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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May 18. 2020

라떼 타령하는 어른이 되기 싫다면

[주영에게] <나의 눈부신 친구>와 현재완료 시제의 글쓰기에 대해

회사 일이 바빠서 편지도 못 썼다고 했지만 사실 이번주에 가장 몰입해서 한 일이 있어. <나의 눈부신 친구>라는 이탈리아 드라마에 빠져서 시즌2까지 정주행한 거야.

어떤 날은 정신 차려 보니 새벽 1시. 또 어떤 날은 밤 10시에 애 재우며 잠들었다가 새벽 1시에 깨서 새벽 4시까지 달린 날도 있어. 참고로 내 출근 시간은 오전 8시야.

할 일이 잔뜩 쌓여있는데 자꾸만 딴짓하고 싶고 미루고 싶고. 드라마는 너무 재밌고. 한마디로 망한 거지. 지금도 나는 마감의 산을 외면하며 이 편지를 쓰고 있어. 나만 망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나의 눈부신 친구



<나의 눈부신 친구> 스틸컷. 왼쪽이 레누 오른쪽이 릴라.


드라마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폴리 빈민가를 배경으로 해. 레누와 릴라, 두 소녀가 주인공이야. 레누는 똑똑한 소녀, 릴라는 아주 똑똑한 소녀야. 릴라는 어디서건 반짝반짝 빛나. 모든 관심과 시선을 빨아들여. 크게 애쓰지 않는 것 같은데 우수한 성적을 받고, 동네 남자들의 뜨거운 애정공세를 받지.

릴라 옆에 있으면 레누는 평범하기만 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 레누는 릴라 곁에 머물고 싶어 해. 그래야 릴라처럼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거든.

집-학교만 오가는 레누의 단조로운 삶과 달리,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릴라의 삶은 다이내믹해. 바람 잘 날 없는 동네 상황은 릴라의 재능과 매력을 가만두지 않아.

릴라는 늘 확신에 차 있고 두려움이 없어.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지. 레누는 그런 릴라를 동경하고 질투하고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경멸해. 많은 우정이 그런 것처럼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반복해. 두 사람은 서로를 잃고 싶어 하지 않아.

여성의 우정이라는 주제도 좋았지만 이 드라마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건 과거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기록하는 방식 때문이었어. 드라마의 주인공은 릴라지만 화자는 레누야.

드라마가 시작될 때 예순 살 할머니가 된 레누는 릴라 아들의 전화를 받아. 릴라가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다는 내용이야. 레누는 릴라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결심해. 장면이 바뀌고 초등학교 1학년 릴라와 레누가 등장해.

그 시절 릴라가 무슨 말과 행동을 했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릴라와 레누 둘 사이에 어떤 기류가 흘렀는지, 자신은 그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그때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레누는 과거의 기억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 자신이 봐온 것과 릴라에게 들은 것까지 전부.


현재 완료 시제의 글쓰기

 

레누는 무쇠솥 같아.

레누는 뭐든 늦게 반응해. 릴라가 쉽게 불타오르고 금세 식는 냄비 같다면 레누는 무쇠솥 같아. 서두르는 법이 없어. 말을 아끼고 자신과 타인을 둘러싼 맥락을 세밀하게 관찰해. 그때 그 상황을 계속 곱씹어. 그리고 글을 써.

영문법에 ‘현재 완료’라는 게 있잖아. have+p.p 생각나지? 과거도 현재도 아닌, 과거와 현재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시제. 과거의 경험을 나타내기도 하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을 나타내기도 하고 과거에 시작돼 현재에 와서야 끝난 일을 뜻하기도 해.

중요한 건 과거에 있었던 일 혹은 시작된 일이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야. 이탈리아어 문법은 전혀 모르지만 레누의 기록은 현재 완료 시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레누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놀라우리만치 솔직하고 통찰력 있게 재해석해. 과거를 대충 퉁치거나 뭉개지 않아. 객관적인 시선으로 릴라와 자기 자신을 바라보려 해. 그 시절 환희와 기쁨뿐만 아니라 미숙함과 잔인함까지 전부. 레누가 어떤 내레이션을 할까 기다리며 재생 버튼을 계속 눌렀어.

 

내가 나를 속이는 걸까. 정말 그토록 아름다웠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수치심도 있었다. 어색함, 굴욕, 혐오도  시절의 일부였다. 그렇다면 기쁨에 젖어서 행복했던 순간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를까?” -레누의 내레이션


요즘 부쩍 추억팔이 하는 일이 많아졌어. 얼마 전, 동기 퇴사 선물로 앨범 만들어주려고 외장하드를 열었어. 옛날 사진 보는데 하나같이 앳되고 예뻐 보이더라.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던 시절.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밤새 술 마시는 것도 가능하던 시절. 육아 때문에 온 몸이 묶여버린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시절. 사진 속 나와 동료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어. 아련 아련 괜히 눈물 날 것 같더라.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어.

그때가 정말 아름다웠나? 정말 행복했나? 물론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 맨날 퇴사하겠다고 질질 짜고 나는 기자 안 맞는 것 같다고 한숨 쉬고 출근길 차에 치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어. 술만 먹으면 힘들다고 울었어.

늘 도망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잘 해내고 싶었어. 징징댐을 받아주는 동료들이 있었지만 불안감과 외로움은 온전히 내 몫이었어.


정확하고 깊게 쓰려해


나도 레누처럼 순발력이 부족해. 말재주도 없어서 해야 할 말을 제때 못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기도 해.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과거를 계속 복기해.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은 왜 그랬지. 이불 킥 백 번쯤 하고는 기억을 이리 곱씹고 저리 곱씹어.  

그럴 때 있잖아. 시간이 흐른 뒤 한 발 물러서서 감정을 걷어내고 봐야만 비로소 그 사건이 내게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될 때. 내게 일어난 일을 겨우 언어화할 수 있을 때. 그럴 때 나도 레누처럼 글을 써. 며칠이 걸리기도 하고 몇 년이 걸리기도 해.

그렇게 글로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건이 나를 통과했다는 예감이 들어. 내가 조금은 투명해지는 것 같아. 내가 계속 글쓰기를 하는 이유야.

너와 내가 쓰는 교환일기를 본 한 지인이 그런 말을 하더라. 내 글을 읽으면 모든 걸 초월한 사람, 마음 편한 사람 같다고. 나는 답했어.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쓰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고.

정제된 글 속의 나와 달리 현실 속 내 안에서는 늘 전쟁이 일어나. 가질 수 없는 걸 욕망하고 남과 나를 비교하고 인정 욕구에 시달려. 성급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줘.

오늘만 해도 5살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말다툼을 했어.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몸은 힘들고 집은 엉망이고. 놀아달라고 책 읽어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모진 말을 쏟아냈어. 그리고 이렇게 후회하는 글을 쓰고 있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비포 선셋>에 이런 대사가 나와. “Memories are wonderful things, if you don’t have to deal with the past” 이 영화를 처음 본 게 10년도 더 됐는데 한 살, 두 살 나이 먹을수록 이 대사가 더 자주 생각나.

과거와 씨름할 필요가 없을 때 추억은 아름다워. 과거와 지지고 볶지 않아도 될 때, 과거가 현재와 분리된 과거일 수 있을 때, 과거를 추억하는 일은 안전해. 그래서 나이 들수록 자꾸만 과거로 도망가고 싶어 지나 봐.

아련한 눈빛으로 그저 과거를 추억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아. 정확하고 깊게 들여다보고 싶어. 현재 완료 시제로 말이야.

드라마 속에서 레누는 계속 읽고 써.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레누는 점점 성장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줄 알고, 학업을 이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엄마에게,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하려는 남자에게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쳐. 더는 릴라에게 끌려가지도 않아.

나도 레누처럼 정확하고 깊게 기억하고 기록하려 해. 과거를 돌아보는 나와 현재를 살아가는 나 사이 시차를 점점 줄여가려 해. 결국 중요한 건 지금, 여기고 미래의 나는 분명 현재의 나를 곱씹고 있을 테니까.

근데 그거 아니? 이 드라마 원작도 있다는 거. 무려 4부작. 그것부터 읽어야겠다.



-5월 17일 나폴리 4부작 앞에서 패가망신 기로에 선 현진

 



현진, 주영 두 여자가 쓰는 교환일기 [엄마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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