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에게] 잔잔바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드디어 인사 발표가 났구나. 고민 많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어찌 됐나 궁금했는데 편지로 전하겠다 해서 엄청 기다렸지. 수시로 카톡 하면서 정작 중요한 소식은 편지로 전한다니. 우리 이제 진정한 펜팔이 된 건가.
나도 너처럼 취재하다 편집부로 가게 된 경우잖아. 지금은 더는 기자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물었어. 다시 취재하고 싶은 생각 없냐고. 직업으로서 취재 기자를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게 내 몸에 맞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거든.
처음에는 진짜 인정하기 어려웠어. 철든 후로 내 꿈은 늘 취재 기자가 되는 거였는데 막상 그 직업이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좌절감이란.
어찌 됐건 나는 내 발로 취재부를 나왔지만 너는 복잡한 사건 때문에 그 끝을 스스로 내지 못 했잖아. 그래서 더 미련이 남는 게 아닐까.
취재 부서에 못 가서 아쉬우면서도 아이를 생각하면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하다고 했지. 그 마음 뭔지 너무 잘 알아.
엄마가 된 후 진로 고민에는 늘 아이라는 상수가 있었어. 2년 전, 회사에 불가역적인 퇴사를 통보하기 이틀 전이었나. 1년에 한 번 열리는 미디어 컨퍼런스에 참석했어. 새로운 미디어 실험을 하는 연사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하고 싶다’ 설레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좌절감이 차올랐어.
‘아이가 있는 나는 저들처럼 일하기 어렵겠구나. 나를 100% 갈아 넣으며 일하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그날도 어린이집 하원 시간 때문에 일찍 자리를 떠야 했어. 지하철역에서 달려 아이 데리러 갔더니 어린이집에 아이 혼자 남아 있더라. 아이가 안쓰럽고 나도 안쓰럽고. 눈물이 났어.
지금은 아이도 많이 컸고 남편과도 지난한 투쟁 끝에 나름의 분업 시스템(?)을 구축했어. 너와 함께 일하던 2년 전보다는 훨씬 살만해졌지.
육아휴직 끝나고 복직 후 처음에는 너무 답답했어. 아이를 낳았어도 여전히 나는 나인데. 임신 전처럼 일의 속도와 성과를 못 내는 게 나 스스로 용납이 안 됐어.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정시에 퇴근하면서도 늘 눈치가 보였어. 감당도 못할 일을 떠안기도 했어.
급하게 휴가 내면서 “아이 때문에”라는 말 꺼내는 게 왜 그리 자존심 상하는지. 몇 번이나 카톡을 지웠다 썼다 했어. 회사에 동료들에게 민폐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어.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남편과 나 둘이서 아이를 키우려고 발버둥 쳤어. 몸도 마음도 늘 벼랑 끝에 있는 기분이었지. 그 시기 썼던 글을 보면 어찌나 절박하고 절절한지.
학창 시절, 체력장 할 때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오래 매달리기, 오래 달리기였어. 악으로 깡으로 하면 되는 것들.
그때가 딱 그랬던 것 같아. 여기서 떨어지면 끝장이라고.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당장 쓰러질 것 같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악으로 깡으로.
물론 오래가지 못했어. 일과 육아를 함께 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긴 마라톤이더라. 이 악물고 눈 질끈 감고 그저 달리기만 해서는 안 됐어.
다행히 이제는 조금씩 내 속도를 찾아가고 있어. 주영이 니가 편지에서 그랬지. “나이가 들수록 회사원으로서나 엄마로서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현실을 어느 정도는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고. 나도 비슷해.
사람들이 물어봐.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글 쓰고 마더티브 운영하고 창고살롱 커뮤니티 기획하고 중간중간 이런저런 프로젝트까지. 지금 너와 내가 쓰는 교환일기도 본업의 기준에서 보면 딴짓이지.
이 모든 일에 나는 100%의 에너지를 쏟지 않아. 아니, 쏟는 게 불가능해. 시간을 뭉텅이로 쓸 수 없으니 토막토막 쪼개서 써. 회사에 있을 때는 회사 일에 집중하고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점심시간 활용해서, 하원하고 아이 동영상 보는 시간에, 아이 재워놓고 다시 일어나거나 새벽에 일찍. 남편과 스케줄표를 정해서 일정을 빼기도 해.
정신없지. 늘 에너지 조절을 해야 하니 감질맛 나. 하나에만 올인해도 모자랄 텐데 달팽이처럼 조금씩 조금씩. 찔끔찔끔. 이렇게 잔잔하게 살다가 그냥 잔잔하게 가는 게 아닐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잔잔바리인가. 아이가 커리어의 걸림돌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잔잔바리로 사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더라. 아이 덕분에 시간과 에너지라는 유한한 자원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고,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더 치열하게 돌아보게 됐어. 그러다 보니 쓰고 싶은 글이 넘치는 사람이 됐고.
중간중간 점검해. 내가 너무 욕심 내거나 무리하고 있지 않은지. 일과 나를 동일시하느라 나 자신은 물론이고 아이, 남편,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 않은지.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업계 최고’나 ‘고액 연봉’과는 영영 거리가 먼 삶일지 몰라. 그래도 지금의 이 정신없고 복잡한 시도들이 결국은 다 ‘내 일’이 될 거라 믿어.
여전히 퇴근길 아이 하원 하러 가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아.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몸은 아이랑 있으면서도 휴대폰을 손에서 못 놓기도 하고. 의욕만 앞서서 이것저것 잔뜩 일을 벌여놨다가 수습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해. 지금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퇴고하고 있어.
가끔은 왜 이리 애쓰며 사나 싶어. 어쩌겠어. 이미 엄마가 되어버렸고, 난 이런 사람인 걸. 취재기자로 살 수 없는 나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현재 내 상황을 인정하는 수밖에. 어쨌든 내일도 우리는 출근해야 하고 애도 봐야 하니까.
-6월 18일. 축 출산 4주년 하루 앞둔 현진
현진, 주영 두 여자가 쓰는 교환일기 [엄마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