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기혼 유자녀 여성이 본 '설거지론'
▲ 퐁퐁남 서사는 전형적인 ‘전업주부 혐오'와 맞닿아 있다. ⓒ pexels
20대 때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밤새 공부해 좋은 직장을 얻은 순진한 남자는 20대 때 밤새 놀며 다른 남자에게 이미 '순결을 뺏긴' 문란한 여자와 결혼한다. 전업 주부인 아내는 남자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히 살고, 남자는 아내에게 경제권을 빼앗긴 채 집안일의 대명사인 설거지까지 '퐁퐁'으로 해야 하는 신세에 놓인다. 20대 남성 커뮤니티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는 이른바 '설거지론' 이다. 설거지라는 말에는 다른 남자가 공짜로 즐기다 버리고 간 '더러운' 여성을 설거지하는 신세가 됐다는 여성 혐오가 담겨 있다. 퐁퐁남은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재산과 학벌, 지위, 남은 여생 전부를 바쳐서 얻은 여자는 가장 찬란하고 빛날 때 공짜였다!"(나무위키)고.
퐁퐁남 서사가 흥미로운 지점은 여성을 '찌꺼기' 취급하면서 사랑에는 진심이라는 거다. 자신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의 사랑을 갈구하는데 아내는 자신을 돈 벌어다 주는 기계 정도로 취급한다는 것. 이 서사에서는 기혼 유자녀 여성이 결혼과 출산 이후 맞닥뜨리는 시월드, 산후우울증, 독박돌봄 등의 문제가 아주 명쾌하게 설명된다. 사랑 없이 조건만 보고 결혼했기 때문에 남편도 싫고 시댁도 싫고 애도 싫다는 것. 여기에 남성 집안 중심 결혼 문화와 가사와 육아의 불평등에 대한 고민은 없다. 아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여성은 남성의 독박벌이에 무임승차해 과실만을 따먹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책임 없는 쾌락"(남성의 경제력)을 누리고, 남성은 "쾌락(사랑) 없는 책임"만 진다. 퐁퐁남은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
퐁퐁남 서사는 전형적인 '전업주부 혐오'와 맞닿아 있다. 잘나가는 남자한테 '취집(취직 대신 시집)' 가서 팔자 고치려는 여자, 아이 어린이집에 맡겨 놓고 남편 돈으로 커피 마시고 브런치 먹으며 수다 떠는 무개념 '맘충'. 한마디로 '팔자 좋은 여자' 프레임이다.
나는 퐁퐁남 서사의 주 공격 대상인 30대 기혼 유자녀 여성이다. 삶의 궤적이 편협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내 주변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놀고먹기 위한 목적으로 전업주부가 된 여성은 없다. 여성도 남성과 다를 것 없다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해 커리어를 이어가던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수시로 경력을 중단해야 하는 위기에 놓인다.
퐁퐁남은 'M자 곡선'에 대해 들어봤을까. 20대 여성 고용률은 남성보다 높지만 30대 이후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며 여성 고용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장시간 노동을 하며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워서, 아직 어린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어서, 친정엄마에게 육아 부담을 넘기는 게 미안해서,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죄인이 되는 것 같아서, 아이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의반 타의반 일을 그만둔 여성이 훨씬 많다. 이렇게 일을 그만뒀다 아이에게 손이 덜 가는 40~50대 때 다시 일을 구해보려 하지만 이전의 경력을 이어갈 수 없는 불안정한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M자 곡선을 거치며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퐁퐁남 서사는 여성들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한 채 여성이 일을 하지 않고 있는 현상에만 주목한다.
▲ 영화 <십개월의 미래> 배 속에 생명체 하나 생겼을 뿐인데 미래의 인생은 정말로 뒤집힌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10월 개봉한 영화 <십개월의 미래>는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을 어떻게 통째로 뒤흔드는지 잘 보여준다. 스타트업 개발자 미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15개의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선명한 것을 확인하고 찾은 산부인과. 이미 임신 10주 차다. 임신 중절을 할 수 있냐고 묻는 미래에게 산부인과 전문의는 임신 중절은 불법이라며 저출산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자 미래는 분노하며 묻는다. 내 인생이 뒤집어지게 생겼는데, 지금 저출산이 문제냐고. 이렇게 하면 저출산이 고출산되냐고.
배 속에 생명체 하나 생겼을 뿐인데 미래의 인생은 정말로 뒤집힌다. 인생을 갈아 바친 회사에서는 임신 사실을 알리자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이건 분명 운명이라며 결혼을 서두르던 남자 친구는 제 앞가림조차 힘들어 보인다. 아이는 분명 함께 만들었는데 임신으로 인한 물리적, 심리적 부담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다. 그러면서도 미래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미안해 한다.
일과 육아 모두 완벽히 해내는 슈퍼맘이 되지 못한 여성은 육아보다 일이 중요한 '독한 년'이 되거나, 남편 돈으로 애나 키우는 '팔자 좋은 년'이 된다. 여성의 삶을 납작하게 바라보는 여성 혐오 속에 여성이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겪어야 하는 수많은 고민과 어려움은 말끔히 거세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사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혼 여성의 단 22.4%만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훨씬 많아졌다.
퐁퐁남이 고작 일주일에 하루이틀 설거지할 때 여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돈 버는 유세로 자신이 먹은 밥그릇 설거지하는 것조차 대단한 일인 줄 아는 남성이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을 돌볼 리 만무하다. 평생 공짜로 타인의 돌봄 노동을 무임금으로 착취하며 살아온 건 누구일까.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 육아 등 돌봄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남성을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신뢰 그리고 배려 속에서 나온다. 사랑할 만해야 사랑할 수 있다. 부디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자.
코로나19가 2년 가까이 지속되는 상황. 여성은 고용 불안과 돌봄 노동 속에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 대체 팔자 좋은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여성의 실제 삶을 반영하지 않은 헐거운 서사를 보면 어린 시절 엄마가 보던 드라마 <사랑과 전쟁>이 생각난다. "저런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고 물으면 엄마는 심오한 얼굴을 하며 답했다. "현실은 더하다"고.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에 빠져 대부분의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자. 퐁퐁남 서사 역시 부디 극히 일부의 생각이기를 바란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