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영화관] 힐링 영화 <어웨이 위 고>가 전하는 위로
얼마 전 에디터 홍이 <레볼루셔너리 로드> 얘기를 꺼냈다. 2009년에 개봉한 샘 멘데스 감독의 영화인데 여성이 결혼과 출산 과정에서 얼마나 사회적으로 소외되는지를 비극적·현실적으로 그렸다.
우린 과거에 분명 이 영화를 봤음에도 '왜 이런 내용인 줄 기억 못 했지'라며 무릎을 쳤다. 아마도 지금은 10년 전과는 다른 상황, 영화 속 주인공에게 더 공감하는 상황이기 때문일 거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다시 본 뒤 너무나 절망적이고 우울한 결말에 허우적 대다 같은 감독의 <어웨이 위 고>도 다시 꺼내보게 됐다. 역시 결혼과 출산을 다룬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적인 느낌.
9년 전 씨네큐브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땐 무척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당시 난 스물다섯의 대학생이었는데 결혼이나 육아의 '현실'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코 우울한 영화는 아니다. 뒤늦게 '힐링' 영화임을 깨달았다. 같은 영화인데 9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니. 어린 두 아이를 키우며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사는 부모로서 토닥토닥 따뜻한 위로를 받은 듯했다.
힐링이 필요한 당신에게 추천하는 <어웨이 위 고> 감상 포인트 세 가지.
베로나와 버트는 넉 달 뒤 아기를 맞이할 커플. 이들은 아이를 낳고 살기 위해 버트의 부모님 집 근처에 정착하지만 정작 부모님은 2년간 유럽에 살기로 했다며 뜬금없이 통보한다.
잔뜩 실망을 안고 돌아온 집은 입김이 나올 만큼 추운 데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베로나는 우리도 다른 정착지를 찾아 떠나자고 말하지만 혼란스럽다.
우리 이제 망한 걸까? 우리 이제 34살이잖아. 이 나이 되도록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몰라. 기본 말이야. 어떻게 살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베로나에게 버트는 사뭇 단호히 "우린 안 망했어"라고 말한다. 이런 문답을 핑퐁처럼 몇 번 주고받는데 내가 아이들을 낳고 달고 사는 말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 떠올라 한참을 웃었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 키우면서도 종종 날 의심한다. '내가 정말 이 아이들을 키울 자격이 있을까?',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벅차면서 어쩌자고 애를 둘이나 낳았지?'라며. 그러다 보면 불안과 걱정에 휩싸이고 기승전이생망이 돼버리는 현실.
난 비관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생긴 후부턴 불안을 달고 산다. 한 인간을 키워내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둘이나 되니 가끔은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린 안 망했어"라는 버트의 대사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로를 받았다.
"그래, 난 안 망했어. 부족하지만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 뭐." 불안을 조금씩 덜어내기로 했다.
베로나와 버트는 그렇게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여정을 시작한다. 여행 중에도 끊이없이 자신의 처지와 미래를 불안해하는 베로나, 그리고 그를 위로하는 버트. 수선(cobbling)과 조각(carving)을 헛갈리는 어쩌면 조금은 부족해보이기도 하는 버트지만 '긍정왕'인 그의 태도는 나에게도 위로가 됐다.
가족이나 친한 지인이 있는 곳에 살고 싶었던 베로나와 버트는 지인들을 만나러 다니며 롤모델 가족을 찾는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매우 다양해 여러 삶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엿보인다.
결혼과 육아에 대한 비관적인 막말을 서슴지 않는 베로나의 전 직장 상사 가족, 아이들과의 애착을 위해 모유수유를 고수하며 유모차를 절대 쓰지 않는 철학을 갖고 있지만 은근한 돌려까기를 시전하는 위선적인 버트의 사촌, 입양한 아이들과 가장 완벽하게 사는 듯했지만 속 사정이 있었던 대학 동창 부부 등. 영화이기에 조금은 과장된 모습이지만 아주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접할 법한 다양한 가족상을 그렸다.
주인공 베로나와 버트도 평범하지만은 않다. 영화에서 베로나는 버트의 청혼을 여러 번 거절한다. "'결혼'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면서. 그렇다고 버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지리' 버트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난 행운아"라고 말하는 베로나다.
나 또한 5년 전 결혼을 앞두고 남편에게 "혼인신고는 필요없다"고 누누이 말했다. 아이들을 생각해 신고를 하긴 했지만 최근 '애를 둘이나 낳은 아줌마니 이제 어디 못 간다'는 남편의 농담에는 정색을 하고 말았다.
"혼인 신고서나 애들 때문에 오빠랑 사는 게 아니니까 내가 정말 못 살 것 같으면 난 언제든 떠날 수 있어. 하지만 내 삶을 함께 일궈갈 사람으로 오빠를 택한 거고 내가 선택한 사람과의 삶에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남편에게 겁주려던 게 아니다. 내 진심을 얘기하고 싶었다. 우리가 결혼식이나 혼인신고 같은 형식이 없어도 유지되는 관계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남편은 더 이상 이런 농담은 하지 않는다.
어쨌든 결혼해서 애 키우고 산다고 다 똑같은 건 아니다. 집집마다 사정이 있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하는 건 당연하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가족상은 결혼과 출산을 앞둔 이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을 던진다.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주인공 베로나와 버트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결혼은 하지 않지만 이들이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게 화면 밖에서도 느껴질 정도다. '눈에서 꿀 떨어진다'는 표현은 이럴 때 뙇 쓰는 건가. 솔직히 처음엔 '저런 모지리가 뭐가 좋은 거지?'라며 베로나를 의심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완전무결 순수한 사랑을 받고 있는 베로나가 부러워졌다. (남편 사랑도 충분합니다만ㅎㅎ)
줄곧 베로나를 위로해오던 버트는 갑자기 아내가 떠나버린 형과 조카를 보며 무너지고 만다. 그런 그에게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다독이는 베로나.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는 둘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더 결혼이라는 형식이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
이어 둘은 트램펄린에 누워 "우리 딸이 뚱뚱하든 말랐든 구박 안 하겠다고 약속해줘", "우리 딸이 얘기하면 잘 들어주겠다고 약속해줘" 등을 서로에게 묻고 "약속할게(I do)"라고 답한다. 마치 둘만의 작은 결혼식을 올리는 듯 흐뭇한 장면이다.
<어웨이 위 고>의 베로나 역을 연기나 마야 루돌프는 내가 사랑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SNL 출신다운 그의 코미디 연기도 일품이지만 이 영화에서의 정극 연기도 뛰어나다. 베로나 역은 마야 루돌프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호연을 보여줬는데 과장을 싹 뺀 담백하고 절제된 연기가 매력적이다.
이렇게 좋은 영화지만 넷플릭스에서도, 유튜브에서도, 왓챠플레이에서도 볼 수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하지만 네이버에서는 볼 수 있으니 걱정 마시라. 꽃샘추위와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방구석에서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영화로 추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던 베로나와 버트가 선택한 곳은 어디일까. 마지막 그들의 선택 또한 큰 울림을 주기에 아껴둔다. 꼭 확인해보시길.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
1. 아이를 낳고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살지 고민 중이라면
2. 부모가 되는 것이 불안하다면
3. 새로운 형식의 결혼생활이나 가족상을 바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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