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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Nov 01. 2021

두 여성 형사의 '애쓰는 삶'이 구한 것

[나를 키운 여자들]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속 그레이스와 캐런

캐런 듀발(메릿 웨버)은 형사이자 두 아이의 엄마다. 역시 형사인 남편 맥스는 캐런과 교대로 아이를 돌본다. 캐런의 등장 장면은 여러모로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푸석하고 무거운 얼굴로 운전 중인 캐런. 스피커폰으로 남편에게 아이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통화가 끝난 후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려온다. 캐런은 바로 현장으로 달려간다. 


수색이 진행되는 현장에서 캐런은 강간 피해자 앰버를 만난다. 앰버를 자신의 차에 데리고 가서 신중하고 세심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는 캐런. 자신의 행동을 자꾸만 검열하는 앰버에게 캐런은 단호하게 말한다. 

 

앰버 네 결정을 해명하지 않아도 돼. 네가 누구한테 말하고 언제 말할 건지는 전적으로 너한테 달렸어.


앰버를 존중하고 지지하며 수사의 맥락과 절차를 설명하는 캐런의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슬펐다. 3년 전, 마리(케이틀린 디버)에게도 캐런 같은 형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성범죄 피해자에게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이야기'

 


▲ 경찰과 사회가 마리의 피해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규정하는 순간, 더욱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줄줄이 벌어진다. ⓒ 넷플릭스

 


2008년 워싱턴주. 청소년 자립 시설에 사는 10대 여성 마리는 복면을 쓴 남성에게 강간을 당한다. 마리가 성폭행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순간부터 기계적이고 고압적인 수사가 시작된다. 경찰은 몇 번이고 마리에게 반복적으로 진술을 요구하고, 마리는 몸과 마음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자신이 강간당했음을 입증해야 한다. 마리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또요?"다.


마리의 위탁모 등 주변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피해자다움'을 근거로 마리의 진술을 의심한다.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마리가 겪어야 했던 불운한 과거는 마리가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근거가 된다. 두 남성 경찰은 마리의 발언에서 모순점을 찾아내 마리에게 허위 진술을 했다고 자백하라 강요한다. 


경찰과 사회가 마리의 피해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규정하는 순간, 더욱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줄줄이 벌어진다. 마리의 신상이 온라인에 공개되고, 마리는 집도 잃고 직장도 잃고 친구도 잃는다. 심지어 경찰은 허위 신고로 시민의 안전을 위협했다며 마리를 고발하기까지 한다. 


2011년 콜로라도주. 캐런은 남편이 일하고 있는 경찰서에서도 앰버가 겪은 것과 같은 형태의 연쇄 강간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다른 경찰서 소속인 캐런과 그레이스 라스무센(토니 콜렛)은 합동 수사를 시작한다. 역시 기혼 여성인 그레이스는 캐런이 형사 초년생 시절 놀라운 활약을 보여줬던 선배이기도 하다. 캐런이 깊은 물 같다면 그레이스는 거대한 불같다. 


두 사람이 성범죄 수사 과정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감탄스럽다. 그레이스는 기억이 사라져 미안하다는 피해자에게 그건 자연스러운 방어기제라며, 사과하지 말라고 말한다.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성범죄 피해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 성범죄 대상이 되었을까 끊임없이 자문한다. 진술이 일관되지 못하거나 조금이라도 튀는 행동을 하면 피해자답지 못한 이상한 여성이라며 신상이 털리고 피해의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마리는 강간범에게 1차적으로, 경찰과 사회로부터 2차적으로 반복해서 공격당한다.

 

강도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성범죄 피해자만 보면…


마리의 변호사가 하는 이야기는 '가짜 미투'라는 말이 여전히 존재하는 2021년의 현실과도 그리 멀지 않다. 입맛이 쓰다. 



범인 잡는 것만큼 중요한 일들

  


▲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는 기존의 남성 중심 범죄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전개된다. ⓒ 넷플릭스

 


넷플릭스 웹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는 기존의 남성 중심 범죄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전개된다. 보통의 범죄 드라마가 범인을 찾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이 드라마는 두 여성 형사가 성범죄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이는 단순히 강간 사건 1건 정도로 치부되어 비인격적 대우를 받아야 했던 마리의 이야기와 지독하게 대비된다.


그레이스와 캐런은 성범죄 피해자를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하며 마음을 살핀다. 이건 두 사람이 같은 여성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그레이스는 함께 일하는 남성 동료 태거트의 미온적 태도에 분노하며 캐런에게 말한다. 

 

누구도 여성 대상 폭력 자료를 들여다보지 않아. 남자 강간율도 여자만큼 높으면 어떨까? 태거트가 밤에 장 보고 가다가 낯선 사람한테 후장 따일까 걱정해야 한다면? 저 사람 분노는 어디에 있어?


드라마에서 가장 숙연해지는 장면. 지금도 15년 전 처음 맡은 강간 사건 꿈을 꾼다는 그레이스에게 캐런은 말한다. 자신도 그렇다고. "디자 존스. 16살 생일을 하루 앞둔 애였죠(캐런)." "메리 팻 오언스. 32살. 세 아이의 엄마(그레이스)." 한때 뉴스에 잠시 회자되고 말았겠지만 두 사람의 삶에 깊이 새겨진 이름들. 단순히 피해자가 아닌 서사를 가진 인간이었던 여성들이다.  


8회로 구성된 드라마에는 직접적인 성범죄 묘사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피해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범인은 잡히지 않고 공권력은 무력하다. 피해 여성들의 무너진 삶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무거워 한 회 한 회 보는 게 괴로웠다. 그레이스와 캐런이 여성이기에, 여성이 겪어야 했던 피해에 더 민감하고 더 분노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며 수사하는 것은 경찰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직업윤리이기도 하다. 그 당연한 윤리가 현실에서는 너무 쉽게 깨진다. 


기혼 여성인 두 사람의 삶의 한 축에는 가족이 있다. 캐런은 집에 와서 일을 하면서도 자다 깬 아이를 돌보고, 그레이스는 남편과 식사를 하며 일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직업인인 동시에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이기도 하다. 수사 도중 아이와 통화하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남성 동료에게 캐런은 말한다. 가족 돌보는 일로 사과하지 말라고. 그 말이 그렇게 든든하게 들릴 수 없었다. 


드라마에는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다. 그레이스는 아이를 재울 시간에도 퇴근하지 않는 캐런을 걱정한다.

 

일이 중요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일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놓으면 문제에 부닥치게 될 거야. 물론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 내려놓는 게 쉽지 않지. 하지만 그게 생존 기술이야. 그런다고 나쁜 경찰이 되진 않아.(그레이스)


캐런은 자신이 맡았던 가정 폭력 사건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퇴근 후 동료들과 잠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이, 감옥에 들어갔다 보석으로 풀려난 가해자 남편이 아내의 다리뼈와 두개골을 깨뜨렸던 사건을. 캐런은 말한다. 삐끗할 기회는 수도 없이 많다고. 그래서 내 안의 희미한 목소리가 집에 가지 말라고 하면 거기에 집중하려 한다고. 


누구보다 일에 진심인 그레이스는 캐런이 걱정됐을 것이다. 동시에 범인이 언제 또다시 범행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일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캐런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아이들이 자신을 원망할까 걱정하는 캐런에게 그레이스는 자신의 엄마도 일하느라 바빴다고. 하지만 본인은 독립적으로 컸다고 말해준다. 그 말이 그렇게 든든하게 들릴 수 없었다. 동료인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한다. 



일의 윤리를 묻다 


그레이스는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체포의 순간을 기꺼이, 생색 내지 않고 캐런에게 넘긴다. 여성 후배에게 영광의 순간을 만들어주는 여성 선배. 나도 저런 여자 선배가 될 수 있을까. 


체포의 순간은 전혀 극적이지 않다. 캐런은 특유의 무심하지만 단단한 얼굴로 용의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한다. 그리고 용의자의 집에서 꼼꼼하게 증거를 수집한다. 흔한 회식도 없이 그레이스와 캐런은 각자 차를 타고 가정으로 돌아간다. 체포만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축포를 터트리기에 너무 이르다는 걸 두 사람은 잘 알고 있다.  


추가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캐런과 그레이스는 용의자가 3년 전 마리의 나체를 촬영한 사진을 발견한다. 직업 윤리를 놓지 않은 두 사람의 충실하고 고집스러운 수사가 3년의 시간을 넘어 마리의 진실을 입증하는 장면이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결국 나를 지켜야 하는 건 나 자신이라고 냉소하며 살아가던 마리.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두 형사가 마리의 삶을 구원한다. 마리는 "눈을 뜨면 이제는 좋은 일을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설가 황정은은 에세이집 <일기>에서 이렇게 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두 형사 그레이스와 캐런은 한번도 만나지 못한 마리의 삶을 본인들의 일로 돕는다. 누군가의 애쓰는 삶이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구한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며, 픽션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황정은 <일기>


나의 "애쓰는 삶"은 누구를 구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윤리는 무엇일까. 무거운 질문이 꼬리를 문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제가 운영하고 있는 '창고살롱'에서 강연을 하게 됐어요. 창고살롱 멤버 아니어도 참석 가능한 오픈 살롱이고요. 지난 여름, 좋아하는 일로 창업했는데 번아웃을 겪게 됐던 제 이야기(사실 아직도 진행중이에요)를 들려드리려 해요. 결국은 '어떻게 일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참석하시는 분들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일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을 거예요. '쉴 줄 모르는 여자'의 번아웃 관통기가 궁금하다면? 브런치 통해 글을 읽으며 저라는 사람이 혹은 창고살롱의 분위기가 궁금했다면? 신청해 주세요. 11월 10일 밤 9시, 온라인으로 진행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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