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Apr 28. 2020

남은 생은 문란하게 살아볼래

[주영에게] 엄마가 된 후, 섹스는 무거워졌어 

그러게. 우리 교환일기가 어쩌다 보니 코로나 연대기가 돼가고 있네. 곧 5월이야. 날이 더워지는 만큼 (급전개) 이번 일기에서는 뜨거운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해. 바로 섹스 이야기야. 


얼마 전 부너미가 쓴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가 집으로 배송됐어. 펀딩 리워드로 스티커가 함께 왔더라고. 스윽 펼쳐 보고 다른 일하고 있는데 스티커 성애자 날날이가 냉장고에 스티커를 잔뜩 붙여 놓은 거야. 


‘섹스는 관계다’‘오르가슴은 인권이다’‘섹스도 함께 피임도 함께’ 


헉. 나중에 손님이 와서 이걸 보면 어떻게 하지? 시부모님이 보면? 황급히 뗄까 하다가 뭐 어때, 다 맞는 말인데 하고 내버려 뒀어. 남편과 웃으며 말했어. “누가 보면 우리 엄청 개방적인 집인 줄 알겠다.” 



제가 지금 그럴 정신이 없는데요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부너미) 책 표지 @와온


아이 낳고 한동안 섹스 같은 건 꿈도 못 꿨어. 10시간 넘는 진통 끝에 4kg 넘는 우량아를 자연분만으로 낳느라 회음부 절개를 많이 했고, 힘을 너무 세게 주느라 치질까지 생겼어. 도넛 방석 없이는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었고, 치질과 변비 때문에 화장실 가는 게 두려웠어. 나도 모르게 퍽 하고 오줌이 샐 때도 있었어. 


내가 지난해부터 산후운동 소셜벤처에 다니잖아. 지금은 그게 임신과 출산으로 골반저근(골반 바닥을 해먹처럼 감싸고 있는 근육. 나도 회사 들어와서 처음 들어봤어)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걸, 많은 산후 여성들이 복압성 요실금 증상을 겪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때만 해도 진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상실한 기분이었어.


조리원에서 나온 후에는 밤이 오는 게 두려웠어. 애가 밤에도 수십 번씩 깼거든. 아이는 두 돌 될 때까지 통잠을 못 잤어. 잘 때 꼭 옆에 사람이 있어야 했고 작은 소리, 불빛 하나에도 예민했어. 남편과 나는 번갈아가며 아이와 한 몸이 되어야 했어.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질염을 달고 살았어. 


질염 때문에 산부인과에 가면 마지막 성관계가 언제였는지, 임신 가능성이 없는지 꼭 묻더라. 나는 멋쩍어하며 답했어. 네? 제가 지금 그럴 정신이 없는데요. 


육아 조력자 없이 아이를 돌보는 건 극기훈련 같았어. 밥 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데 섹스가 웬 말이냐. 기적처럼 자유 시간이 생기면 걸신들린 사람처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어. 우리에게는 그게 훨씬 더 간절한 ‘거사’였어.

 


무거워진 섹스 


잠 좀 자자, 잠 좀. 영화 <툴리> 스틸컷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통잠을 자기 시작하자 그제야 섹스할 정신이 들더라. 엄마가 된 후 섹스는 그 무게가 달라졌어. 콘돔을 사용한다고 해도 100% 피임이 되는 게 아니잖아. 이 섹스가 임신, 둘째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게 두려웠어.


“아이가 잠자는 틈을 노려 어쩌다 하는 섹스는 편안하고 황홀한 섹스가 되기 어렵다. 혹여나 둘째를 임신할까 봐 두려운 마음도 섹스를 망쳤다. 결혼했다고 해서 임신 부담 없이 자유로운 섹스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외롭고 혹독한 육아를 경험하고 나니 임신 공포는 더 심해졌다.”

-이성경, ‘왜 피임 수술까지 나의 몫일까’,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p.151-152


내가 마더티브에 실은 글 중에 ‘남편 몰래 야한 영화 보다 생긴 일’ 있잖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3부작을 보고 쓴 글. 내일이 없을 것처럼 밤낮없이 섹스만 하던 그레이는 아나스타샤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황스러울 정도로 당황해. 


피임 주사 제대로 안 맞았냐고 아나스타샤를 책망하면서 자기는 아빠가 될 준비가 안 됐다고 해. 아이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그레이에게 아나스타샤는 말해. “섹스하면 애는 생겨요. 우리는 엄청 많이 했고!” 그 장면을 보는데 헛웃음이 나오더라. 아니, 미스터 그레이씨. 섹스 기술은 그렇게 많이 알면서 섹스하면 애가 생긴다는 건 몰랐던 거예요? 


섹스의 즐거움만 생각하기엔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어. 네 돌이 지난 아이는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매일매일 예뻐. 하지만 이제는 잘 알지. 이 아이가 이렇게 크기까지 나를 얼마나 갈아 넣어야 하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엄마라는 이름 사이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분투해야 하는지.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던 임신, 고문 같았던 출산, 아이의 손발이 되어줘야 했던 집중 육아기. 주영아,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 섹스가 무거워진 이유야. 



내 남편이 섹시해 보일 때 


우리 집 냉장고에 붙어 있는 스티커@부너미


그렇다고 해서 ‘최고의 피임법은 안 하는 것’이라며 계속 섹스를 피하며 살고 싶지는 않아. 출산 후 내게는 전에 없던 성욕이라는 게 생겼어. 배란일이 되면 온 몸의 세포가 살아나고 야한 꿈을 꾸기도 해(현실은 너무 피곤해서 9시에 애 재우다 곯아떨어지는 날이 더 많지만).


임신 전까지만 해도 섹스는 남편이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였어. 내가 먼저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은 거의 없었지. 자신의 성욕을 드러내는 여자는 밝히는 여자, 문란한 여자라고 은연중에 배우며 자라왔어. 어린 시절 잘못된 성교육 때문에 섹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강했고. 


아이를 낳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되면서 내 몸의 욕구를 들여다보게 됐어. 운동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내 몸을 더 잘 알게 됐고. 또 하나. 남편과 나의 관계가 달라졌어.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저자들은 말해. 섹스는 관계라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즐거운 섹스도 가능하다고. 


수년간의 치열한 투쟁 끝에 남편과 나의 육아, 가사 분담 비율은 균형을 찾고 있어. 왜 나만, 왜 여자만. 억울해지는 순간이 꽤 많이 줄었어.


내 남편이 섹시해 보이는 건 이런 순간들이야. 아이가 갑자기 열날 때 본인이 휴가 내고 아이 볼 테니 나는 내 일 하라고, 걱정 말라고 이야기해줄 때.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를 내 그릇 앞에 제일 먼저 놓아줄 때, 주말 아침 조금 더 자라며 (아이 데리고) 방문 닫고 나갈 때. 아이 눈높이에서 땀 뻘뻘 흘리며 아이와 즐겁게 놀아줄 때. 남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 남편과 내가 정말로 한 팀이 된 느낌. 평등한 관계 속에 싹트는 성욕.


“앞치마를 두르고 나를 반겨 주는 남편이 얼마나 섹시한지. 아이를 재우고 지친 몸으로 밥상을 차렸을 마음을 생각하니 얼굴도 예뻐 보인다...중략...집안일을 해야 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의 섹시한 뒷모습에 집 나간 성욕이 아랫배를 간지럽힌다.” 

-도이, ‘집안일 하는 남편이 섹시하다’ <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p. 83


요즘 나는 남편에게 내 욕망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려 노력해. 임신의 공포도 섹스의 즐거움도 함께 나누려고 해. 서른여섯 해 동안 충분히 조신하고 정숙하게 살았으니 남은 생은 문란하게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일단은 체력부터 길러야겠다. 



-4월 28일. 어젯밤에는 아이보다 먼저 꿈나라로 간 현진 



현진, 주영 두 여자가 쓰는 교환일기 [엄마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거진의 이전글 쉽게 웃지 않는 여자가 될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