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에게] 한때는 여자로 태어난 게 형벌 같았어
어려운 이야기 꺼내 줘서 고마워. 니 편지 보면서 내가 겪었던 일들도 하나둘 아프게 떠올랐어.
대학생 때 내가 야학에서 봉사활동으로 교사를 했잖아. 그때 올드보이 모임이라는 게 있었어. 이전에 야학 교사였던 대선배들과 현직 교사들이 만나는 자리였지.
정확한 상황은 잘 기억 안 나. 그 OB는 40대 정도 됐을까. 어두운 술집이었고, 내 옆에 앉아서는 술에 취해 나를 계속 만졌어. 너무 불쾌했지. 동시에 무서웠고.
내가 어떻게 했냐고? 그냥 웃었어. 그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 그저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지. 어렴풋이 사회생활이란 이런 거구나 생각했던 것 같아. 이렇게 어른이 되는 거구나. 20대 초반의 일이야.
그때 옆에 있던 남자 야학 동료가 “왜 이러시냐” 농담하면서 나와 OB 사이를 파고들었어. 백마 탄 왕자(외모와 전혀 무관)가 나타나 나를 구해준 거지. 그 남자 동료에게 처음으로 호감을 느꼈던 순간이었어. 짐작하겠지만 그 남자 동료는 남자 친구가 됐고 지금의 남편이 됐어.
그 순간을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 나는 왜 바보같이 웃고만 있었을까. 왜 동갑내기 남자가 나를 구하게 내버려 뒀을까. 물론 지금은 알지. 잘못한 건 웃은 사람이 아니라 만진 사람이라는 걸.
일상적인 성범죄에 노출될 때마다 내가 했던 건 아니, 할 수 있었던 건 두 가지였어. 참거나 혹은 웃거나. 그리고 집에 와서는 그때 그 상황을 열 번 스무 번 곱씹으며 울었지. 밖에서는 결코 약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
어떨 때는 그냥 내가 여자가 아니었으면 싶었어. 여자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불편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을 텐데.
30대가 되기 전까지 사실 나는 명예 남성에 가까웠어. 남자들이 절대적으로 많은 기자 집단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와 다르게 취급받고 싶지 않았어. 남자와 여자는 다를 것 없다고, 실력으로 인정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지.
결혼과 출산을 겪으면서 상황은 완전 달라졌어. 기억하지? 나 소박한 결혼식 한다고 엄청 유난 떨었던 거. 청첩장에 내 이름을 먼저 적은 것도, 식장에 아빠 손 안 잡고 남편과 나 두 사람이 함께 걸어 들어간 것도, 양가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않은 것도. 이 결혼이 평등한 두 인격체의 결합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어. 나와 남편만 잘한다면 평등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 대단한 착각이었어.
결혼 후 첫 명절에 깨달았어. 아, 나는 그냥 여자였구나. 남자 집안에 종속된 아내, 며느리. 내 위치가 여기구나.
명절에 당연히 시가 먼저 가야 하는 것도, 시가 부엌 근처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종종거리는 것도, 불편한 친척들 사이에서 억지로 웃고 있는 것도. 내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쭈뼛거리고 있는 내게 한 남자 친척이 그러더라. 가서 커피 좀 타오라고. 제일 견딜 수 없는 건 착한 며느리 역할극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었어.
명절은 1년에 2번이었지만 엄마가 된다는 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문제였어. 아이는 정말 예뻤지만 나는 사라지는 것 같았지. 집안에서는 생전 처음 해보는 엄마 역할에 허둥대다 집 밖에서는 맘충 소리 들을까 늘 신경이 곤두섰어. 남편이 아무리 최선을 다 해도 엄마 역할과 아빠 역할은 기본값부터 달랐어. 나는 당장 내일 출근할 수 있을지,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을지도 불안한데 남편의 커리어는 갈수록 탄탄해졌어.
다시 한번 내 주제를 깨달았어. 아, 여자로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남자와 여자는 정말로 다른 거구나.
얼마 전, 기사를 보는데 코로나 가족돌봄휴가 신청자 69%가 여성이라고 하더라. 재난 속에서도 돌봄의 책임은 여성에게 더 쏠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엄마가 일과 육아 사이에서 살얼음판을 걷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몇 달째 집안에 갇혀서 숨 한번 돌릴 틈 없이 아이와 씨름하고 있을까. 그러다 잠깐 밖에 나가면 또 맘충, 민폐맘 소리를 듣겠지. 애 있는 여자에게 세상은 힘껏 무례해.
'n번방'에, 코로나에. 여자로, 엄마로 사는 건 왜 이리 힘든 일일까. 분노하다 한참 전 사놓고 책장에 꽂아둔 책을 펼쳤어. 권김현영 선생이 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성차별과 성폭력의 역사에 분노하다가 이 대목에서 숨을 골랐어.
“나에게 페미니스트란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사람, 알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는 올바름의 이름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권김현영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2년 전, 우리 처음 마더티브 만들었을 때가 떠올랐어. 엄마로 사는 게 왜 이리 힘들지, 나만 뭔가 잘못된 걸까 혼자 끙끙대다 ‘육페(육아+페미니즘)’라는 사내 소모임을 만들었고, 그게 ‘마더티브’ 창간으로 이어졌지. 니가 마더티브 이름을 지었잖아. Mother+Narrative. 엄마의 새로운 서사.
네 명의 여자가 함께 우리의 경험을 말과 글로 표현하면서 느낀 건 해방감이었어. 현실의 고통에서 한 발짝 나와 내가 처한 현실과 고통을 대면했을 때, 그걸 나만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게 됐을 때, 우리는 가부장제의 피해자로만 머물지 않게 됐어.
한때는 여자로 태어난 게 형벌처럼 느껴졌어. 지금은 생각이 달라. 여자이자 엄마이기에. 내 삶에 대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더 예민하고 치열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어. 그러자 정말 많은 게 바뀌었어(이 이야기는 다음번에).
니가 말했지. 더는 숨지 않겠다고. 딸에게 더는 조심하라고만 가르치지 않겠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더는 조심하지도 참지도 않으려고 해. 피곤하고 불편해져도 늘 무엇이 옳은지 질문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되려고 해. 그러기 위해 계속 쓰는 사람이 되려 해.
무엇보다 이제는 즐거울 때 웃고, 슬플 때 우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내 자신에게, 내 아이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도록.
-4월 13일, 이번 편지는 유난히 쓰기 어려웠던 현진.
현진, 주영 두 여자가 쓰는 교환일기 [엄마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