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Dec 20. 2021

수능 다음 날, 선생님에게 했던 말

[나를 키운 여자들] <다가오는 것들> 속 나탈리

마른 몸, 빠른 걸음, 꼿꼿하게 치켜든 얼굴. 나탈리는 늘 분주하고 의연해 보인다. 25년간 함께 살았는데 다른 여자가 생겼다 고백하는 남편에게 나탈리는 차가운 얼굴로 되묻는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혼자 묻어둘 순 없었어? 평생 날 사랑할 줄 알았는데. 내가 등신이지.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프랑스 고등학교 철학 교사다. 역시 철학 교사인 남편 그리고 이제는 청년이 된 두 아이와 함께 산다. 불안증이 심한 나탈리의 엄마는 수시로 나탈리에게 전화를 건다. 호출은 새벽이고 낮이고 시도 때도 없다. 학생들과 잔디밭에 앉아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하던 나탈리는 "지금 가스 밸브 열었다"는 엄마의 전화에 황급히 짐을 챙겨 떠나며 학생들에게 말한다.

 

우리 엄마가 좀 미쳤거든. 내가 돌봐야 해.


나탈리는 엄마의 세 번의 결혼 중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이다. 못 배운 게 한이었던 엄마 때문에 나탈리는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됐다. 딸이 철학 교사인 게 엄마에게는 자랑이다. 엄마에게 자기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탈리는 엄마를 외면할 수 없다. 휴가 중에 엄마가 며칠째 아무것도 안 먹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나탈리는 바쁘게 요양병원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엄마에게 줄 예쁜 꽃을 손에 꼭 쥐고 달린다. 들꽃을 엮어 만든 꽃다발은 애증의 모녀관계를 잘 보여준다. 한국식으로 하면 나탈리는 F-장녀쯤 될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들

 


▲ 나탈리(이자벨 위페르)는 늘 분주하고 의연해 보인다. ⓒ 찬란

 


바람난 남편, 부양해야 하는 엄마. 한때는 공산주의 전단을 뿌리고 소련에 다녀오기도 할 정도로 뜨거웠던 나탈리의 삶은 이제 내리막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위를 하는 고등학생들은 교문 앞에서 나탈리를 가로막고, 나탈리가 집필한 교재는 저조한 판매량 때문에 퇴출 위기다.


그런 나탈리가 유일하게 생기 있어 보이는 순간은 파비앵(로만 코린카)과 함께 있을 때다. 고3 때 나탈리 덕분에 철학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하는 제자. 나탈리는 "틀에 박히지 않고 자유로운", "급진적이고 명료한" 파비앵의 글과 생각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파비앵은 파리를 떠나 친구들과 함께 산에 가서 치즈를 만들고 글을 쓰며 살기로 한다. 엄마의 죽음 후 파비앵이 머물고 있는 공동 숙소를 찾아간 나탈리는 조금은 달뜬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생각을 해. 애들은 품을 떠났고 남편은 가고 엄마는 죽고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20년 내내 남편과 브람스와 슈만만 들었다는 나탈리는 파비앵이 차에서 튼 포크송이 좋다고 말한다. 파비앵은 그 노래가 지겹다고 한다. 책에 저자 이름을 명시할지 말지를 놓고 격론을 벌이는 파비앵과 친구들. 나탈리의 생각을 묻는 파비앵의 친구에게 나탈리는 말한다.

 

급진성을 논하기엔 너무 늙어서요. 예전에 해봤거든요. 다 해봤어요. 그래요, 난 변했어요.


그러자 파비앵의 친구는 무심하게 답한다.

 

세상은 그대로인걸요. 나빠지기만 했죠.


정희진 작가는 <나를 알기 위해 쓴다>에서 "역지사지가 가장 어려운 영역은 나이 차이가 아닐까. 한쪽은 거쳐 왔고, 한쪽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완벽한 비대칭"이라고 말한다. '꼰대'와 '요즘 것들'. 서로는 서로에게 비대칭의 영역이다. 생각과 행동의 일치를 놓고 언쟁을 벌이던 어느 날, 파비앵은 나탈리에게 부르주아라 비아냥거린다.

 

삶의 근간을 뒤흔들지 모를 사상은 외면하시잖아요. 시위나 서명 참여 정도로 스스로를 참여 지식인이라 여기죠. 떳떳한 양심과 변함없는 생활.


나탈리는 말한다. 자신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고. 그저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여름이면 남편의 별장에 가서 휴가를 보내고, 평소에는 충실히 돌봄 노동과 임금 노동을 하며 수십 년을 살아온 나탈리는 다시는 "다 해봤"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파비앵의 독설을 들으며 나탈리는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과 파비앵은 다른 계절을 살고 있다는 걸. 파비앵의 자유와 자신의 자유가 같을 수 없다는 걸.


의연한 척하던 나탈리는 엄마가 남기고 간 검은 고양이 판도라를 끌어안고 2층 방에서 홀로 엉엉 운다.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것 같은 늙고 뚱뚱한 고양이. 10년간 집에서만 사느라 야성을 잃어버린 고양이. 집을 나가 쥐를 잡아 오기도 하지만 결국 안락한 집으로 돌아오는 고양이. 판도라는 나탈리를 닮았다.



열아홉의 내가 서른여덟의 나를 본다면

 


▲ 엄마가 남기고 간 늙은 고양이 판도라는 나탈리를 닮았다. ⓒ 찬란

 


내게도 모든 게 선명했던 시절이 있었다. 고3 수능 다음 날이었다. 수능을 대차게 망친 나는 이 성적에 맞는 대학은 죽어도 안 갈 거라고, 원서 한 장 쓰지 않고 바로 재수를 하겠다고 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은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원서 한 장은 써보지 그러냐고. 너무 대나무처럼 살면 부러질 수 있다고.


그러면서 선생님은 루쉰의 시 <희망> 이야기를 꺼냈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거라고.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는 그 말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라'는 말처럼 들렸다. 비겁한 기성세대. 난 절대 그렇게 안 살아. 19살의 나는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되물었다.

 

다른 사람이 간 길이라고 해서 맞는 길은 아니지 않나요? 저는 다른 길을 갈 건데요.


내일모레 마흔을 앞둔 나는 요즘 산티아고 순례길 영상을 유튜브에서 자주 찾아본다. 꼭 필요한 짐만 배낭에 지고 두 다리에 의지해 800km를 걷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따라간다. 20대만 해도 언제든 훌훌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떠날 수 있다고 믿었다. 30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이라는 걸 꾸리게 되면서 나는 원할 때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얼마 전 친정 아빠가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몇 년 새 급속도로 허리 건강이 안 좋아지더니 급기야 통증이 너무 심해서 일을 그만둬야 하는 상태가 됐다. 어린 시절 아빠와 나란히 걸어본 기억이 없다. 걸음이 빠르고 성격이 급한 아빠는 늘 저만치 앞서서 걸었다. 지난해 아빠가 서울에 왔을 때 함께 공원을 걷는데 한참 뒤처져서 걷는 아빠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내가 나이 든 만큼 아빠도 늙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아빠는 계속 아빠일 줄 알았다.


평생 몸 쓰는 일을 해온 아빠는 칠순이 되어서야 임금 노동을 그만두고 수술을 받기로 했다. 아빠의 수술과 퇴사 소식을 들으며 정말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이제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고 돌봐야 한다. 얼마 후, 시아버지가 무릎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주 새 서울에서 부산과 원주를 오가며 남편과 이야기했다.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고.


그렇다고 해서 10대, 20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냐면 결코 아니다.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고 그때는 그때의 걱정과 고민의 무게가 있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며 그때의 내가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걸 나는 안다. 이제는 그 무엇도 쉽게 확신할 수 없어 자주 혼란스럽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유연해진 건 분명하다.


열아홉 살의 내가 서른여덟의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뭘 그렇게 많은 걸 신경 쓰며 애매하게 사냐고 답답해할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고3 담임 선생님은 열아홉 살 내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이가 든다는 건 '절대', '죽어도' 안 되는 일이 적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고 나탈리는 다시 파비앵의 집을 찾는다. 그새 딸이 출산을 하면서 할머니가 된 나탈리는 파비앵에게 판도라를 입양 보낸다. 자다 일어나 판도라가 없어진 것을 알고 놀란 나탈리는 작업하고 있는 파비앵 뒤편에 능청스럽게 앉아 있는 판도라를 발견한다. 마치 그곳에 살고 있던 고양이처럼 편안해 보이는 판도라. "늙고 뚱뚱하고 검은 고양이를 누가 데려가겠어"라고 했지만 판도라는 새 주인을 찾았다. 판도라는 새 집에서 새 삶을 살아갈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 사이, 대단하지 않아도 새롭게 시작되는 것들이 있다. 반짝반짝 화려하게 빛나지 않아도 삶은 계속된다.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 딸 대신 손자를 품에 안고 노래를 부르는 나탈리는 평온해 보인다. 수많은 세월을 품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느껴진다. 나탈리의 자유는 어떤 얼굴일까. 친정 아빠는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나를 키운 여자들>

취업하고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어지러울 때,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면 뿌옇던 세상이 조금은 선명해졌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을 소개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왕따였던 나를 오랫동안 미워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