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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Oct 25. 2021

남편의 김장

그건 명절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김치가 똑 떨어졌다. 김장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맛김치를 샀다. 시중에서 산 김치는 처음에는 맛있는데 먹다 보면 이상하게 질린다. 김치가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김치가 있으니까 먹는 기분이랄까.


3년 전, 결연하게 명절 투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김치가 똑 떨어졌다. 이번 추석에는 양가 어디도 가지 않겠다고, 내년부터 설날에는 시가에만 추석에는 친정에만 가겠다고 선언한 후 한동안 시가와 교류를 끊고 지냈다. 시가에서는 명절에 아들, 며느리, 손자가 오지 않는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시부모님에 실망했다. 처음에는 내가 뭔가 크게 잘못했나 겁이 났고, 다음에는 ‘이게 이 정도로 못 받아들일 일인가’ 화가 났다. 우리 시가는 다르다 생각했는데 결국 다를 게 없구나 냉소했다. 미련 없이 시가 단톡방을 나왔다.


당장 아쉬운 건 육아 도움이었다. 주말이면 친정보다 가까운 시가에 아이를 데리고 찾아가거나 시부모님이 서울에 와서 아이를 돌봐줬다. 덕분에 나도 남편도 평일 내내 쌓인 피로를 잠시라도 풀 수 있었다. 이제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 내내 남편과 둘이 온전히 육아를 해야 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다.


명절 보이콧을 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원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성인이라 생각했다. 결혼할 때 양가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았다. 못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대신 부모님은 우리의 삶에 간섭하지 않았다.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서로 생각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결혼 날짜를 정하는 것부터 스드메 없는 셀프 결혼식을 준비하고 낡고 좁은 전셋집을 대출받아 구하는 것까지 모두 우리 스스로 결정했다.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신혼 생활을 시작하는 지인들이 부럽다가도 온전히 우리만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묘한 자부심을 느꼈다. 진짜 어른, 독립된 인격체가 된 것 같았다.



어른이라는 착각


원가족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건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바쁜 친정 엄마를 대신해 시어머니에게 산후조리를 부탁했다. 1년의 육아휴직 후 복직을 앞두고 시어머니와의 동거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이 잘 보고 살림 잘하는 시어머니만 있다면 걱정 없이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론은 ‘어떻게든 우리가 낳은 아이 우리 힘으로 키우자'였지만 손 많이 가는 집중 육아기 아이를 키우면서 육아 독립은 쉽지 않았다.


절망스러웠다. 원가족에서 벗어나 이제야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부모님에게 그것도 시부모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러면서도 남들만큼 부모님에게 육아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속상했다. 동시에 죄책감도 느꼈다. 시어머니는 40년 동안 시어머니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혼자 사는 친정아버지도 챙겨야 했다. 평일에는 일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 손자, 며느리 돌봄까지. 주말에 시부모님에게 아이를 맡기고 쉬고 있으면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당장 우리가 살아야겠으니 꾸역꾸역 시부모님을 찾았다.


육아 도움보다 사실 더 아쉬운 건 반찬이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시어머니는 신혼 초기부터 한 달에 한 번 택배로 반찬을 가득 만들어 보내줬다. 짧게라도 꼭 손편지를 넣어서. 나는 회사에 점심 도시락을 싸다녔는데 시어머니의 반찬에 모두 감탄했다. 장조림, 코다리찜, 각종 나물 반찬. 냉장고는 늘 시어머니의 반찬으로 꽉 찼다. 우리의 입맛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다.


시어머니의 친정에서는 배추와 고추 농사를 지었다. 매년 김장철이면 무와 배추 뽑는 것부터 시작해 온 식구가 대대적인 김장을 했다. 배추김치, 깍두기, 알타리, 동치미까지. 김치 통이 모자랐다. 부산의 젓갈 맛 가득한 김치만 먹어오던 내게 서울식 깔끔한 김치는 신세계였다. 다른 반찬은 없어도 김치는 꼭 있어야 했다.


김장철이 다가왔고 시가에서는 남편에게 김장하러 오지 않겠냐고 연락을 해왔다. 나름 화해의 제스처였다. 남편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뚝뚝한 나의 원가족과 달리 남편의 원가족은 유난히 가족들 간의 정이 깊었다. 시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후 힘든 시기를 함께 겪어서일까. 힘을 합쳐 위기를 헤쳐온 끈끈한 동지 의식이 느껴졌다. 살가운 성격인 남편은 가족들과 자주 연락했고 가족들은 장남인 남편에게 의지했다. 남편은 시가를 찾을 때마다 작게라도 꼭 할머니 선물을 챙겼다. ‘딸 같은 아들’인 남편에게 가족들과 갈등을 겪고 단절되는 경험은 꽤나 괴로웠을 것이다.


나는 아들이 아닌 며느리였다. 아직 시가 가족들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어여부영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래도 남편이 혼자라도 김장에 가겠다 하면 말릴 수 없다 생각했다. 그 또한 남편의 선택이니까. 내가 남편이었어도 분명 고민이 됐을 테니까.



행동은 힘이 세다


결국 남편은 김장 재료를 사서 집에서 김치를 직접 담갔다. 남편과는 8년을 연애하고 결혼했다. 명절을 보이콧했을 때는 결혼 5년 정도 됐을 때였다. 그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면서 남편에게 가장 놀랐던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남편이 절인 배추를 인터넷으로 주문했을 때였다.


시가 중심의 명절 문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결혼 초기부터 했다. 그런데 5년이 지나서야 명절 투쟁을 했다는 건 5년의 시간 동안 고민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남편은 명절 때마다 시가에만 가게 되는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지만 화목한 가족의 평화를 깨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고작 1년에 두 번인데. 웬만하면 내가 참아주기를 바랐다. 본인이 더 잘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남편은 가사도 육아도 잘했다.


나는 더는 불평등한 명절을 견딜  없었다. 아니. 견디고 싶지 않았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남자  집안에 먼저 가야 하는 처지,  자신이 아니라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로 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결혼을 지속하느냐의 문제, 우리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었다. 남편은  질문의 무게를 알았고 명절 투쟁에 동참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직접 김치를 담갔다. 그때 나는  사람과 계속 살아가도 괜찮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사람과 결혼하기를 잘했다는 안도감도 함께.


남편은 말했다. 이렇게 부모님에게 실망하면서, 또 부모님을 실망시키기도 하면서 진짜로 어른이 되는 것 같다고. 그제야 진정으로 원가족으로부터 독립해 새로운 가족을 꾸린 것 같았다. 결혼한 지 5년 만에야 말이다.


남편이 처음으로 직접 담근 김치는 물이 생각보다 많이 나왔지만 맛있었다. 이상하게 그 김치를 먹을 때마다 마음이 아렸다. 행동은 힘이 세다. 남편이 김장을 통해 나를 지지하자 나도 남편을, 남편의 가족을 점점 이해하려 노력하게 됐다. 어설픈 미움이 옅어진 자리에는 연민이 남았다.


시부모님에게도 명절은 그저 명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유교 사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했는데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고, 자기들 생각이 옳다고 선포하는 아들과 며느리가 서운하고 괘씸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평등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어른’의 목소리를 냈지만 육아도 살림도 어른처럼 독립하지 못했다. 원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은 경제적, 물리적 독립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미처 몰랐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때부터 남편과 나는 우리 가족에는 나, 남편, 아이 세 사람만 포함된다고 정의하기로 했다. 독립된 공동체가 되기로. 그만큼 책임도 커졌다. 다행히 아이도 그새 커서 육아 부담은 줄었다.


시가와의 관계는 그전만큼 허물없지 않지만 훨씬 담백해졌다. 도움을 받을 때는 늘 경계를 두려 노력한다. 무엇보다 나는 세상이 말하는 며느리가 되려 애쓰지 않는다. 시부모님도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어쩌면 포기한 걸지도. 여전히 단톡방에는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앞으로도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명절은 내게 전혀 부담스러운 날이 아니다. 그냥 수많은 날 중 하나일 뿐. 이번 추석에는 친정 부모님과 여행을 떠났고, 시부모님은 시부모님대로 여행을 갔다. 가끔 생각한다. 명절이 뭐길래.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걸까. 그건 명절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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