다. 지난해 어린이집 소식지에 남편은 ‘위기의 남편이 또바기를 만났을 때’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또바기는 우리가 다니는 어린이집 이름이다. 내용의 일부를 옮기면 이러하다.
“제가 이 글을 쓰는 건 제목에서 알 수 있지만 제가 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겠죠. 그 위기가 어떤 위기인지는 제목을 먼저 지어준 이에게 물어봐야겠지만 이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저에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써 내려갑니다.”
...중략…
“말씀 드린 것처럼 회사는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고, 가족과는 교류가 끊겼으며, 금전적으로 진정한 가장이 된 저는 모든 부분에서 엄청난 위기입니다. 위기를 다른 위기로 이겨내는 저의 삶의 궤적으로 볼 때 앞으로도 엄청난 위기들이 제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남편은 1시간 만에 워드 4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고 했다. 읽어보니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하소연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그러한 처지를 만든 내 욕으로 4페이지를 채운 거다. 물론 그걸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남편은 위기가 뭔지 아는 남자다).
단전에 차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4페이지를 다 읽은 나는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철저히 편집자 관점에서(직업병).
“재밌네. 근데 쓸데없는 말이 넘 많아. 반으로 줄여.”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소식지 글이 나간 후 어린이집 사람들이 남편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전적으로 남편 입장에서 쓴 편파적인 글이었지만 뭐 남편이 그렇게라도 행복하면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 나도 맨날 남편을 소재로 글 쓰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남편은 이 글 덕분에 “글 좀 쓴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심지어 볼드저널 편집장님도 남편분의 위트있는 글 때문에 우리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할 정도였으니. 남편은 엄청나게 기고만장해졌다.
지난 몇 년간 우리 부부는 분명 위기의 부부였다. 육아분담, 시가와의 관계, 남편과 나의 커리어… 핵심은 불평등이었다. 남들은 그 정도면 훌륭한 남편이라 했지만 내 기준에서는 늘 부족했다. 우리 관계가 불평등하다고 생각했고, 불평등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고 믿었다. 남편을 벼랑 끝까지 몰고가서 싸우고 또 싸웠다. 진지하게 탈혼을 꿈꾸기도 했다.
결국 남편은 워라밸을 지킬 수 있는 작은 회사로 이직했고, 육아의 중심추는 평형을 맞춰가고 있다. 명절에는 설에는 시가, 추석에는 친정 번갈아 간다. 그 사이 아이는 하루하루 크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 만큼 쑥쑥 자랐다.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믿었다.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우리가 위기를 극복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처럼 위기에 처한 부부들에게 우리의 결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인터뷰에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기자가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 역할, 아빠 역할 이외에 재밌는 일, 하고싶은 일이 있냐고.
답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요리하는 건 남편의 오랜 취미였다. 남편은 언젠가 작은 식당을 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이직하기 전 한 달 정도 쉬었을 때도 남편은 한식 조리사 자격증 준비를 했다.
남편 입에서 전혀 예상 못 했던 말이 나왔다. 남편은 요즘은 뭘 해도 예전처럼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요리를 해도 바베큐를 해도 예전같지 않다고.
그나마 일하는 게 재밌었던 것 같은데 일을 열심히 하려면 아내와 아이가 계속 희생해야 하니까 이제 그럴 수도 없다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위기의 남편이네”라는 말이 나왔다.
20대 초반에 처음 만나 연애 8년, 결혼 생활은 이제 7년 가까이 되어간다. 누구보다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된 후 내가 사라진 것 같아 불행하다고 느꼈는데, 남편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걸까. 내가 남편을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김지영 앞에서 먼저 울어버린 정대현처럼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니가 왜 울어...).
올해 계획이 하나 생겼다. 남편과 나의 ‘사랑과 전쟁’ 이야기를 쓰는 것. 글쓰기는 마감이 있어야 하니까, 브런치에 공식적으로 목표를 남긴다.
그 전에 저희 부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서점에서 볼드저널 15호를 찾아주세요(기승전홍보...). 제목은 '84년생 황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