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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Aug 20. 2021

결혼 8년간 주방을 외면한 이유

우리가 너무 쉽게 잊는 것들에 대해

뜨신 집밥이 먹고 싶어 결혼했다. 혼자 산 지 9년, 내가 만든 음식은 아무래도 맛이 없었다. 한참을 부엌에서 씨름해도 만드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았다. 햇반도 라면도 밖에서 사먹는 음식도 지겨웠다. 


남편은 한때 요리사가 되는 게 꿈이었을 정도로 음식 만드는 것도 맛있는 음식 먹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남편 덕분에 미식의 세계에 눈을 떴다. 결혼 9년차, 여전히 주방은 전적으로 남편 담당이다. 여기에는 장보기, 배달 음식 주문 등 음식과 관련된 모든 게 포함된다. 


남편이 밥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실눈을 뜨고 묻는다. 그럼 너는 뭐 하냐고(만약 내가 남편이었어도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밥 하는 일만 집안일은 아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늘 어질러지고 더러워진다. 헨젤과 그레텔도 아닌데 아이는 지나가는 자리마다 물건을 흩뿌리며 좁은 집안을 활보한다. 나는 집을 수시로 치우고 빨래를 돌리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포함해 온갖 쓰레기를 처리한다.


가사 노동의 균형이 깨진 건 코로나19로 내가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집에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집안이 지저분해도 그러려니 했다. 집에 하루종일 있으니 해야 할 집안일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아까웠다. 그 시간에 일을 더 하지. 창업 초기라 늘 시간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재택근무가 1년 넘게 장기화되면서 더는 엉망인 집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화장실 갈 때, 소파에 잠시 누워 쉴 때마다 집안 구석구석 '나 좀 치워주세요' 기다리고 있는 장난감, 옷더미, 설거지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날이 더워지면 냄새까지 났다. 


재택근무 하다 빨래 돌리고, 재택근무 하다 설거지하고, 재택근무 하다 집 정리하고. 아이가 어린이집 못 갈 때는 재택근무 하다 애 보고. 그래도 밥을 안 하는 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까웠다. 그 시간에 일을 더 하지. 


남편이 준비해 놓은 음식을 데워먹거나 그마저 귀찮을 때는 라면, 짜장라면, 비빔면을 돌아가며 끓여 먹었다. '먹었다'보다는 '떼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만드는 것부터 먹는 것까지 10분도 안 걸렸다. 남편도 나도 지친 저녁과 주말이면 자주 배달 음식을 시켰다. 집에는 배달 음식 쓰레기가 쌓였다. 



집안일이 왜 그리 싫었을까

 


▲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집안일의 총량도 늘어났다. ⓒ unsplash

 


더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건 산 속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캠핑장에서 고기를 구워먹다 남편과 대판 싸웠다. '니가 구운 고기는 안 먹어.' 다음 날 아침까지 쫄쫄 굶었다. 아침에는 내 손으로 밥을 해 먹으려는데 할 수 있는 게... 참치 주먹밥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재료 준비도 요리도 모두 남편이 해 왔으니 나는 주방 살림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전날 먹다 남은 차갑고 딱딱한 밥을 주먹밥으로 만들어 먹는데 인생 잘못 살았구나 자괴감이 밀려왔다. 내 입과 뱃속에 들어가는 밥조차 내 손으로 못 해 먹다니. 그러고 보니 나는 고기도 제대로 구울 줄 몰랐다. 늘 남편이 구워줬으니까. 집에 소금, 설탕이 어디에 있는지도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도 관심 없었다. 


이렇게 살다 아내가 카레와 곰국을 끓이면 두려워 하는 은퇴 후 가장처럼 되는 게 아닐까. 입맛은 집밥에 최적화 돼있는데 한평생 제 손으로 쌀 한 번 씻어본 적 없는, 자기 돌봄 능력이 없는 남성들. 위기감을 느꼈다. 


왜 그리 밥 하는 게 싫었을까. 사실 밥뿐만 아니라 모든 집안일이 싫었다. 밥까지 하고 싶지 않았을 뿐. '밥은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전형성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저희 집은 남편이 밥하는데요. 저는 밥 안 해요" 말하면 당황하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시간이 아까웠다.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티가 안 나는데 안 하면 티가 났다. 그리고 무한 반복됐다. 이건 분명 노동인데 딱히 보람도 없고 고마워하는 사람도 돈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엄마의 노동을 당연시 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의미 있고 숭고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동시에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아은 작가가 쓴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주부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식구들에게 아침밥을 지어 먹이고, 식구들이 입고 나갈 옷을 세탁하고, 집 안 곳곳을 청소하지만, 그들의 노동은 '일'로 인정받지 못한다. 주부가 자기 아이를 키우면 '집에서 노는' 여성이 되고 옆집 아이를 키워주고 돈을 받으면 (혹은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면) '일하는' 여성이 되어 국민 총생산을 높이는 공신이 된다.


정 작가는 경제학은 기본값을 철저히 '남성'으로 상정한다며 "공식적인 영역에 여성이 하는 일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노동이 보이지 않게 되며, 그 노동의 수행자인 여성은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게 된다"고 말한다. 


가정 밖에서 가사 도우미, 육아 도우미, 청소노동자, 요양보호사, 간병인 등으로 일해도 돌봄 노동자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원래 여성이 공짜로 했던 일이라는 사회적 인식 때문이다. 


돌봄의 가치를 폄하하는 사회가 문제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다만 그 저평가 받는 노동에서 나는 열외이고 싶었다. 학벌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릴 때는 집안일 대신 공부를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집안일 대신 커리어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게 훨씬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가성비도 잘 나오는 일이라 믿었다. 



일만 생각해도 괜찮은 사회



▲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다. ⓒ unsplash

 


친정 엄마는 늘 말했다.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우리가 조금만 능력이 있었어도 너네가 덜 힘들었을 텐데. 나는 엄마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 생각했다. 내가 잘나서 혼자 어른이 된 줄 알았다. 


서른 셋에 아이를 낳고 똑똑히 알게 됐다. 갓난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혼자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걸. 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바로 그 티도 안 나고 돈도 안 되는 돌봄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걸. 누군가 매일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집을 치우고 아플 때 챙겨주고 살뜰히 돌봐준 덕분에 말이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스스로를 돌보고 또 누군가를 돌보며 평생 살아갈 수밖에 없다. 타인의 돌봄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타인과 자신을 돌봐야 하는 어른이 되고 타인의 돌봄이 필요한 노인으로 늙어간다. 돌봄을 하찮게 여기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자주 잊는다. 


최근 한 대선 후보의 '주 120시간 노동' 발언이 논란이 됐다. '노동자가 원한다면 일주일에 120시간 바짝 일하고 이후 마음껏 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들으며 궁금했다.


'주120시간 일하는 내내 밥은 누가 하고 집은 누가 치우지? 마음껏 쉬는 내내 밥은 누가 하고 집은 누가 치우지? 만약 그 주120시간 일하는 사람이 양육자라면 애는 누가 돌보지? 집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누가 돌보지? 본인이 아프면 누가 돌봐주지?' 오직 '일'만 생각할 수 있는 투명한 뇌 회로가 놀라웠다. 


돌봄은 '집사람'이 하거나 외주에 맡기고 오직 일에만 집중해도 되는 사회. 우리는 그런 일 중심 사회에서 살아왔다. 코로나19 팬데믹 시대, 돌봄은 그 어느 때보다 위기에 처해 있다. 어린이집 휴원, 온라인 수업, 재택 근무… 집에 머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돌봄 부담도 늘어나고 있다. 간호, 청소, 간병 등 유급 돌봄 노동자들은 코로나 감염 위험과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돌봄의 주체는 대부분 여성이다. 언제까지 여성들의 그림자 노동에 의존하며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을까? 여성들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2017년 런던에서 학술 모임으로 시작한 단체 '더 케어 컬렉티브'가 2020년 발표한 <돌봄선언>에서는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 되고 중심에 놓이는 '보편적 돌봄'(universal care) 모델을 제안한다.


여기에서 돌봄은 가까운 친족만을 돌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돌봄을 가족과 시장에만 의존하면 도와줄 가족이 없는 사람들, 사기업의 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만한 돈이 없는 사람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돌봄은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비생산적인 일로도 여성의 일로도 치부되어서는 안 되고, 임금노동 영역에서 가난하거나 이민자이거나 유색인종인 여성들의 일로 떠맡겨져서는 안 된다. 목표는 사회 전체가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대목에 밑줄을 긋는다. 돌봄에는 짐만 있는 게 아니다. 돌봄에는 보람도 있다. 돌봄의 가치가 저평가 되고 한쪽 성에만 돌봄의 책임이 쏠리다 보니 돌봄의 기쁨을 만끽할 기회를 빼앗겼을 뿐이다. 여성, 남성 모두. 나도 마찬가지다.

 

나 혼자 태어나 나 혼자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사회는 돌봄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평가받고, 여성이 주로 하고.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여성이 돌봄하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돌봄의 일을 나누고 여성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난 11일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든 사람이 돌봄의 일을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돌봄선언>에서는 돌봄 중심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현재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의 삶을 국민이 책임져야지 왜 정부가 책임을 집니까"라고 당당히 말하는 대선후보가 존재하는 2021년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 급진적인 주장일까? 이번 대선에서는 부디 생산적인 논의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 그래서 밥은 어떻게 됐냐고? 이번 여름에는 6살 아이와 함께 김밥을 말아 세 식구가 나눠 먹었다. 맛있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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