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영화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3부작을 다 보았다
넷플릭스 메인 화면에서 뭘 볼까 기웃거리는데 어마마?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새로 올라왔다. 이거 뭐, OST만 좋은 쓰레기 영화라며? 심지어 그렇게 야하지도 않다며?!
했지만 내 손은 이미 재생 버튼을 눌러버렸고(남편이 설마 내 계정 보진 않겠지). 어머, 이게, 뭐야, 대체,하면서도 나는 완전 빠져버렸다. 누구한테? 아나스타샤 역을 맡은 다코타 존슨에게. 와, 진짜 예쁘다. 소피 마르소처럼 청순하면서도 은근히 섹시하고. 저 물기 어린 목소리 어쩔 거야. 흠... 하고 숨 쉬는 소리도 정말 매력적이다.
반면 남자 주인공은 제이미 도넌은 흠... 남주만 좀 더 매력 있었어도 이 영화는 분명 더 흥행했을 것이다. 엄청 치명치명한 척 젊은 재벌 CEO 연기를 하는데 왜 이렇게 없어 보이는 거지. 재벌인 거 빼면 그냥 변태 스토커인데.
(바로 본론으로) 자, 이 영화의 포인트인 섹스신! 이 영화를 두고 '엄마 포르노'니 뭐니 하는데 책은 어떤지 몰라도 영화는 별로 안 야하다. 이건 정말 영화구나. 저건 진짜 연기구나, 싶달까. 자세한 얘기는 네이버 영화 네티즌 평으로 대신하겠다.
“맹세컨데 내가 잠결에 엉덩이를 긁어도 저것보다는 더 야할것이다.”
영화에서 그레이는 사디스트 성향을 가진 남자로 나온다. 자신은 사랑 말고 섹스만 한다며, 내 몸은 절대 만지지 말라며, 한 침대에서도 안 잔다며, 빽빽한 조항의 계약서를 아나스타샤에게 들이민다. 자기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라느니 아나스타샤를 때리겠다느니 벌을 주겠다느니 하는데 ‘저건 데이트 폭력이고 범죄인데,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불편한 마음이 계속 드는 거다.
그냥 사랑만 하면 될 걸 굳이 힘들게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가니 고구마 100개 삼킨 기분. 아나스타샤가 무작정 끌려가기만 했다면 더 답답했을 텐데 나름 주체성을 보이는 건 그나마 사이다였다.
그래도 1편은 전혀 기대 없이 봐서인지 그리 나쁘지 않았다(응?). 그레이에게 대체 어떤 어두운 비밀이 있기에(“나는 50가지 그림자로 얼룩진 놈이니까!”) 저러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엔딩신이 인상적이기도 하고, OST가 지나치게 고퀄이고, 검색해보니 2,3편으로 가면 그나마 나아진다고 하고, 애는 자고 남편은 야근이고(다시 떡밥 까는 중)...
야금야금 며칠에 걸쳐 2,3편도 결제해서 봤다^^(네이버에서 각각 1200원에 대여가능)
여전히 맥락도 개연성도 산으로 가고 남주는 무매력을 뽐내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의 신혼 생활을 그린 3편이 가장 나았다(네, 여러분. 신혼입니다. 신혼!).
마지막 3편에서는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욕구를 깨닫고 주체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커리어에서도 굉장히 성공한 인물로 나오는데 저렇게 맨날 칼퇴하고 밤마다 잠도 못 자서(응?) 일은 언제하나 싶기는 했지만, 1편에서는 콘돔을 살뜰히 챙기던 그레이가 왜 3편에서는 피임의 책임을 아나스타샤에게 돌리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1,2편에 비해 너무 뜬금없이 노출신이 등장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다큐로 받아들이지 말자, 이건 그레이라고).
인디영화와 예술영화를 사랑하는 내가 대체 왜 이런 영화를 계속 보고 있는 걸까, 하면서도 길티 플레저를 느꼈다. 2편부터 그레이는 사랑 바보가 되는데 그레이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이 아주 좋아서 죽고 못 사는 모습이 이상하게 예뻐 보이는 거다.
<그레이> 3부작에서는 그레이가 아나스타샤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성향(?)을 버리고 내면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 맥락도 개연성도 없이 그려진다. 그래도 두 사람이 정말 운명의 데스티니구나, 사랑하는구나가 마구마구 느껴지는 거다.
얼마 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추천 영상과 글을 본 한 후배가 말했다.
“이거 기혼자한테 너무 치명적이에요. 연애하고 싶잖아요.”
그 말을 듣고 깔깔대다 문득 슬퍼졌다.
“그러게 . 우리는 저런 사랑 이제 못하겠지. 연애도 못할 거고. 남편에 심지어 애까지 있으니까.”
남편과 나는 8년 연애 끝에 결혼했고, 올해로 결혼 7년차다. 남편과 내게도 한때는 그레이와 아나스타샤 같았던 때가 있었다(저 정도는 아니었나ㅋㅋㅋ).
하숙집 앞에서 헤어지기 싫어서 가로등 아래서 밤새 껴안고 있던 때도 있었고
아프다는 내 전화 한 통에 남자친구(지금의 남편)가 한밤중에 약 사들고 달려온 적도 있었고
군대 간 남자친구의 편지와 전화를 매일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아이가 생겼고 남편과 나는 연인에서 동지가 되었다. 남편과 나로 가득 찼던 우주에는 아이라는 또 다른 세계가 들어왔다.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고 가끔씩 설레기도 한다(정말이에요!). 하지만 이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고, 한순간만 못 봐도 가슴이 저릿한 정도의 설렘은 분명 아니다.
변기 커버를 올렸느니 내렸느니로 싸우고, 가사와 육아 문제로 날선 말을 내뱉고, 너무 힘겨울 때는 우리 둘 사이에 아이를 빼면 남은 게 뭐가 있는지 불쑥 회의가 들기도 한다. 단지 육아동지로 살아가는 선배 부부들을 보면 두렵다. 우리도 그렇게 될까봐.
그래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봤을 때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봤을 때도 조금은 우울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레이> 3부작에 홀려 2400원을 결재했는지도(자기합리화). 사랑밖에 모르는 저런 사랑은 이제 못해보겠지. 갑자기 확 늙어버린 것 같았다.
띡띠디딕. 현관문 전자키 누르는 소리. 남편이 치킨을 사들고 집에 들어왔다. 밤 11시, 오늘은 어제보다 일찍 퇴근했다. 식탁에 마주앉아 남편은 콜라, 나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하루 아이는 어땠는지 회사 생활은 어땠는지
읽고 있던 책은 어땠는지(영화 얘기는 비밀^^) 요즘 고민은 뭔지...
치킨이 두 조각쯤 남았을 때 나는 손을 닦았다. 그러자 남편이 일어나더니 찬장에서 먹다 남은 과자를 꺼내놓는다.
“너 지금 이거 먹고 싶지?”
치킨이 좀 느끼해서 달고 짠 게 먹고 싶었는데… 귀, 귀신이세요? 남편은 남은 치킨을, 나는 과자를 먹는다. 맥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내 삶의 궤적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 누구보다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 어쩌면 나를 낳은 부모보다도 내가 더 의지하는 사람. 오래도록 끓이고 끓여 푹 익어가는 시간이 없었다면, 이런 관계가 가능했을까.
터질 듯 뜨거운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20대의 설렘과는 다른 사랑이 쌓였다. 우리의 사랑은 지금도 끓고 있다. 하루하루 놀랍게 자라고 있는 아이와 함께.
그나저나
남편,
오늘은 일찍 들어올 거야?
<그레이> 3부작 보기 전 TIP
1. 기대없이 보면 의외로 괜찮다
2. 3부작 중 2편 '심연'은 정말 별로다
3. 후방주의 ㅋㅋㅋ
마더티브 인스타그램 instagram.com/mothertive
에디터 홍 브런치 brunch.co.kr/@hongmilmil/
[엄마의 영화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